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군 가창로... 여긴 그냥 주택가가 아닙니다

독립지사 다섯 분의 혼이 숨쉬는 곳

등록 2018.05.25 15:54수정 2018.05.25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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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도일 지사의 생가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46번지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 번지는 멸실되고 없다. 그 대신 46-1번지는 도로명 주소 가창로220길 9-8로 현존한다. 지사의 생가터는 대략 사진의 아파트(가창로220길 9) 뒤쪽으로 추정된다. ⓒ 정만진

일본에서 이른바 '개척 농민'으로 현해탄을 건너온 미즈사키 린타로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지원을 받아 수성못을 확대한다. 이 공사는 1927년에 끝난다. 수세 징수를 목적으로 수성못 확대 공사를 벌인 미즈사키 린타로가 일을 거의 마무리해 갈 무렵, 수성들판에 농사지을 물을 대는 공급원 중 한 곳인 신천 상류의 달성군 가창면에서 소작 쟁의가 일어난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은 '양도일(楊道一)이 1925년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서 전개된 소작쟁의를 주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양도일은 1876년 6월 3일 달성군 가창면 용계동 63번지(현재의 가창면 사무소 뒤)에서 태어나 1942년 4월 21일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25년 무렵 소작인의 권리 옹호와 소작권 보호를 위해 가창농업공동회(嘉昌農業共同會)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1925년 2월 20일경 회원인 전봉학(全鳳學)이 여러 해에 걸쳐 경작해 온 정용기(鄭龍基) 소유의 논 다섯 마지기에 대한 소작 계약이 일방적으로 해지되고 관료인 김동준(金東濬)에게 넘어가는 등 피해자가 속출하였다. 6월 23일 전봉학은 양도일에게 찾아가서 대처 방안을 상의하였다.

소작쟁의를 이끈 양도일 지사

양도일은 회원 100여 명을 동원하여 정용기의 논에 모를 심었다. 이때 김동준도 인부들을 데리고 와서 이곳에 모를 심으려 했다. 양도일과 회원들은 김동준이 데리고 온 인부들을 폭행하여 논 밖으로 내쫓았다. 이에 김동준 등은 모를 뽑아내려고 했다. 양도일 등은 큰 소리로 그들을 윽박지르고 협박하여 쫓아버렸다.

이 일로 피체된 양도일은 1926년 3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업무방해·소요' 등의 죄목으로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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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만 지사의 생가는 가창면 행정리 91번지, 즉 (도로명 주소) 가창면 퇴계길 99-4로 알려진다. 사진의 버스 정류장 왼쪽에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으며, 마을은 버스정류장 뒤편에 있다. 그러나 생가는 멸실되고 없다. ⓒ 정만진

임시정부의 연락책으로 활동한 이경만 지사


이경만(李敬萬)은 1897년 2월 4일 달성군 가창면 행정동 91번지에서 출생하여 1983년 10월 12일 향년 88세에 별세했다. 지사는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 8월 상해임시정부 특파원 이현수(李賢壽)의 명을 받아 동지 정덕진(丁德鎭)과 함께 경북 일원에서 친일파 군수·면장 기타 관리들, 그리고 및 부호 유지들에게 경고문·물품 불구매 고지서·납세 거절 협박문 등을 발송하는 한편 이를 대구 부내(요즘의 시내) 길거리에 살포하여 반일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는 일에 힘썼다.

또 1921년 12월 외국인 선교사를 통하여 미국 워싱턴 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하는 한편, 특파원 이현수가 집필한 영문 <자유>지를 대구뿐만 아니라 평양·대전 등 전국 주요 각지의 외국인 선교사에게 비밀리에 배부했다. 그러던 중 1923년 1월 24일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차경석, 보천교


차경석은 동학혁명 당시 접주로 있다가 처형당한 차치구(車致久)의 장남으로, 그 자신도 일찍부터 동학에 가담했다. 차경석은 동학 계열의 증산교를 창교한 강일순(姜一淳)을 만나 열성적으로 활동했는데, 강일순의 사망 후 제자들이 선도교(仙道敎)라는 신종교를 세울 때에도 중심 역할을 했다.

이후 선도교는 1920년 간부만 55만7700명을 임명할 만큼 교세가 커졌다. 차경석은 1921년 교명을 보화교(普化敎, 뒤에 다시 보천교로 개칭)라 선포했다. 교세가 날로 확장되자 일제는 탄압과 회유를 벌였다. 마침내 차경석은 친일 경향을 보였고, 교도들 중 일부가 이탈하여 새 교단을 세웠다.

그 이후 결국 교세가 크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36년 차경석이 죽으면서 보천교는 총독부에 의해 사실상 해체되었다.

보천교 교도로서 독립운동을 한 서보인

서보인(徐輔仁)은 1895년 5월 6일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에서 태어나  1960년 3월 20일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지사는 1930년경 차경석(車京錫)이 교주로 있던 보천교(普天敎)에 가입했다. 1940년 2월 독립운동 성향의 보천교도들이 전북 정읍을 중심으로 조직한 비밀결사 신인동맹(神人同盟)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1940년 11월 9일경 신인동맹의 중심인물 정인표(鄭寅杓)로부터 신인동맹의 집행 사업과 나라가 독립되었을 때 사용할 인장 220개를 제작하라는 지시를 실행하여 이를 동맹원들에게 분배하였다. 그후 활동이 드러나 정인표 등 동지들과 함께 1940년 12월 15일 체포되었고, 1943년 10월 15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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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인 지사는 팔조령으로 가는 도로에서 우록리로 우회전하는 지점의 삼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30년대에 엄청난 교세를 보였던 보천교의 일원으로서 활약했다. ⓒ 정만진

파리장서운동을 펼친 서건수 지사

서건수(徐健洙)는 1874년 1월 17일 가창면 우록리 485번지에서 태어나 1953년 6월 15일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지사는 1919년 3월 김창숙(金昌淑) 등 유림(儒林)들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내용의 청원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때 함께 참여했다. 흔히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 불리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 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 137명이 참여한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 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 시해와 한국의 주권을 찬탈한 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에 대한 주장이었다. 유림은 김창숙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선임하여 우선 상해에 보냈으나, 직접 강화 회의장까지 가지 못한 채 미리 파리에 가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보냈다.

1919년 4월 12일 파리장서운동을 알게 된 일제는 참가자들을 검거했고, 서건수도 이때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다만 일제는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유림들이 한국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는 않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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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석의 생가터로 접근하는 산길은 폐쇄되어 있다. ⓒ 정만진

동맹 휴학을 주도한 조은석 지사

조은석(趙銀石)은 1906년 6월 20일 가창면 우록리 1047번지에서 출생하여 1956년 7월 3일 향년 51세에 별세했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경북고등학교 전신) 학생이었던 지사는 1927년 11월 10일 윤장혁·손익기·백대윤 등과 함께 남산동 백대윤의 집에 모였다. 그들은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여 독립 운동에 매진하려는 목적으로 비밀결사 '신우동맹'을 조직했다.

당수 장적우, 책임비서 윤장혁, 중앙집행위원 조은석·백대륜 외 4명으로 간부진을 구성한 장종환·정수광·문철수·권태호·김낙형·상무상·이월봉·정복흥·이봉재·박득룡·장원수·김봉구·장은석·한상훈·황보선·이기대 등 20여 맹원(조직원)들은 3개 그룹으로 나누어 학습에 매진했다. 이때 조은석이 제2그룹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들은 또 학교별로 선전위원을 두었는데 조은석은 교남학교의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혁우동맹, 적우동맹 등으로 명칭을 변경해가면서 활동하다가 1928년 2월 조직을 해산하였다. 그 후 1928년 9월 8일 다시 '우리동맹'을 결성했고, 조은석은 조사연구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차 동맹 휴교 실패(1926년 3월, '조선인은 야만인'이라고 발언한 일본인 교사의 사직을 요구하였지만 15명이 퇴학당하면서 실패로 끝남) 이후인 1928년 9월 26일 조은석 등은 동급 학생들과 함께 제2차 동맹 휴교를 계획했고,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민족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며 10월 15일 맹휴를 단행하였다. 이 일로 182명 무기정학, 18명 퇴학, 105명 검거되었고, 24명이 실형을 받았다. 주동자로 체포된 조은석도 1930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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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로 현해탄을 건너와 그 이후에는 조선군 장수로 활약한 김충선을 기려 세워진 녹동서원의 사당 녹동사 ⓒ 정만진


가창면 출신의 양도일, 이경만, 서건수, 서보인, 조은석 다섯 분 독립지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소작 쟁의, 파리 장서 운동, 보천교 활동, 임시정부 국내 연락책, 동맹 휴학... 다섯 분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이 아주 다양하게 펼쳐졌다는 사실을 증언해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뚜렷하게 남아 있는 유적이 없어 답사자들을 허전하고 안타깝게 했다.

가창면에는 일본과 관련되는 대단한 유적이 있다. 독립운동 유적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로 현해탄을 건너와 조선군 장수로 활약한 김충선의 묘소와 그를 기리는 녹동서원이다. 일본과 관련되는 역사유적을 답사하면서 이곳을 아니 가볼 수는 없다. 녹동서원은 서보인 지사의 생가마을 삼산리와 서건수 지사의 생가마을 우록리 중간 지점에 있다. 오가는 길에 꼭 둘러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유공자 공훈록' 참조
#조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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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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