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나의 아저씨' 향한 가혹한 평가들, 동의 못하겠다

[TV 리뷰] 종영한 tvN 수목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남긴 여운

18.05.25 16:38최종업데이트18.05.28 11:34
원고료로 응원

<나의 아저씨> ⓒ tvN


지난 17일 종영한 tvN 수목드라마 <나의 아저씨> 드라마는 방영 초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젊음'과 '여성'이 남성들에게 불온하게 소비될 수 있는 조합이기 때문일까. 스물 하나 지안(이지은 분)과 마흔 다섯 동훈(이선균 분)의 설정만으로 호된 거부감을 불러왔다.

이 드라마를 아름답다, 호평한 이유로 거센 항의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삶의 경험과 위치에 따라 시선의 편차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신문에서 읽은 <나의 아저씨> 평의 제목은 '기득권 아재들의 피해자 코스프레'였던 걸로 기억한다. 젊은 여성에게 친밀하게 불리고픈 남자들의 자의식, 여성 비하의 대사, 가학적 폭력 등을 지적하며 아저씨들이 사회에서 핍박받는 소수자라는 전제가 불편하다고 했다.

여성주의 시각에서 검열을 하자들면 성차별, 연령차별의 대사가 곳곳에 드러나고 가학적 폭력,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의 사랑의 설정이 위험한 상상을 불러올 법하다. 하지만 여성주의자의 시선에 이 드라마는 시종일관 불편하기만 했을까? 동훈과 후계리 사람들이 보여준 '따뜻한 감싸 안기'가 중년 아재들의 피해자 코스프레로만 느껴졌을까? 나는 페미니즘을 자아정체성 일부로 갖고 있는 여성이다. 남성보다 여성에 감정 이입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고, 젊은 여성을 성적 판타지로 대상화하는 시선을 거부한다. 하지만 세간의 우려와 거부감에 동조하지 못한 채 <나의 아저씨> 열혈 시청자가 되고 말았다.

누구는 드라마가 불편하다고 한다. 지안 삶의 무게에 숨이 막힌다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반응이다. 고분고분한 구석은 조금도 없는 냉담한 표정의 지안이 우리 삶으로 들어오면 누구라도 불편하다. 하지만 파견 말단직 지안이 주는 껄끄러움을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일부러 냉담해짐으로써 스스로 살아남으려는 전략'으로 읽어낸 시선이 있다. 지안에게 안쓰러운 연정을 느끼는 동훈이 그러하고, 산동네 밤길 지안과 동행한 후계리 사람들이 그러하고, 불륜의 치부를 밝히면서까지 지안을 변호한 윤희(이지아 분)의 시선이 그러하다.

'한 아이를 키워내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버려짐과 폭력, 가난과 냉대를 고스란히 겪어낸 어린 영혼을 어루만져, 삼만살로 늙어버린 지안을 스물 하나로 돌려놓는 데 후계리 온 마을이 동참한 셈이다. 하루 노동 후, 정희네 술집에 모여 왁자지껄 위안과 공감을 나누는 그들을 누가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자의 넋두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저마다 불온전한 삶일 수 있으나 위안을 나눌 줄 알기에 아무도 지안의 삶에 불쌍타, 싸구려 동정을 들이대지 않았다. 지안의 침묵 뒤에 숨은 아픈 기척을 조용히 알아차렸을 뿐이다. 함께 걸어주고, 말을 걸고, 술자리 한 구석 내주고, 할머니 장례식에 가주었을 뿐이다. 소소하고 확실한 위로라고나 할까.

나의 아저씨 ⓒ tvn


여느 드라마와 달리 <나의 아저씨>는 특정 주인공에만 감정이입을 유도하지 않는다. <나의 아저씨>를 보면서 나는 여러 인물들의 마음 속을 넘나들었다. 출가한 애인을 애달피 그리워하는 정희(오나라 분),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을 원망하는 상훈의 아내(조애련 분), 후계리 사람들에게 남편을 빼앗긴 듯 늘 허전한 윤희, 장남 역할을 못한다며 미안해하며 훌쩍이는 상훈(박호산 분), 영화 감독의 꿈을 접고 청소 일을 하는 기훈(송새벽 분), 자식 걱정에 고단한 동훈의 어머니(고두심 분), 심지어 지안에 대한 연민을 폭력으로 드러내던 광일(장기용 분)까지. 꼭 저들의 삶을 언젠가 나도 한번 살아본 듯 후계리 사람들에게 나의 감정이 질펀하게 뒤섞였다.

<나의 아저씨> 드라마 절정은 지안의 오열에서 빛난다. 꼭꼭 감추고 싶은 지안의 과거가 동훈에게 드러난 순간, "나라도 죽였어. 나라도 내 식구 건드리면 가만 안 둬" , 동훈의 목소리를 듣는다. 지안은 풀썩 주저앉아 울음을 토해낸다. 지안의 오열은 나에게도 전염되어 오래전 어딘가 떨구고 온 서러운 기억 한 자락 소환된 듯 펑펑 울고 말았다. 막막하게 혼자인듯 시간을 보낸 사람은 알 것이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시간이 얼마나 가혹한지. 상처받기 싫어 스스로 쌓은 담장의 그늘이 얼마나 사람을 춥게 하는지. 나라도 죽였어, 동훈의 말에 터져나온 지안의 오열은 냉담이 무너지는 소리이고, 치유를 불러오는 한바탕 눈물의 굿판이었다.

지안은 말한다. 다시 태어나면 이곳 후계리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후계리는 어느 책 한 구절처럼 '연약하고 뭔가를 잃어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무리를 이루어 곳곳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그건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달의 뒷면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 나약한 결핍이 오히려 깊은 울림으로 돌아오는 곳, 상처 입은 연한 살갗이 서로를 알아보는 곳, 베푸는 자와 수혜자의 경계 없이 서로 감응하는 곳. 이렇게 후계리 사람들은 오랫동안 울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린 지안에게 울음을 돌려줌으로써 지안이 제 나이를 살게 하였다.

<나의 아저씨> 종영 자막에 '우리는 모두 괜찮은 사람이에요'라고 떴다. '괜찮은 사람' 이란 적당히 나쁘고 적당히 좋은 사람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우리에게 바랄 수 있는 최선의 현실치가 아닐까. 매순간 온전히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구조기술사 동훈의 말처럼 내력이 외력보다 강하면 견딜 수 있듯, 저마다 적당히 나쁜 외력보다 적당히 좋은 내력이 더 커지길 바란다. 타인의 고통에 감응과 외면을 오가는 우리에게 후계리 풍경이 공감의 촉수를 섬세하게 해주었다면 이것으로 일부 여성주의자들이 들이댄 의혹의 시선을 가뿐히 넘겨도 되지 않을까. 슬픔이 깊은 울림이 되었던 마을, 후계리에 잠시 여행갔다 온 기분이다.

나의 아저씨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