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번호 716' 이명박의 10분 법정 항변
"검찰도 속으로 무리한 기소 인정할 것"

[전문] 침묵했던 박근혜와 달리 A4용지 7장 준비... "사법 공정성 보여달라"

등록 2018.05.23 15:41수정 2018.05.23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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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석 앉은 이명박 110억원대 뇌물수수와 350억원대 다스 횡령 등 혐의로 구속기소 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해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피고인 이명박'이 가슴에 수인번호 716번 배지를 단 채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110억 원대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이명박 전 대통령은 1년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달리 피고인석에서 10분 동안 억울함을 토로했다.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정계선)는 이 전 대통령의 첫 공판기일을 진행했다. 수의 대신 남색 양복을 입고 나온 이 전 대통령은 피고인 대기실에서 나와 법정에 들어서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과거 친이계 정치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 전 대통령에게 인사했다. 이 전 대통령은 구속 전보다 약간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 건강에 이상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은 피고인석에 앉은 뒤 잠시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다.

재판부가 피고인의 인적사항을 확인하는 인정신문에 들어가자 이 전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업을 묻는 재판부의 질문에 "무직"이라고 답했다. 검찰이 다스 횡령 등 공소사실 요지를 진술하자 이 전 대통령은 굳은 표정을 보였다. 변호인단은 혐의를 부인했다.

뒤이어 이 전 대통령은 10분 동안 피고인이 공소사실 의견을 밝히는 '모두진술'을 했다. A4 용지 7장 분량이었다.

"남북 통일 전 화합하는 모습 보여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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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호 법정 들어온 이명박 110억원대 뇌물수수와 350억원대 다스 횡령 등 혐의로 구속기소 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417법정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그는 "공소사실을 보면 사실과 너무 (다르다), 검찰 자신도 아마 속으로 인정할 거다, 무리한 기소다"라며 준비해온 종이를 꺼내 읽었다.

이 전 대통령은 "제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다스"라며 다스 관련 혐의를 부인하고 나섰다. 그는 "1985년 제 형님과 회사를 만들어 현대차 부품에 참여했다. 저로서는 친척이 관계회사 차리는 게 비난 염려가 있어 말렸지만, 정세영 현대자동차 회장과 정주영 회장도 괜찮다 해서 했다"며 "그 후 30년간 어떤 다툼도 없었는데 국가가 개입하는 게 정당한가 의문이 든다"고 주장했다.


감정에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저 역시 전쟁의 아픔 속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났다. 학교에 가지 못해 거리에서 행상하던 시절, 어머니는 늘 저에게 '지금 어렵지만 참고 견디면 반드시 좋은 날 올 거다, 잘 되면 너처럼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울먹였다. 

또 "제 자신이 부정한 돈을 받지 않고, 실무선에서도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검찰 수사를 했어도 불법 자금은 없었다"며 "그런 저에게 사면을 대가로 삼성의 뇌물을 받았다는 공소사실이 충격이고 모욕"이라고 강조했다.

이 전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남북 화해를 언급하며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그는 "남북 간 진정한 화해·협력·통일의 시대를 열어가는 건 시대적 요구이자 소명"이라며 "우리 사회가 먼저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하는 것이 먼저 전제가 돼야 한다. 바라건대 이번 재판 결과로 사법의 공정성을 국제에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같은 날 같은 법정에서 유영하 변호사 옆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박 전 대통령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다스 횡령부터 삼성 소송비 대납까지, 16가지 혐의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은 현재 쉽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 삼성 다스 소송비 대납, 비자금 횡령 등 16개 혐의를 받고 있고, 여기에 적용되는 죄명만 뇌물수수, 국고손실 등 7가지다. 뇌물 혐의만 인정돼도 최소 징역 10년 이상에 무기징역(뇌물액 1억 이상)까지 선고할 수 있다.

검찰은 지난해 12월 다스 수사팀을 꾸린 뒤 본격적으로 MB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이 다스 본사와 영포빌딩 등을 압수수색하고, 'MB 금고지기'로 불리는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 등 측근들의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지난 1월 이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연 뒤 "정치공작이자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며 직접 반발에 나섰다.

그러나 다스 횡령으로 시작했던 의혹이 삼성 소송비 대납으로 커지면서 이 전 대통령의 입지는 좁아졌다. 지난 3월 14일 이 전 대통령은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됐고, 국정원 특수활동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은 같은 달 19일 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이 전 대통령은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 출석하지 않았다. 법원은 22일 밤 영장을 발부했고, 자택에서 대기하던 그는 양복 차림으로 나와 측근들에 악수를 건넨 뒤 서울 동부구치소에 수감됐다.

이후 검찰은 여러 차례 옥중조사를 시도했으나 이 전 대통령은 공정 수사를 기대하기 어렵다며 거부했다. 대신 미리 준비한 성명서를 통해 "다스의 주식을 단 한 주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가족 기업이기 때문에 경영상 조언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검찰 증거는 동의하지만 다 거짓말"... MB 전략은 통할까

보이콧으로 일관하던 이 전 대통령은 재판에 들어가면서 전략을 바꿨다. 이 전 대통령 측은 검찰이 제출한 모든 증거를 재판에 사용하는 데 동의하겠다고 밝혔다. 혐의를 전면 부인하는 피고인이 검찰 증거를 모두 동의하는 건 흔치 않은 경우다.

변호인단은 이 전 대통령의 '금도'라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대부분 증인이 같이 일을 해왔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을 법정에 불러 추궁하는 것은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금도가 아닌 것 같다, 객관적 물증과 법리로 싸워달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이 전 대통령 측이 참고인의 조서 등을 증거로 사용하는 데 동의하지 않을 경우 관계자들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야 한다. 부동의된 증거가 효력을 갖기 위해선 증인신문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이 전 대통령의 이해타산이라는 분석이 있다. 김진모 전 청와대 민정2비서관 등 측근들이 이미 등을 돌렸기 때문에 이들을 증인으로 법정에 부른다고 해도 여론의 관심이 집중될 뿐 아니라 재판부의 유죄 심증만 굳히는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또 국정원 댓글 사건 등 다른 혐의로 추가 기소되기 전에 신속하게 이번 재판을 끝내놔야 한다는 계산일 수 있다.

실제 이 전 대통령은 계속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상태다. 이 전 대통령 측은 증거 사용에 동의했을 뿐 내용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이날도 이 전 대통령은 "증인 대부분이 저와 함께 근무한 사람들이 많다. 어떤 이유로 (수사기관에서) 사실과 달리 말했는지 모르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며 "재판부가 검찰의 무리한 자료를 검토해줄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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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석 앉은 이명박 전 대통령 110억 원대 뇌물수수와 350억 원대 다스 자금 횡령 등 혐의로 구속기소 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첫 정식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 전 대통령 측은 재판 모습이 외부에 공개될 경우 국가적 위신이 떨어질 수 있다며 취재진 촬영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했지만, 재판부는 국민적 관심과 사안의 중요성, 공공의 이익, 박근혜 전 대통령 전례 등을 고려해 촬영을 허가했다. ⓒ 유성호


다음은 이날 이 전 대통령의 법정 발언 전문이다.

"사실과 공소사실 내용이 너무... 검찰 자신도 속으로 인정할 겁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겁니다. 무리한 기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제 적어온 게 있어서 읽겠습니다. 

저는 오늘 비통한 심정으로 이 자리 섰습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된 후로 조사와 진술 거부도 하고 재판을 거부하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억울하더라도 일국에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국민 앞에 맹세한 사람입니다. 대한민국은 삼권분립과 법치주의가 보장된 나라입니다. 그를 믿고 검찰 기소내용에 대해 재판부와 대한민국 국민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수사기록 검토한 변호인들은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되는 부분이 많으니 검찰이 제시한 증거를 부동의하고 증인을 (법정에) 출석시켜서 진실을 다퉈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증인 대부분이 세계 금융위기를 극복하고자 저와 함께 밤낮 없이 근무한 사람이 많습니다. 어떠한 이유로 사실과 다르게 말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피치 못할 사정 있었을 겁니다. 그들을 법정에 불러 추궁하는 게 가족이나 본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일이 될 수 있고 국정을 함께 이끈 사람들이 국민 앞에서 다투는 모습 보이는 건 저 자신에게 견디기 힘든 참담한 일입니다. 고심 끝에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변호인은 말렸지만 저의 억울함을 객관적 자료와 법리로 풀어달라고 했습니다. 재판부가 이러한 것과 무관하게 검찰 측 증거의 신빙성을 검토해줄 거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제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게 다스에 대한 것입니다. 1985년 제 형님과 저는 회사를 만들어 현대자동차 국내 부품화 산업에 참여했습니다. 저로서는 친척이 관계회사를 차리는 게 비난의 염려가 있어서 말렸지만 당시 정세영 현대자동차 회장이 부품 국산화 차원에서 자격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건데, 본인이 하는 것도 아니고 형님이 하는 거라 괜찮다며 정주영 회장도 양해했다고 해서 시작했습니다. 그후 30여 년간 회사 성장 과정에서 소유나 경영에 대한 다툼이 가족 안에 없었는데 국가가 개입하는 게 온당한지 의문입니다. 공소사실에 대해 변호인이 모든 사실 설명할 것이니 저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동시대 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저도 전쟁의 아픔 속에서 가난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일용노동자로 일하던 어린 시절 제 소원은 한 달 일하고 월급을 받는 일자리를 가지는 거였습니다. 중소기업에 들어가 전세계를 누비며 대한민국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학교에 가지 못해 거리에서 행상하던 시절 어머니는 늘 저에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참고 견디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거다, 이 다음에 잘 되면 너도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답했지만 수십 수백 번 반복해 들으면서 그 말이 제 마음속 깊숙이 박혔습니다. 

행상하면서 고생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던 날 나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서울시장 시절 월급 전부를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고(기침), 고등학교 학업 중단한 학생들을 위해 하이서울 장학금을 만든 것도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기침) 죄송합니다. 2007년 출마를 선언하면서 저는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해서 장학사업을 한다고 약속했고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일 새벽 무릎 꿇고 기도하던 어머니와의 약속을 실천하고자 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배움이 많진 않았지만 자식에게 바른 정신 물려주는 데 일생을 다했습니다. 어머님의 정신을 잊지 않고 늘 감사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기침) 

정치를 시작하면서 마음속에 품은 일이 있습니다. 권력이 기업에 돈을 요구하고 응하지 않으면 세무조사로 보복하는 이런 일이 다신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통령 당선 된 다음 전경련에 찾아가 대기업 회장들과 만나 정경유착이란 단어 없애자고 했습니다. 정부와 기업간 새로운 관계가 형성됐습니다. 기업은 국내 투자를 확대하고 일자리 만드는 데 전념하고 최선을 다해달라고 선언한 것도 이런 마음을 실천하려는 다짐이었습니다. 세계적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인들과 회의해도 개별 기업의 사안을 가지고 단독으로 만난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청와대 기록을 확인해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야당시절 서울시장으로 청계천 복원할 때 대기업 건설회사가 참여했고, 4대강사업에도 수많은 대기업이 참여했습니다. 퇴임 이후에도 감사원 감사를 받고 오랫동안 검찰 수사를 받았지만 불법 자금이 밝혀진 적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 자신이 부정한 돈을 받은 적도 없고, 실무선에서 그런 가능성도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제2롯데월드도 시끄러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청계재단을 설립할 때도 외부자금을 거절하고 순수하게 제 재산만으로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사면을 대가로 삼성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공소사실이 충격이고 모욕입니다. 평창올림픽 유치를 위해 세 번째 도전을 결정한 뒤 최우선으로 이건희 IOC 위원 사면을 강력히 요구받고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고 국익을 위해 삼성 회장이 아닌 IOC 위원 사면을 결정했습니다. IOC 벤쿠버 총회를 앞두고 2009년 10월 IOC에 통보하고 자격유지하게 됐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평창올림픽이 유치되고 지난 2월에 성공적으로 개최됐습니다. 

대한민국은 전후 짧은 기간 안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나라로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오랫동안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 간 끝없는 갈등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서로 인정하면서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화합의 시대를 열어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 앞에 언젠가 남북의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남북간 진정한 화해와 협력, 통일의 시대를 열어가는 건 시대적 요구이자 우리 모두의 소명입니다. 이런 소명을 성공적으로 이루려면 우리 사회가 먼저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바라건대 이번 재판의 절차와 결과가 대한민국 사법의 공정성을 국제사회에 보여주고, 공정한 재판을 하는 국가라는 평가를 낳기를 바란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위해 재임중 경험을 전수하거나 봉사와 헌신의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법정에 피고인으로 서 있으니 심히 안타깝고 참담합니다.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아는 구체적인 사실은 모두 변호인에게 말했고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 말하게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을 바랍니다."
#이명박 #다스 #모두진술 #검찰 #공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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