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식 군가를 광주 사람이 만들었다고?

중국 3대 혁명음악가인 독립투사 정율성... 광주광역시 남구가 고향

등록 2018.02.02 15:31수정 2018.02.0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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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혁명음악가로 활동한 정율성의 흉상. 그가 태어난 광주광역시 남구의 양림동 휴먼시아아파트 옆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전진, 전진, 전진!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고, 조국의 토지를 밟으며 민족의 희망을 짊어지고 있는, 우리는 하나의 무적의 역량. 우리는 농민과 노동자의 자제, 우리는 인민의 무장, 두려움 없이, 굴복은 없다….'

샹치엔(向前), 샹치엔(向前), 샹치엔(向前)으로 시작되는 노래에서 일순 긴장감이 묻어난다. 그 치열함에 심장의 피가 끓는다.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현실을 박차고 어디론가 나아가야 할 것 같다.


<팔로군 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이다. 간결한 언어의 울림이지만 장엄하고 호방한 선율이 흐르고 있다. 이 노래는 중국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일본에 맞선 당시 인민해방군들에게 즉시 달려 나가 싸우도록 만든 진군의 나팔소리였다.

중국의 3대 혁명 음악가로 불리는 정율성(1914∼1976)이 25살 때 작곡한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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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흉상. 그가 초등학교 1∼2학년 시절을 보낸 전남 화순의 능주초등학교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팔로군 행진곡>은 중국 역사의 큰 줄기와 함께 했다. 홍군이 국민당군을 물리치고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할 때 불렸다. 1988년 덩샤오핑(鄧小平) 중국 전 국가주석 때 중앙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반포되고, 인민해방군의 공식 의전곡으로 지정됐다.

이후 중국 군대의 모든 행사와 각종 집체의식은 물론, 중국인들의 일상 생활에서도 널리 유행하고 있다. 1990년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을 알리는 곡으로 쓰였다. 중국 건국 60주년 기념식 때 천안문 광장에서도 울려 퍼졌다.

2015년 9월 3일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7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불려졌다. 중국의 건재함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13억 중국인들에게 긍지와 자신감을 불어넣는 중국 역사상 가장 거창한 열병식에서였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군악대와 합창단 2400명이 연주하고 노래한 이 음악에 맞춰서 군대를 사열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인민해방군 군가'는 국가(國歌) 다음으로 높은 위상을 갖는 노래다. 정율성이 중국에서 '군혼(軍魂)'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중국의 공식 군가를 만든 음악가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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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해방군 군가’와 '연안송'을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는 정율성 거리전시관. 광주시 남구 양림휴먼시아의 담장에 만들어져 있다. ⓒ 이돈삼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일상적으로 들어볼 수 있는 곳이 남도땅 광주에 있다. 양림동에 있는 정율성 거리 전시관이다. 거리 전시관은 양림휴먼시아의 담장 233m에 걸쳐 만들어져 있다. 정율성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이력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그가 사랑한 바이올린도 조각 작품으로 내걸려 있다.

여기에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악보가 그려져 있다. 악보 옆에 설치된 작은 버튼을 누르면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소리는 크지 않지만, 울림이 매우 강하다.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가인 정율성의 거리 전시관이 여기에 들어선 것은 정율성과 양림동과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정율성은 1914년 광주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광주광역시 남구 정율성로 16-7'이 그의 생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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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거리 전시관 풍경. 정율성이 태어난 광주광역시 남구의 양림휴먼시아의 담장 233m에 걸쳐 만들어져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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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거리 전시관 풍경. 그의 이력이 새겨져 있고, 그가 사랑한 바이올린도 조각 작품으로 내걸려 있다. ⓒ 이돈삼


정율성은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음악으로 일본에 맞선 혁명전사가 됐다. 1938년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있던 옌안(延安)에서 <연안송>을 지었다. 연안송은 중국 100대 국민가요로 꼽힌다. 이듬해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했다.

중국정부는 정율성을 중국의 항일전쟁과 혁명에 복무한 국제주의 전사로, 혁명음악가로 칭송하고 있다. 지난 2009년 건국 60주년 때엔 그를 '신중국 창건 100대 영웅'으로 선정했다.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국가 기념시설인 정율성 기념관도 건립했다.

정율성은 중국과 북한에서 많은 가곡과 동요, 영화음악과 오페라음악을 남겼다. 모두 360여 곡에 이른다. <팔로군 행진곡>과 <연안송(延安頌)>은 대표 중의 대표곡으로 꼽힌다.

'석양의 빛은 산봉우리 탑을 비추고, 달빛은 강가의 반딧불을 비춰주네. 봄바람은 평탄한 벌판에 불어가고, 많은 산들은 견고한 장벽을 이루었네. 아, 연안! 너 이 장엄하고 웅위한 고성(古城)….'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한 느낌을 주는 <연안송>은 당시 중국 전역에서 애창됐다. 이 노래는 연안을 넘어 중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피 끓는 젊은 청년들을 옌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중국인들이 정율성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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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가인 정율성의 생가. 1914년 이곳에서 태어난 정율성은 중국으로 건너가 혁명음악가로 살았다. ⓒ 이돈삼


정율성은 광주 양림동에서 정해업과 최영은의 사이에서 5남 3녀의 5남으로 태어났다. 정율성은 능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숭일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학교에 입학했다. 광주학생운동을 성원하는 전주학생운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19살 때인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의 길로 나아갔다. 정율성이 중국으로 간 데에는 형제들의 영향이 컸다. 형제들이 이미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하고 있었다. 큰형 효룡은 임시정부 요원으로, 둘째형 충룡은 의열단원으로, 셋째형 의은은 조선혁명간부학교의 모집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정율성은 셋째형 의은을 따라 누나 봉은과 함께 중국으로 갔다. 중국으로 간 정율성은 난징(南京)에 있던 항일투쟁 간부 양성소인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다녔다. 이후 정율성은 난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한다. 음악공부도 이때 시작한다.

정율성은 1937년 조선민족해방동맹의 특사 자격으로 옌안으로 간다. 이름도 본명 정부은(鄭富恩)에서 '아름다운 선율(律)로 인민의 목소리를 완성(成)한다'는 뜻을 담아 정율성(鄭律成)으로 고쳤다. 이후 루쉰(魯迅)예술문학원 음악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창작에 몰두한다. 명작으로 꼽히는 <연안송>을 이때 작곡한다.

정율성은 1939년에 더 많은 곡을 만든다. <팔로군 행진곡>도 이때 나왔다. 모두 8곡으로 구성된 <팔로군 대합창>을 창작하는데, <팔로군 행진곡>은 그 중의 대표곡이다. 25살 때였다.

<팔로군 행진곡>은 1951년 2월 1일 <인민해방군 군가>로 이름을 바꾸고 1953년 5월 1일 '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고쳤다가 1965년에 <중국인민해방군 진행곡>으로 명명됐다. 그 즈음 1941년 정율성은 항일군정대학 음악지도원으로 배치돼 활동하던 정설송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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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과 정설송 부부. 정율성의 초등학교 모교인 화순 능주초등학교 내에 설치된 정율성 음악교실에 붙어 있다. ⓒ 이돈삼


정율성은 결혼 이후 조선의용군으로,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의 교육장으로 항일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해방 뒤엔 북한으로 잠시 들어갔다. 그는 북한에 머물며 <조선인민군 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등을 작곡한다.

1942년 작곡한 '조선인민군 행진곡'은 나중에 북한의 공식 군가로 지정됐다. 한 사람이 중국과 북한의 군가를 모두 작곡한,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지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평양공항에 내린 김대중 대통령을 맞은 곡이 <조선인민군 행진곡>이었다.

정율성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에서 중국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 중앙악단 등에서 활동했다. 1976년 62살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중국의 혁명열사릉인 빠바오산(八寶山)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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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생가에 설치돼 있는 안내판. 식민지 한반도를 떠나 중국에서 항일 독립투쟁을 벌인 독립투사로, 혁명음악가로 산 그의 일생이 정리돼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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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음악교실 풍경. 그가 초등학교 1∼2학년 시절을 보낸 전남 화순의 능주초등학교에 설치돼 있다. ⓒ 이돈삼


정율성은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혁명음악가였다. 식민지 한반도를 떠나 중국에서 항일 독립투쟁을 벌인 독립투사였다. 전선에서 숨겨진 재능을 발휘, 음악 창작에 몰두했다. 중국에서는 항일전쟁과 새로운 중국 건설에 투신한 국제주의 전사로, 혁명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북한에선 현대음악을 재건한 음악일꾼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의 눈에는 아직도 잊혀진 조선의용군이자 항일 민족음악가에 머물고 있다. 항일 음악전사이자 중국 3대 혁명가의 한 사람인 정율성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정율성을 중국에서 활약한 음악가로만 제한하기엔 그의 삶이 너무 크고 넓다.

광주를 중심으로 정율성 재조명 작업이 시작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정율성 기념사업회가 조직되고, 그를 추모하는 크고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정율성 흉상 제막, 정율성로(路) 개통, 생가 터 표지판 건립, 사진 전시 등도 이를 위한 걸음이다.

정율성 관련 논문이 발표되고 학술 세미나가 열리는 것도 위안이다. 광주문화재단이 2015년 정율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삶과 음악세계를 조명한 '사진으로 본 정율성'과 '정율성 가곡집'을 펴낸 것도 성과다.

그가 초등학교 1∼2학년(1922∼1923년) 시절을 보냈던 전남 화순군에서는 능주초등학교에 동상을 세우고 정율성 기념교실을 설치했다. 어린 정율성이 살았던 옛집 터를 중심으로 기념관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하나 같이 의미 있는 걸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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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학생들 사진. 그의 모교인 화순 능주초등학교의 정율성 음악교실에 게시돼 있다. ⓒ 이돈삼


#정율성 #양림동 #중국인민해방군가 #능주초등학교 #정율성음악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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