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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족이 대신 죽어야 하느냐" 신화 통해 가부장제 비꼬다

[리뷰]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킬링 디어>

18.08.03 12:27최종업데이트18.08.03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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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킬링 디어> 포스터. ⓒ 오드


[기사 수정 : 3일 오후 4시 7분]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가 전해진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서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아울리스 섬에서 함대를 출발시켜 트로이로 진격해야 했는데, 바람이 멎는 바람에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가멤논은 예언자 칼카스로부터 수호신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죽이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다. 그렇게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의 영웅이 된다.

<송곳니>, <더 랍스터> 등으로 전 세계 평론가들과 씨네필들의 열열한 지지를 받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모티브 삼아 신작 <킬링 디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운명, 딜레마, 가부장제 등의 이야기에 질문과 비판을 곁들였다. 가히 고대 그리스 최고 작품에 비견될 만한 각본의 성취를 인정받아 제70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품 속에 녹아든 그 치밀함을 엿보자.

가족 중 한 명을 골라 죽여야 한다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 오드


외과의사 스티븐(콜린 파렐 분)에겐 젊은 친구가 한 명 있다. 마틴(배리 케오간 분)이라는 이름의 친구인데, 그는 스티븐의 큰딸 학교 친구로 스티븐처럼 심장병 전문의가 되고 싶다고 한다. 마틴은 스티븐의 병원에도 들르고, 산책도 같이 하고, 서로의 집도 오간다. 그러던 어느날 스티븐은 마틴의 집에 갔다가 마틴 엄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온 후 마틴의 연락을 피한다.

이후 마틴은 집착적인 행동을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티븐의 가족들에게 이상 징후가 발견된다. 먼저 아들 밥이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된다. 육체, 정신, 심리 검사를 다 해보았지만 검사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머지 않아 밥은 밥도 먹지 않게 되고, 딸 킴도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에 관해 마틴이 스티븐에게 설명한다. 그런데 설명하는 내용이 사실상 협박이다. 마틴의 아빠가 스티븐에게 죽었기 때문에 스티븐의 가족이 이상한 증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스티븐이 맡은 환자였던 마틴의 아빠는 수술대 위에서 죽었다. 마틴은 스티븐이 자신의 아빠를 죽게 만든 것처럼 스티븐이 자기 가족 중 죽을 사람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균형이 맞는 게 아니냐면서.

만약 스티븐이 직접 선택하지 않는다면 가족 세 사람은 모두 병들어서 죽을 거라는 것이다. 마틴의 말에 따르면, 스티븐이 죽을 사람 한명을 선택하지 않으면 밥이 죽고 킴이 죽고 스티븐의 부인 안나(니콜 키드만 분)까지 죽을 거라는 얘기다. 수족이 마비될 것이고 먹는 걸 거부해서 굶주림에 허덕이게 될 것이며, 급기야 눈에서 피가 흐르고 결국 죽을 거라고 말이다. 믿기 힘든 예언이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 스티븐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정말 가족 중 죽을 사람을 한 명 선택할 것인가, 선택한다면 누굴 죽일 것인가.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 오드


신화에서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신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킬링 디어> 속 스티븐은 마틴의 분노를 사서 결국 자기 가족 중 죽을 사람을 직접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스티븐에게 닥친 일은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들 때문에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없다.

영화는 이미 운명의 굴레 속에 들어간 또는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 일개 인간이 겪는 끔찍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과연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말이다.

가부장제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 오드


영화 속 스티븐의 얼굴을 보자. 얼굴을 뒤덮다시피 하는 '털'의 존재를 볼 수 있다. 영화에서 밥은 마틴에게 겨드랑이 털을 보여줄 것을, 마틴은 스티븐에게 겨드랑이 털을 보여줄 것을 청한다. 이 세 남자 사이에서 나이순대로 보여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털로 상징되는 권력, 그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모습이다.

극 중에서 안나는 말한다. 왜 남편이 잘못한 걸 가지고 남편 아닌 가족들이 피해를 봐야 하느냐고 말이다. 마틴의 논리는 스티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티븐이 마틴의 아빠를 죽게 만들었으니, 스티븐이 자신의 가족 중 한 명을 죽여야 한다는 것. 등가교환이라면 스티븐이 죽어 마땅하나, 신은 '가부장제'라는 절대적 법칙을 만들어 내렸으니 가장인 스티븐이 주체가 되어 가족을 죽이는 '고통'을 맞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진중하며 으스스하고 가슴 졸이게 하는 장면들은 영화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영화에서는 당연한 듯 하나하나 실행되고 등장인물 또한 실행에 옮기려고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이기도 하다. 아마도 관객이 그렇게 느끼면 느낄수록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그만큼 철처히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겠다. 바로 가부장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여러 가지 요소들을 비꼬는 와중에 영화 속 분위기는 이에 걸맞지 않아서 오히려 비꼬는 수위가 더욱 강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분위기 연출에는 OST의 역할이 지대했다. 클래식한 OST들은 영화 속 분위기를 굉장히 날카롭고 불편하게 만든다. 영화에 깔리는 음악은 높낮이가 일정하게 낮고 무성의한 배우들의 목소리톤과 기묘하게 어울린다.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영화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두 번 이상 봐야 할 것 같은 영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블로그(singenv.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킬링 디어 그리스 비극 가족 딜레마 가부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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