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만세' 부르면 살려 주겠다던 국군, 하지만...

[박만순의 기억전쟁] 오창 양곡 창고 보도연맹사건

등록 2018.03.07 15:49수정 2018.03.07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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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당시 오창 양곡창고 모습 ⓒ 진실화해위원회


충북 진천 잣고개 전투에서 패한 수도사단 군인들은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오창면 장대리에 입성하였다. 군인들은 낙오병처럼 어깨가 축 처져 남쪽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와 고달픈 행군으로 인해 군인들의 허리는 휘어지고 어깨는 굽어 있었다. 하지만 눈매만은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장대리에 들어서자 큰 창고가 보였다. 창고에는 몇 명의 민간인이 보초를 서고 있고, 안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군 장교는 창고에서 보초서는 사람에게 "창고 안에 누가 있소"하고 물었다. "보도연맹원들입니다"라는 의용소방대원의 말에 군인들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았다. 군 장교는 보초들에게 "열쇠 주시오"라고 명령했지만 열쇠창고는 의용소방대장 김팽열이 갖고 어디론가 가버린 상태였다. 화가 난 장교는 총 개머리판으로 자물통을 내리쳤다. 오래된 자물통은 쉽게 부서졌다. 장교 뒤를 따라 군인 10여 명이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악취가 확 풍겨 나왔다. 동시에 800개의 눈동자가 일시에 군인들을 향했다. "기관총 설치해"라는 장교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군인들은 양곡 창고 안에 있던 볏가마 위에 2대의 기관총을 설치했다. 즉 입구에서 보면 좌·우에 기관총을 설치한 것이다.

"쏴"하는 소리와 함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나머지 군인들의 소총에서도 탄환이 발사되었다. 사방에서 '악', '아이고', '하느님 맙소사' 소리가 튀어나왔다. 군인들은 수백 명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관총과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으며, 이어서 수류탄까지 던졌다. 마치 적군과의 교전을 보는 듯했다. 약 1시간의 총성이 이어지다가 장교의 한쪽 손이 올라가면서 총소리는 멈췄다.

"일어나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사람은 살려 주겠다"라는 장교의 고함에, 총에 맞지 않은 사람과 경상자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일어선 이들은 백지장 같은 얼굴을 하고 두 손을 번쩍 들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통일되지 않은 목소리는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절규이자 짐승들의 울부짖음 같았다. 장교의 얼굴에 냉소적인 미소가 언뜻 스쳐 가더니 한쪽 손이 다시 올려졌다. 동시에 기관총과 소총이 다시 불을 뿜었다. 10~20분간의 총질로 수십 명이 바닥에 피를 흘린 채 쓰러졌다. 장교는 똑같은 소리를 다시 했다. 순박하기만 했던 보도연맹원들은 '혹시나'하고 다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역시나' 였다. 이어서 군인들의 확인사살이 이루어졌다. 어떤 군인은 총구로 머리와 배를 툭툭 치면서 움직이는 이가 있으면 발포를 했다. 다른 군인은 총구에 대검을 꽂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쑤셨다. 1950년 7월 10일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충북 청원군 오창양곡창고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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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창고 위치 ⓒ 진실화해위원회


"똥통에 들어가 숨었어요"


살인귀(殺人鬼)들의 아수라장에서 간신히 살아난 임만호(1915년생)는 잠시 기절했다가 눈을 떴다. 팔다리를 움직이자 다행히 총상을 입지는 않았다. 총소리와 동시에 쓰러졌는데 임만호 위로 두 명이 쓰러졌기 때문이다. 즉 시체 두 구가 인간방패가 된 것이다. 엉금엉금 기어 나와 면사무소 앞까지 갔는데 민가 여러 곳에서 총소리가 났다.

군인들이 2시간 동안 총질을 한 후에 전부 철수한 것이 아니라 일부가 남아, 민가를 다니며 생존자를 추적해 사살했던 것이다. 총소리에 놀란 임만호는 후다닥 면사무소 창고 옆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의 머릿속은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똥통으로 뛰어들었다. 당시의 재래식 화장실은 커다란 항아리를 땅속에 파묻고 항아리 입구에 송판 2개를 올려 놓은 상태였다. 송판만 치우면 똥통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똥이 가득 들어있던 항아리에 들어간 그는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똥 속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똥통에서 머리를 쳐들은 임만호는 연거푸 숨을 내쉬었다. 내장이 튀어 나올 것 같았지만 며칠간 먹은 게 없다보니 헛구역질만 나왔다.

임만호처럼 창고에서 살아난 이는 92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7월 11일 새벽에 죽음의 아수라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어떤 이는 너무 목이 말라 고무신에 논의 물을 받아먹는다는 것이 먹고 보니 핏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핏물이 생수 같았다.

오창면 화산리 장씨는 창고에서 기어 나와 유리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데 불과 70~80m 전방에 군인들이 있지 않은가. 기겁한 그는 제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꼼짝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군인들이 서 있는 위치에서는 장씨가 보이지 않았다. 이른바 사각지대가 형성된 것이다.

더군다나 군인들은 장씨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군인들의 눈매는 장씨 주변의 수문(水門)에 피신해 있던 100여 명의 주민들에게 꽂혀 있었다. 당시 수문에 숨어 있던 박희성(84세. 청주시 오창면 일신리)은 "미군의 폭격에 놀란 주민들이 수문에 피해 있었다"고 한다. 잠시 후 군인들이 철수하자마자 장씨는 급하게 집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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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 입구 7월 11일 미군의 오창면소재지 폭격으로 주민들이 피신한 수문 입구 ⓒ 박만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군폭격이 이어져

오창면 장대리 주민들이 일신리와 유리 경계에 있던 수문(水門)으로 피신하게 된 이유는 미군이 오창 일대에 1950년 7월 11일 오전에 폭격을 했기 때문이다. 이날 오전 8시 30분부터 8대의 비행기가 오창 전역에 폭격을 가했다. 일반 주거지에서는 주민들의 피해가 없었는데, 문제는 양곡창고에서 발생했다. 당일 새벽에 있었던 국군의 총격으로 부상을 당해 창고에서 탈출을 하지 못한 수 십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참극을 당한 것이다. 미군의 폭격으로 부상당한 이들 대부분은 숨졌다. 미군 폭격이 끝난 후 가족들이 창고에 갔을 때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제가 오창창고에 가 보니 시신조각들이 창고 기둥이나 주변나무에 걸려 있는 등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유족 김상근의 증언

"당시 찾아오는 시신들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고 일부는 팔다리도 없는 시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신의 일부가 창고골격에 있었고 지붕은 날아갔습니다."  신청인 박임순 증언

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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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창고 사건 피해자지도 ⓒ 박만순


미군이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기 위해서 양곡 창고에 폭격을 한 것은 아닌 듯하다. 제37보병사단이 펴낸 <충북지역전사>에 의하면 1950년 7월 11일 08:30분부터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해 오창 일대에 폭격을 했다고 한다. 미군의 폭격은 작전지역에 있는 큰 건물에 집중되었는데, 양곡 창고는 6.25 당시 청원군·진천군 일대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이날의 폭격으로 북한군이 격퇴된 것이 아니라 오창창고에 있던 보도연맹 부상자들만 죽었다.

7월 10일 1차로 보도연맹 간부급 10명이 학살되었고, 11일에는 수도사단과 6사단 19연대 헌병대에 의해 2차로 학살되었다. 이어 미군 폭격이 이어지며 3차 피해가 생긴 것이다. 7월 10일~11일의 국군과 미군에 의해 오창·진천지역 보도연맹원 280명 이상이 숨졌다. 천만다행으로 살아난 사람은 92명인데, 2018년 현재 살아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다.

의붓아버지는 노름만 하고... 강순임씨가 겪은 질곡의 삶

오창지역 보도연맹원은 1950년 7월 4일부터 예비검속되어 오창 창고에 구금되었다. 창고는 폭 30m에 길이가 50m이고 높이는 5~7m였다. 즉 창고는 1500㎡(약 450평) 였다. 양쪽 주변에 볏가마가 쌓여 있었지만 창고 가운데를 중심으로 보도연맹원 약 400명이 구금될 수 있는 곳이었다. 진천지역 일부 보도연맹원들은 사석지서 옆 방앗간에 구금되었다가 7월 9일 오창 양곡창고로 이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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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강순임 강순임의 증언모습 ⓒ 박만순


8세의 나이에 아버지 강민희(6·25 당시 28세)를 잃은 강순임(76·청주시 원평동)씨는 말 그대로 질곡의 삶을 살아왔다. 아버지가 양곡 창고에서 군인들에게 학살당했지만, 시신들이 뒤엉키고 부패해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가장인 아버지의 죽음으로 초등학교 1학년생이던 그녀는 학교 문턱을 밟자마자 공부를 작파할 수밖에 없었다.

살기 위해 어머니는 개가를 했는데, 새 아버지는 한량이었다. 매일 노름만 하고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새 아버지가 한량이다 보니 할아버지 집에서는 땅 닷 마지기를 양자로 들인 강순임의 남동생에게 주었다. 결국에는 살던 집에서도 쫓겨난 강순임 모녀는 옆 마을에 곁방살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곁방살이 생활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이런 집안환경으로 인해 강순임은 어려서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를 했다. 동생 강해원씨는 10세 때부터 머슴살이를 했다. 동생은 고모 집에서 머슴을 살았는데 1년에 쌀 다섯 짝을 받고 일했다. 온 식구가 거지 아닌 거지생활을 한 것이다.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죽은 자뿐만 아니라 산 자의 삶도 파괴했다. 오창 양곡 창고사건은 강순임의 경우처럼 280명 이상의 가족공동체를 붕괴시켰다. 생존자 92명의 삶 또한 다르지 않았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2007년에 진실규명 받은 유족 중 민사소송에 참여한 이들은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재판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과 미신고자는 그렇지 못하다. 92명의 생존자에게는 국가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들의 삶을 누가 기억할까?
#오창 양곡창고 #대한민국 만세 #똥통 #미군 폭격 #보도연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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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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