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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현 검사의 충격적인 고발글, 손석희의 인상적인 위로

[하성태의 사이드뷰] '미투' 운동을 넘어 '미 퍼스트' 운동의 확산을 기대하며

18.01.31 12:50최종업데이트18.02.0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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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방송된 <뉴스룸> 앵커브리핑. ⓒ jtbc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영화 <굿 윌 헌팅> 속 심리학 교수 숀이 어린 시절 양아버지의 폭력에 고통을 당했던 천재 청년 윌을 다독이는 언어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런 부연도 하지 않은 채, 수차례 지속해서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며 다가오는 이 교수에게 윌은 결국 욕을 내뱉다 울음을 터트리기에 이른다. 그런 윌을 숀은 따뜻하게 안아준다. 

지금은 고인이 된 명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중저음으로 발성된 이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라는 대사는 영화 개봉 이후 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힐링'을 안겨주는 명대사로 회자된다. 타인이 준 고통으로 인해 자책하고 또 죄책감까지 떠안은 이들에게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다독임은 그 심리적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 다가올 수 있음을 이미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굉장히 내가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했구나'라는 자책감에 괴로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나와서 범죄 피해자분들께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분들께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제가 그것을 깨닫는 데 8년이 걸렸습니다."

지난 29일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와 마주 앉은 서지현 검사도 피해자의 한 명으로서 한국사회의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건네주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본인의 내부 고발 글에 따르면, 서지현이 세상에 나와 그 얘기를 해주는데 무려 8년이 걸린 셈이다.

그 시간 동안 서 검사는 아이를 유산해야 했고, 검찰 조직 내에서 오히려 수치심을 맛봐야 했으며, 더군다나 좌천성 인사를 겪으며 일상이 파괴되는 물리적·심리적 고통을 오롯이 감내해야 했다고 한다. 서 검사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서 검사가 용기를 낸 폭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려는 듯, 또 그간의 고통을 위로하려는 듯, 30일 방송된 <뉴스룸> 앵커브리핑은 위의 <굿 윌 헌팅> 속 명대사를 인용했다. 뒤이어 "술을 마셔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일 있었다면 사과드린다"는 가해 당사자 안태근 전 검사나 "보고 받은 적도, 덮으라 말한 적도 없다"는 최교일 당시 검찰국장의 가해자의 논리로 점철된 해명을 적시하며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검사 서지현 역시 8년이란 시간을 불가항력으로 자신을 지배했던 가해자의 논리와 싸워야 했지만 결국,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검사 서지현 한 사람이 겪어낸 부조리가 아니라 세상의 곳곳에서…지극히 평범하고 힘없는 또 다른 서지현들이 겪었고, 당했고, 참으라 강요당하고 있는 부조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 시간 마음을 다쳐온 그는 자신 스스로를 향해 그리고 똑같은 괴로움으로 고통 당했을 또 다른 서지현들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단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30일 방송된 <뉴스룸>의 한 장면. ⓒ jtbc



"회식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밤이면 여자에게 '너는 안 외롭냐? 나는 외롭다. 나 요즘 자꾸 네가 이뻐 보여 큰일이다'라던 E선배(유부남이었다)나, '누나 저 너무 외로워요, 오늘은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저 한번 안아줘야 차에서 내릴 거예요'라고 행패를 부리던 F후배(유부남이었다)나,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다가 '에고 우리 후배 한번 안아보자'며 와락 껴안아대던 G선배(유부남이었다)나,

노래방에서 나직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도대체 너는 왜 우리 회사에 왔냐'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더니, 술도 못 마시는 게 분위기도 못 맞춘다는 말을 피 해보려 (그 나직한 눈빛도 피해야 했고) 열심히 두드린 탬버린 흔적에 아픈 손바닥을 문지르고 있던 여자에게 '네 덕분에 도우미 비용 아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부장이나,

'잊지 못할 밤을 만들어줄 테니 나랑 자자' 따위의 미친 말을 지껄여대더니 다음날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던 H선배(유부남이었다) 따위가 이따금 있기는 했지만…. 그럴 때마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랫입술을 꾸욱 꾸욱 깨무는 것뿐이었다."

서지현 검사가 법원 검찰 내부통신망(이프로스)에 올린 내부 고발 글 중 일부다. 유부남을 포함한 서 검사의 선후배 검사들이 일상적으로 성희롱과 성폭력을 자행했다는 고발은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을 만했다. 그 만큼, 성폭력이 만연해 있었다는 반증이라 할 만하다. 더군다나, '검찰' 아닌가.

이와 관련, 그간 검찰 내 성폭력 사건의 징계가 얼마나 미약하고 허술했는지도 후속 보도를 통해 낱낱이 드러나는 중이다. 이에 따라 검찰의 '제 식구 감싸주기'가 '남성' 위주였다는 것도 만천하에 까발려지고 있다. 검찰이 "쑥대밭이 됐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검찰의 도덕성이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맞아 보인다.

"여검사가 저 정도라면 여느 여성은 대체 어떻다는 말인가, 라는 개탄엔 묘한 구석이 있다. 정말 몰랐다는 걸까. 한국은 성폭력이 차고 넘치는 사회다. 어느 수준으로든 성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이나 목격하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우리는 단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이자 칼럼니스트인 김규항의 평가는 되새길 만하다. 이미 너무 만연해 있거나, 일상 속에 스며든 내밀한 폭력적 시선과 선정적 시선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최근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서울 거주 여성 2000명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한 결과 10명 중 9명이 데이트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무려 1770명이 신체적 피해와 성폭력을 포함 남성으로부터 다양한 데이트폭력의 피해를 입은 것이다.

충격적인 결과라 인용해 봤지만, 각종 성폭력이 만연한 곳으로 '직장'이 꼽혀왔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 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번 서 검사의 폭로를 통해 '검찰' 역시 '한국사회'의 직장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팩트'가 확인됐을 뿐이고.

무엇보다 "그건 니 잘못이 아니야"라는 다독임이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움직임으로 확산되어야  함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그와 더불어 이제는 명백히 드러난 가해자들에게 "그건 니 잘못이야"라고 각인시키는 동시에 그러한 행위가 처벌은 물론이요, 사회적인 지탄과 감당하지 못할 불이익이 따른다는 사실을 인지시켜 줄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미스 함무라비>의 저자 문유석 판사가 제기한 '미 퍼스트'('me first')운동은 한층 진일보한, 우리 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당사자 운동이라 할 만하다. 

'미투'를 넘어 '미 퍼스트' 운동의 확산을 기대하며

"하지만 명심할 것이 있다.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당연히 공감해야 하지만, 거기 그쳐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가해자들은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하다. 그들은 아무리 만취해도 자기 상급자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이들은 절대 반성하지 않는다(중략). 

me too 운동에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치지 말고, 내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절대로 방관하지 않고 나부터 먼저 나서서 막겠다는 me first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 검사님이 당한 일이 충격적인 것은 일국의 법무부 장관 옆에서, 다수의 검사가 뻔히 두 눈 뜨고 지켜보는 장례식장에서 버젓이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다. 눈 앞에서 범죄가 벌어지는데 그깟 출세가 뭐라고 그걸 보고도 애써 모른 체 한 자들도 공범이다. 한 명, 단 한 명이라도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하며 제지한다면 이런 일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단 한 마디다. 

나부터 그 한 사람이 되겠다. 그동안도 그러려고 노력했지만, 앞으로는 더 노골적으로, 가혹하게, 선동적으로 가해자들을 제지하고, 비난하고, 왕따 시키겠다. 그래서 21세기 대한민국이 침팬지 무리보다 조금은 낫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30일 문유석 판사가 본인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 중에서)

당사자 중심/여성 중심의 '미투' 운동을 넘어 적극적인 연대와 자성의 목소리를 촉구하는 '미 퍼스트' 운동은 그 자체로 유의미하다. 특히나 대개의 성폭력이 위계와 권력 관계에 의해 촉발된다는 점에서, 이 운동의 당사자들은 남성, 그중에서도 권력과 위계의 우위에 있는 남성들의 동참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세상의 "서지현"들, 그 서 검사가 인용한 <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저 세상의 김지영'들은 이미 목소리를 내왔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서 검사의 폭로와 인터뷰로 한국판 '미투' 운동이 불붙은 것이라기보다 이미 2년여 전부터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문단_내_성폭력', '영화계_내_성폭력' 등 각 분야에 만연한 남성들의 각종 성폭력 사례들을 익명으로 고발한 폭로 운동이 봇물 터지듯 잇따랐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서 검사의 8년처럼, 이미 곪을 대로 곪았던 한국사회의 성폭력 문화를 고발하는 익명의 목소리들이 있었기에, 그러한 목소리들이 보도되고 수면 위로 올라왔기에 참을 대로 참아왔던 피해 당사자들이 주저했던 목소리 내기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번 서지현 검사의 폭로와 인터뷰는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정점을 찍는 용기 있는,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 용기가 무위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투' 운동이 정치권을 넘어 사회 전반에 확산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와 더불어 '미 퍼스트' 운동 역시 공감대가 형성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다독임이 오래도록, 유의미하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판 '미투' 운동 시즌2는 이제 시작이다. 

서지현 검사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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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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