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오빠를 죽인 원수가 남편... 근친혼이 불러온 비극

[나의 역사 문화유산 답사 7] 경주 흥덕왕릉, 일편단심 사랑에 담긴 사연

등록 2018.04.23 08:20수정 2018.04.26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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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 신라 제 42대 왕 흥덕왕의 무덤. 사자상 네 마리가 사방에서 무덤을 지키고 있다. ⓒ 홍윤호


흥덕왕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

흥덕왕은 통일신라 후기의 왕으로, 826년에 형 헌덕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후 836년에 사망한 신라 제42대 왕이다.  


<삼국유사>에는 흥덕왕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신하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었고, 홀로 남은 수컷이 슬프게 울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앵무새 앞에 거울을 걸어놓게 하였다. 그러자 앵무새는 거울에 비친 상이 자기 짝인 줄 알고 거울을 계속 쪼아댔다. 그러다 곧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는 슬프게 울다 죽었다. 이에 왕이 노래를 지었다 하는데,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10의 흥덕왕 조 앞부분에는 다음의 내용이 있다.

흥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중략) 겨울 12월, 왕비 장화부인이 죽자 정목왕후로 추봉하였다. 왕이 왕비를 잊지 못하고 슬퍼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다시 왕비를 들일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쌍쌍인 새도 자기 짝을 잃으면 슬퍼하는데,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고 어찌 다시 무정하게 부인을 얻겠는가?" 왕은 끝내 요청을 듣지 않았고, 시녀들조차 가까이하지 않았다.


위 두 사료에 있는 이야기를 종합하면, 흥덕왕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인을 잃었는데, 그녀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다시 왕비를 들이지 않고 여생을 살았다. 그리고 짝 잃은 암컷을 그리워하다 죽고 마는 수컷 앵무새를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향가를 만들기도 한 다정한 왕이다. 


보통 왕조국가에서 왕은 여러 명의 왕비를 둘 수 있었고, 정식 왕비는 한 명일지라도 수많은 궁녀를 거느릴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왕이 왕비 한 사람만을 끝까지 사랑하고, 사망한 후에도 그리워하는 사례를 찾기는 대단히 어렵다. 잠깐이라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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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 진입로의 소나무숲 아침 해 뜰 무렵이면 소나무숲 사이로 햇살이 들어와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 홍윤호


세계사를 들여다보면 유명한 인도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 정도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왕비 뭄타즈 마할을 사랑하여 19년의 결혼 생활 중 14명의 아이를 낳고, 전쟁터까지 데리고 다니다가 결국 전쟁터에서 아이를 낳다 사망에 이르게 했다.

임신 중인 아내를 정복 전쟁에 데리고 다녔으니, 사랑이 지나쳐 오히려 왕비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할까.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여 타지마할이라는 거대하고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남긴 사람이 샤 자한이다.

스케일 면에서는 비교가 안 되지만 흥덕왕도 일편단심 사랑이라면 뒤지지 않는다. 더구나 왕이 되자마자 사망한 왕비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고 죽을 때까지 시녀조차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은 다르지 않았겠다. 게다가 샤 자한이 왕비의 죽음 뒤에 수십 명에 이르는 궁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말은 없으니 흥덕왕이 한 수 위라고 할까. 

두 사람의 말년은 달랐다. 샤 자한은 너무 많은 자식들 때문에 아들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 최후의 승자인 셋째 아들이자 다음 왕인 아우랑제브에게 유폐 당해 불운한 말년을 보냈다.

그에 반해 흥덕왕은 당나라에 보낸 아들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인데다 왕비 사망 후에도 여성을 전혀 가까이하지 않아 사망시 바로 후계를 이을 왕자가 없었다. 결국 당장 왕위를 놓고 진골 귀족 내부의 권력 투쟁을 불러온다.

형을 죽였지만 형의 딸을 사랑한 왕

부인에 대한 흥덕왕의 사랑은 또 다른 측면이 있다.

흥덕왕의 왕비는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이다. 그런데 소성왕은 흥덕왕의 맏형이다. 소성왕이 39대 왕, 헌덕왕이 41대 왕, 흥덕왕이 42대 왕으로, 세 사람은 모두 형제이다. 따라서 흥덕왕은 형의 딸과 결혼한 것이니, 자기 조카와 혼인한 셈이다. 근친혼이다.

신라는 권력 독점과 재산 유지, 왕실의 신성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찍부터 지속적인 근친혼을 이어갔다. 삼국시대 신라에도 근친혼의 사례는 자주 발견되므로 그 전통은 꽤 뿌리가 깊다. 유명한 김유신만 해도 자기 여동생을 김춘추와 결혼시켜 왕비를 만들었지만, 60대에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딸과 다시 결혼한다. 여동생이 장모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근친혼은 고려 때까지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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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 둘레돌의 12지신상 신라 문화의 완숙기에 만들어진 12지신상 답게 조각 수법이 섬세하고 유려하다. 살아서 꿈틀거리며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도 든다. ⓒ 홍윤호


문제는 왕실 내부에서 권력 쟁탈전이 발생하는 경우다.

39대 왕 소성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애장왕이 40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런데 애장왕은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고, 소성왕의 동생이자 애장왕의 큰아버지인 김언승이 한동안 섭정을 하였다. 그러다 애장왕 10년(809) 김언승이 군사를 끌고 궁궐에 들어가 애장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된다. 이 사람이 헌덕왕이다. 

조선 시대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사례와 같은 경우다. 

헌덕왕의 친동생이었던 김수종은 헌덕왕 재위 중에 상대등이 되었고, 헌덕왕 재위 중에 이미 다음 왕위 계승자로 확정되어 궁궐(월지궁)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헌덕왕 사후 왕에 오르니, 이 김수종이 곧 흥덕왕이다.

그러니 헌덕왕이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될 때 김수종도 적극 협력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더구나 헌덕왕에게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가 동생에게 넘어간 것은 애초에 약속된 일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는 정변 이후 바로 왕이 된 헌덕왕은 이 정변의 주역임이 분명하다. 섭정을 했으니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애장왕에게 반대로 당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20대 나이가 된 애장왕과 물밑에서 암투를 벌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에 헌덕왕의 형제들은 헌덕왕에게 붙어 정변에 가담했다. 흥덕왕도 그 이후의 행보를 보아 적극적인 가담자였음이 거의 확실하다.

그렇다면 흥덕왕의 왕비 장화부인은 오빠인 애장왕이 정변으로 죽임을 당할 때 자기 남편이 여기에 가담해서 권력을 잡는 과정을 눈으로 봐야 했을 것이다. 즉, 남편과 남편 친형의 정변으로 친오빠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근친혼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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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 소나무숲의 부부소나무 서로 X자형으로 교차하여 올라가는 소나무 두 그루의 모습. 필자가 임의로 부부소나무라고 붙였다. ⓒ 홍윤호


흥덕왕의 비극과 신라의 비극

그녀는 이 사건 전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빠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수가 자기 남편과 남편 형제들이니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가능했을까. 흥덕왕은 오로지 아내를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끝까지 어떤 여성도 가까이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부인에 대한 흥덕왕의 감정은 사랑보다는 미안함과 안타까움 등 복잡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장화부인은 오빠가 죽은 이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아갔을 것이다. 남편이 정변의 주역 중 한 명이 아니었다면 살해당한 왕의 여동생이라는 위치상 죽음을 피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거꾸로 보면 흥덕왕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자기 아내를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하여간 흥덕왕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좀 더 복잡한 상황을 안고 있었고, 우리는 그들의 속마음까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그래도 그는 죽을 때까지 아내에 대한 의리를 지켰고, 죽을 때도 합장해 달라고 유언했으니 분명히 생전에 장화부인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사랑은 일편단심 순애보라기보다 근친혼이 가져온, 안타까운 비극적 사랑에 가깝다.

이런 사정 때문일까. 그는 사망시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지명했지만 의도적 누락일 수도 있다).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면 정치 투쟁에 희생당할 가능성이 크고, 이 때문에 또 누군가는 장화부인처럼 근친혼 결혼으로 인한 피해자가 될 것이라고 봤을 수 있다.

하지만 흥덕왕의 후계자 지명 여부와는 상관 없이 그의 사후 신라는 최악의 권력 쟁탈전을 겪게 된다.

원성왕계로 분류되는 친족들 사이에 궁궐 내외에서 난투극에 가까운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고, 지방 세력(대표적인 인물이 장보고)까지 끌어들여 서로가 죽고 죽이는 복수극이 이어졌다. 죽느냐 사느냐 둘 중 하나의 선택밖에 없었던, 우리 역사에 보기 드문 정글 같은 권력 투쟁이었다.

이로 인해 원성왕계의 진골 귀족들은 상당수가 비명에 가거나 자살했다. 헌덕왕과 흥덕왕이 뿌려놓은 씨앗, '나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욕망은 최소한의 자제력을 넘어 혈연의 둑을 터뜨렸고, 그 거센 물줄기는 수많은 귀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귀족들은 기진맥진했고,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하며 아마 반성도 했을 것이다.

그럴듯한 명분도 없이 벌어진 이 노골적인 친족 간의 대결에서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 장화부인 같은 상처를 안고 비극적인 삶을 산 여성이 얼마든지 더 있지 않았을까.

그나마 그녀는 운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성공한 정변의 주역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았으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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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 소나무숲 흥덕왕릉 입구의 소나무숲은 분위기가 있고 매력적이며 조용하다. 경주 일대의 대표적인 소나무숲으로 꼽을 만하다. ⓒ 홍윤호


명품 소나무 숲 속 명품 왕릉 

흥덕왕릉은 경주의 중심부와 좀 멀리 떨어진 안강읍에 있다. 시내 중심부에서 차로 약 30분 거리이다. 도로에 흥덕왕릉 안내판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 법한 평범한 시골 마을의 산기슭에 자리했다.

흥덕왕릉 들어가는 입구에는 넓고 그윽한 소나무숲이 있다. 처음 찾아가는 이들에게는 뜻밖의 아늑하고 조용한 숲이다. 문화유산 답사에 앞서 그저 소나무숲 산책만을 목적으로 해도 좋을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경주 일대에서 가장 훌륭한 소나무 숲 중 하나라고 본다. 아침 해 뜰 무렵에는 이 소나무숲을 촬영하기 위해 찾아드는 사진가들이 제법 있다.

새벽에 몰려오는 안개가 소나무들을 허공에 띄울 때도 좋고, 아침 햇살이 나무들 사이사이로 화살처럼 들어와 잠자는 숲을 깨울 때도 좋고, 오후 햇살이 나무들에 선 굵은 그림자를 드리울 때도 모두 좋다. 한마디로 명품 소나무숲이다.

숲 속 중간쯤 X자형으로 교차하는 인상적인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그 아름다운 어울림 때문에 그냥 개인적으로 부부 소나무라고 이름 붙였다. 흥덕왕과 장화부인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울창한 소나무숲을 얼마간 헤치고 나면 마치 사람의 주변머리 사이에 드러난 대머리처럼 숲 중간에 훤하게 드러난 잔디밭 위로 한 기의 무덤이 우뚝 솟아 있다. 흥덕왕릉이다.

경주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이 무덤이 흥덕왕릉인 이유는 '흥덕(興德)'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편의 발견 때문이다. 경주 일대에 남아 있는 무덤들 중 드물게 주인공이 거의 확실한 무덤이다. 
                        
왕릉의 형식이나 형태, 구조 등을 보면 이 또한 명품이다. 한 시대 문화의 전성기를 누린 신라의 문화적 역량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흔히 통일신라의 왕릉들 중 가장 우수한 왕릉으로 원성왕릉(괘릉)을 꼽는데, 이 흥덕왕릉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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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 사자상 왕릉의 사방에서 각자 다른 자세와 표정으로 무덤을 지키고 있는데, 무섭기보다는 귀여운 모습이다. ⓒ 홍윤호


무덤 둘레돌 십이지신상의 조각들은 옆에서 보면 언제든 툭 튀어나와 살아서 움직일 듯한 생동감이 있다.

왕릉의 사면을 지키는 네 마리의 사자상은 서로 다른 표정과 자세로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지만 다들 머리가 커서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운 느낌을 준다. 사람이고 동물이고 몸에 비해 머리가 크면 귀엽다. 그래서 갓난아기나 어린아이들이 귀엽지 않은가. 이 사자상들은 머리 한번 쓰다듬으면 더 머리를 들이밀며 귀여운 척을 할 것 같다.

혹시 이 사자상들을 뒤에서 본 적은 있는가. 뒤에서 보면 어린 강아지 같은 느낌을 줄 정도다.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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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을 지키는 문인상, 무인상 각각 한 쌍씩 마주보고 있다. 세련된 조각 수법이 인상적이다. ⓒ 홍윤호


흥덕왕릉만 홀로 떨어진 이유

무엇보다 무덤 앞을 지키는 석상들이 명품이다. 문인상과 무인상은 각각 서로 마주 보며 한쌍씩 서 있는데, 모두 원성왕릉의 그것들처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어 쌍둥이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무인상은 원성왕릉의 무인상처럼 서역인(이슬람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눈과 코가 크고, 얼굴 윤곽이 뚜렷하며, 표정이 우락부락하고 팔을 걷어붙인, 영락없는 장사의 모습이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원성왕릉의 무인상보다는 수법이 좀 떨어지지만, 각자의 표정과 개성은 살아 있다.

이 무덤과 거리가 좀 떨어진 숲속 한 자락에는 귀부가 있다. 신라 때는 흥덕왕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 올려져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덩그러니 귀부만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 제자리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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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 귀부 소나무숲 한 구석에 있어 놓치기 쉽다. 귀부 위에는 흥덕왕의 일생과 업적을 새긴 비석을 올려놓았을 것이다. ⓒ 홍윤호


흥덕왕릉은 한 사람의 무덤처럼 하나의 봉분으로 되어 있지만, 이 안에는 두 사람이 잠들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흥덕왕 사후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후의 능에 합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본래는 먼저 세상을 뜬 장화왕후의 무덤이었던 셈이다. 주변에 다른 왕릉이 없고 홀로 뚝 떨어져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애장왕을 죽인 정변 이후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을지도 모르는 흥덕왕과 장화부인은 죽어서 다시 가까워졌다. 영원히 같이 눕게 됐으니 살아서의 복잡한 상황과 감정은 그저 찰나의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근친혼이라는 전통, 그리고 권력 투쟁과 정치적 이유로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았을 장화부인,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늘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았을 흥덕왕은 영혼이 되어서야 비로소 안식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후에 평안을 얻은 그와는 달리 신라는 이후 극도의 권력 쟁탈전 속에 서서히 쇠퇴하고 만다. 헌덕왕과 흥덕왕 양대에 걸쳐 정치 개혁과 왕권 강화를 추진하고, 흔들리고 있던 골품제를 세세하게 규정하여 신분제를 정비하고자 했지만, 이후 100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천년 왕국 신라의 몰락을 막지는 못했다. 

[답사 정보]

* 기왕이면 아침에 일찍 찾아가는 것이 좋다. 일교차가 심한 봄, 가을에 아침 안개가 가끔 피어나는데, 안개 낀 풍경도 일품이지만, 안개가 걷히는 아침 풍경도 좋다. 흥덕왕릉 입구에 10~15대 정도 차를 댈 수 있는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면 바로 소나무숲에 들어갈 수 있다.

* 차를 갖고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 경주IC → 경주 → 7번 국도 포항 방향 → 안강으로 간 다음 안강에서 68번 지방도를 따라 신광 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쪽으로 흥덕왕릉 들어가는 입구 안내판이 나온다. 좌회전하여 약 2.3km 들어간다.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흥덕왕릉에 곧장 간다면 대구~포항간 고속도로를 이용, 서포항IC에서 나간 다음, 안강 방향 68번 지방도로를 이용해 안강으로 향하다 우측으로 흥덕왕릉 안내판을 보고 들어가면 빠르다. 내비게이션에서는 '흥덕왕릉'을 치면 안내해 준다.

* 대중교통으로는 경주 시내 경주역과 경주고속버스터미널 앞 등에서 200번(하루 10회 운행) 좌석버스를 타고 가다 흥덕왕릉 입구 앞에서 하차, 안내판을 보고 약 2.3km 걸어 들어간다. 201번 버스가 흥덕왕릉 바로 앞을 지나가지만 하루에 한 대밖에 없다(경주시외버스터미널 앞 오전 6시 50분 출발). 경주에서 안강까지 가는 버스는 많으므로, 안강까지 버스 타고 간 다음 안강에서 흥덕왕릉까지 택시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 흥덕왕릉 인근에 조선 시대 성리학자 이언적의 흔적이 남은 옥산서원과 독락당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이 있다. 모두 들러 가면 좋다. 양동마을 → 흥덕왕릉 → 옥산서원, 독락당의 순서로 다니면 동선이 잘 이어질 것이다.
#흥덕왕릉 #장화부인 #애장왕 #헌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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