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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 'GO', 재일조선인의 '질주'에서 포착되는 의미

[담론으로 보는 영화] 재일 조선인 스기하라가 세상을 향해 내디딘 발걸음

18.05.25 16:20최종업데이트18.05.2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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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 >는 달린다

영화 < GO >의 작품 포스터 ⓒ 스타맥스


만약 당신이 <세계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보았다면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는 것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최근 한국에 개봉했던 <나라타주>를 보았다면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 것일 테다. 혹시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나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도 보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두 영화를 감독했고 두 영화의 조감독이었던 유키사다 이사오의 열혈 팬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유키사다 이사오가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고 또 많이 찍은 건 맞는데, 개중에는 < GO >라는 특출난 작품도 있다. 작품성이 뛰어나다거나 이야기가 특이해서가 아니다. 가네시로 가즈키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재일조선인 문제를 로맨스인 듯 로맨스 아닌 듯 유쾌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무척 재미있게 다가온다. 잘 몰랐던 문제에 귀를 기울이되 너무 마음이 철렁하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로맨스 영화답게 영화의 스토리는 무척 간단하다. 조선학교에 다니는 주인공 '스기하라'는 '조선(북한)'에 매달리는 아버지와 자신을 배척하는 일본 사회에 환멸감을 느낀다. 아버지를 졸라 일본 학교로 전학했으나 전보다 큰 차별에 시달리게 됐을 뿐이다. 하루하루 아이들과 멀어지며 패싸움이나 하고 다니던 중 어느 일본인 여자아이와 사랑에 빠진다. 학교도 연애도 나름 잘 버티며 옛 조선학교 친구들과 놀러 다니던 스기하라. 조선학교 절친 '정일'과 놀러 다니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조선학교 여학생을 괴롭히던 일본 불량배에 대항하다 정일이 칼을 맞고 사망한다. 절친의 사망에 방황하던 스기하라는 여자친구와 첫날밤에 자신이 재일임을 밝히고, 이에 여자친구와 헤어진다. 이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스기하라의 곁에 떠나간 여자친구가 돌아오고 해피엔딩.

이 영화를 한 가지 단어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달리다.

영화 < GO >의 한 장면 ⓒ 스타맥스


1. 달린다

달린다. 스기하라는 달린다. 영화가 시작하고 첫 번째 시퀀스에서 스기하라와 조선학교 친구들이 전철과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다. 전철보다 빨리 달려 다음 역에 무사히 도달하면 사람의 승리, 물론 보상 같은 건 성취감 말고는 없다. 그런데도 죽을 듯이 달려 남들이 한 번도 성공해내지 못한 전철과의 경주에서 승리하고야 만다.

도전하지 않으면 겁쟁이라는 친구들의 농담이 스기하라의 도전을 합리화해주진 않는다. 사춘기의 치기라 해도, 전철과의 경주 따위보다 제 목숨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스기하라는 분명 무언가에 홀린 듯 달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가지를 가정해볼 수 있다. 첫째, 스기하라에겐 달리는 게 죽음보다 더 가치 있는 행위다. 둘째, 스기하라는 친구 무리에서 배척받고 싶지 않아 한다.

분명 전자가 더 합당해 보인다. '달리는' 행위는 자신을 묶어 두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트라우마고, 과거이자 시간, 혹은 내면의 나약함 등일 테다. 이를테면 <록키>에서 주인공이 마을 한 바퀴를 거쳐 계단 위로 올라가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사람이 앞으로 나아갈 때 바닥에 박힌 보도블록은 뒤로 지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바닥에 박힌 것을 차례로 밟아 나간다는 것, 그게 뒤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상처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극복의 대상'임을 상기하게 된다.

극복해야 할 여러 형태의 '속박'이 있지만, 스기하라에게는 정체성에 대한 압박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스기하라의 독백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문구를 인용한다. "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아름다운 향기에는 변함이 없는 것을". 이윽고 학교 체육관에서 농구 시합 중에 멍하니 서 있는 채로 여러 '이름'을 속행하는 스기하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고는 자신은 어느 이름으로 불려야 하느냐며 한탄한다.

스기하라가 인용한 문구는 본질은 같아도 지칭하는 이름에 따라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상황을 강하게 비난한다. 말하자면 회사에서는 김대리고 밖에서는 아저씨지만 나에게는 '나'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스기하라는 여러 이름을 속행하면서도 정작 특정한 이름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건 자신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름이 없다는 건 아무것도 아니기에 자유롭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스기하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호소하는 게 된다.

그렇다면 스기하라는 왜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분명 스기하라에겐 '재일조선인'으로의 이름이 있다. 하지만 조선 이름 일본 이름 따로는 아니고, 둘 다 합쳐진 어중간한 이름이다. 그 말인즉슨, 스기하라의 정체성도 이도 저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름이라는 건 사물이 세계로 나서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김춘수의 시 <꽃>을 떠올려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듯, 희미한 기억 속에서 흐릿함이 명확해질 때야 비로소 제대로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두 개의 정체성 사이에 어느 것도 선택해야 할, 하지 말아야 할 합당한 이유가 있고 그걸 물 흐르듯 흘려보내려는 행위가 바로 달리기다. 그렇다면 전철은 보통 사람보다 빠르니 사람으로 치면 이미 문제를 극복했을 것이며, 스기하라는 그를 이김으로써 자신 또한 극복되리라 믿는 듯하다.

영화 < GO >의 한 장면 ⓒ 스타맥스


2. 걷는다

걷는다. 스기하라는 달리기만 하는 건 아니고 걷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걷는 장면이 그다지 크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달리다'라는 단어가 주축임을 고려해볼 때 무척 중요하다. 걷는다는 건 달리는 것보다 천천히 이동하겠다는 것이며, 그건 곧 서두르지 않는 인내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스기하라는 정체성에 불만을 품어 사회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무척 사납게 살아가는 중이었고, 그래서 전철과 시답잖은 시합을 벌였었다. 하지만 여자친구를 만나고서부터 천천히 걷는 모습이 본격적으로 묘사된다. 이후 절친 정일과 육교에서 헤어지는 장면에서도 길고 긴 걸음이 묘사된다. 그다음 시퀀스에서 정일이 살해당하고 조선학교 동창이 범인에게 폭력으로 맞대응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도 이전과는 달리 '정일은 폭력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인내의 미덕을 보여준다.

영화는 중반 60분 지점에 스기하라가 여자친구와 함께 걸으며 대화하는 장면을 수평 트래킹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오고 가는 대화는 가족관계와 같은 진솔한 이야기다. 두 사람은 맨발로 아무도 없는 도로를 걸으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등의 질서를 지킨 낭만을 즐긴다. 다음 시퀀스에서 스기하라는 여자친구 집에 초대받아 난생 처음 일본인의 집에서 식사하게 된다.

가족에 관해 이야기 한다는 건 자신의 뿌리, 정체성을 상대에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의의가 있는데, 하나는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것과 둘은 정체성을 상대에게 드러낼 정도로 신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민족주의의 장단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가 확실하다면, 나와 같은 곳에서 오지 않은 사람은 모두 타자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이는 작중 인물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이분법의 요소이며, 이러한 부분이 스기하라에 대한 비판점이 되기도 한다. 작중에서 스기하라가 고민하는 정체성에는 한국/일본이라는 두 선택지밖에 없다. 분명 그 외의 선택지가 있기는 하다. 물론 현실적인 측면에서 선택/비선택의 선택지만이 가장 효율적일 수도 있겠지만, 스기하라의 가정이 재일 조선인 중에서는 부유한 편이라는 걸 고려하면 완전한 납득은 안된다. 그러니 어쩌면 '재일'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자신을 타자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에도 스스로 옭아매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스스로 옭아매게 되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 관해 우리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건 한일전에서 우리가 느끼는 투기처럼 몹시 민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상에서도 그것이 명백하게 묘사된다. 영화 초중반에 조선(북한) 국적에 회의를 느끼던 스기하라의 아버지가 하와이로 떠나자고 선언하는 장면이 있다. 사회주의 강령하에 자본의 점령지인 하와이로 떠나겠다는 건 조선국적과 사회주의 신념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스기하라의 아버지는 이미 국적을 바꿀 마음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스기하라의 아버지는 비자 발급처에서 온갖 사회주의 물건들(김정일 찬양집, 마르크스 전집 등)을 제시하며 "이런 걸 내보이는 데 비자를 쉽게 내주냐"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건 마치 "이렇게 쉽게 바뀔 국적인데 지금까지 굳게 지켜올 이유가 있었는가"라고 한탄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영화 초반 장미의 비유처럼 이름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변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되뇌게 된다.

3. 스텝

스텝. 작중에서 스기하라의 아버지는 전직 권투 선수였는데, 이것이 '걷는다'를 설명하는 좋은 키워드다. 링 위에서 벌어지는 권투 경기는 '걷다'와 '뛰다' 사이를 유지해야 한다. 평상시엔 천천히 걸으며 거리를 벌리다가, 유효타를 날리거나 막으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그게 바로 스텝이며 스탭을 밟는다는 건 제자리에 편안히 있지 못하고 경계를 곤두세워야만 한다는 뜻이다.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대략 짐작해볼 수 있다.

'걷다'의 속박감과 '뛰다'의 탈출욕은 서로 충돌한다. 스탭은 그 두 사이를 자유분방하게 오고 가도록 돕는다. 그러나 스기하라는 아버지와는 달리 권투 선수의 길을 걷지 않는다. 아버지로부터 권투를 배웠으나 친구들은 이겨도 아버지만큼은 끝내 이기지 못한다. 그건 마치 사회는 이길 수 있어도 피는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사회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지만 그렇다고 피가 변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스기하라에게 '아버지보다 나은 스텝'을 부여한다. 아버지의 스탭이 공격을 위한 것이었다면 스기하라의 스탭은 싸우지 않기 위함이다. 그건 '반드시 무언가를 내질러야 하는 강박'이 아니라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자유'로의 변화라는 점을 시사한다. 쉽게 말해 스기하라는 기성세대와 달리 선택권이 있다.

이 영화는 스기하라가 재일조선인으로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사실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고 말한다. 스기하라는 이름이 없었던 게 아니라 '불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걸 깨달아가는 일련의 과정이 이 영화가 성장 영화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영화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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