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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 입고 싶어하는 '아들'에게 부모가 하지 말아야 할 것

[조곤조곤 25] 한국 퀴어 영화제 개막작 <어 키드 라이크 제이크>

18.07.23 17:59최종업데이트18.07.2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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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1990년대가 더 보수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니에요. 그때는 성 소수자라 하면 '뭐야? 변태 아니야?' 정도였지, 요즘처럼 '사회 악(惡)'으로 여기진 않았어요."

지난 21일 <뉴시스>에서 보도한 한채윤 서울 퀴어퍼레이드 기획단장의 인터뷰 중 눈길을 끈 대목이다. 1990년대에는 내가 어린아이였던 시기라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려보자면 저 이야기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나는 엄마의 화장품을 발라보거나 치마를 입거나 혹은 하이힐을 신어 보았다. 딱히 '여성'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치장을 하고 옷을 잘 입으면 엄마가 더 예뻐지는 게 신기하거나 부러웠던 듯싶다. 당시 엄마는 그런 자신의 아들을 어딘가 문제 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단지 유별나다고 생각하셨을 뿐이다. 내가 혼난 이유는 아까운 화장품을 낭비하거나 옷을 구겼기 때문이지 다른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요즘 같은 시기에 태어나 같은 모습을 보였다면 부모님의 반응은 똑같았을까? 한채윤씨의 말처럼 조직화된 혐오 세력은 성 소수자를 '병리적 존재', '사회악'으로 몰며 허위 정보를 빠르게 유포시키고 있다. 나의 부모님이 인터넷을 검색하다 혹은 메신저를 통해 성 소수자에 대한 가짜뉴스들을 접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어쩌면 부모님은 내가 너무 어린 나머지 비정상이거나 사회의 병폐에 물들었으리라 여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읽는 책, 보는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샅샅이 파악하고 원인을 찾아내려 했을 수도 있겠다. 혹은 정신과에 보내 자기 아들이 정말 문제가 없는지 알아보려고 했거나.

왜 부모는 아이를 위해 선을 긋고자 했을까

제 18회 한국퀴어영화제 포스터 ⓒ 한국퀴어영화제


올해 제18회 한국 퀴어 영화제 개막작 <어 키드 라이크 제이크(A Kid Like Jake)>의 주인공 알렉스와 그레그 부부는 비슷한 딜레마에 빠진 인물이다. 두 사람의 '아들'(내 기억으로 영화의 주인공인 제이크가 자신의 성별을 명확히 이야기한 적이 없기에 인용 부호를 달고자 한다)인 제이크는 인형 놀이를 좋아하고 핼러윈에 라푼젤 의상을 입고 싶어하며 놀이에서 역할극을 하면 공주 역을 맡는다. 영화의 처음부터 이를 이유로 극단적인 상황이 펼쳐지진 않는다. 이들 부부는 제이크의 취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제이크를 학교에 보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자 상황은 달라진다. 알렉스와 그레그는 제이크의 행동에 대해 고민하며 어떤 선택이 자신들의 아이를 위해 최선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영화에서 부부는 제이크에게 어느 정도 선을 그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공주 의상을 입고 싶어 하는 제이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남자 아이'가 드레스를 입을 수 없다는 걸 가르치고자 한다. 하지만 자신의 희망이 좌절된 제이크가 아무렇지 않게 그 일을 넘어갈 리가 없다. 제이크는 자신의 세계를 방어하기 위해 점차 고집스럽고 보다 방어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대로 치마를 입고 역할 놀이를 할 수 없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싫어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알렉스와 그레그의 시름은 깊어간다. 특히 알렉스는 제이크의 이런 모습 때문에 장학금을 받지 못하고 사립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다양한 삶들을 위해 필요한 상상력

영화 <어 키드 라이크 제이크(A Kid Like Jake)> 포스터. ⓒ Bankside Films


아마 영화를 감상한 관객들은 대부분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고 싶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아이가 원하는 대로 치마를 입게 해주었으면 이 사달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만일 제이크가 자신의 취향과 욕구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공격받는다면, 필요한 일은 그런 아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힘을 주고 든든하게 지켜주는 것이라고. 알렉스와 그레그는 왜 그 일을 하지 못했을까? 왜 정말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그들은 몰랐을까? 이유는 이들이 '남자 아이는 치마를 입거나 공주가 되어선 안 된다'는 사회의 성별 이분법과 이에 따른 젠더 규범을 문제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규범에서 벗어난 제이크를 의심했고, 결국 아이를 기른 것은 자신들이기에 화살은 서로에게 또 스스로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흥미롭게도 제이크를 가르치는 교사이자 알렉스의 친구인 주디는 학부모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이들이 자라나는 데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그 장면을 보던 나는 의문이 들었다. 과연 어른들에게는 그런 상상력이 충분히 있을까?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는 충분히 그리고 잘 성장한 것이 맞을까? 알렉스와 그레그를 지켜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성별이 꼭 두 가지로 나누어지지 않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이분화 된 젠더에 따른 적합한 취향과 입을 수 있는 옷따위는 없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제이크가 부부가 말한 '선'에 제약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여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과연 이야기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사랑할수록 그 사람을 제대로 알기는 힘들다

영화 <어 키드 라이크 제이크(A Kid Like Jake)>의 한 장면. ⓒ Bankside Films


"사람을 제대로 아는 것은 쉽지 않아, 특히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후회하는 알렉스에게 주디가 건네는 말이다. 그녀의 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이 사회가 말하는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났을 때, 그 규범이 아무리 부당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움에 빠지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이 아끼는 사람이 억압 받거나 배제되지 않기를, 그 모습을 지켜보지 않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함께 세상에 맞서자니 언제 변화가 찾아올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서 현실을 외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자기도 모르게 부정한다. 평소에는 그렇게 상식적으로 보이던 사람이 자신과 가까운 이가 '소수자'라는 게 드러날 때 일을 그르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상'과 '편견'의 가장 큰 차이는 가능성을 여느냐 닫느냐이다. 존재의 다양성을 상상함으로서 우리는 각양각색의 삶과 정체성을 인정할 수 있게 되고 공존의 가능성을 찾는다. 누가 어떤 성적 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가지고 있든, 그들의 삶을 선입견 없이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다면 이는 더 이상 낯설거나 비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들이 내 주변에 있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반면 편견은 그런 가능성을 가로막고 소수자를 문젯거리 혹은 병폐로 규정하며 결과적으로 이들을 배제하고 멸시하게끔 만든다. 그런데 그 대상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속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사회는 공동체의 집합이며, 공동체는 여러 관계들이 뭉쳐 만들어진다. 친구·가족·동료 관계 등. 즉 타인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것은 사회적인 문제를 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개인의 인간관계를 파괴시킬 수도 있다.

<어 키드 라이크 제이크>는 내가 본 영화 중에서 이 문제를 가장 구체적이고 밀도 있게 담아낸 작품이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는 무척 소중하다. 차별과 혐오, 배제가 일견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혐오 집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관람을 강력히 권한다. 편견의 힘이 강한 이유는 그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 생각지 못한 모습으로 불쑥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다양성을 상상하는 힘은 필요하다.

한국퀴어영화제 어 키드 라이크 제이크 성소수자 다양성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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