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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로 보는 다섯 질문, 이것만 알면 '당신도 평론가'

영화 <올드보이>로 보는 영화 평론법, '좋은 영화, 나쁜 영화 찾기'

18.01.12 17:38최종업데이트18.01.12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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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왜 보는가. 대부분 "재미있어서"라고 말할 것이다.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가. 대부분 "재미있는 영화"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영화는 왜 재미있을까. 만약 재미가 없다면 왜 재미가 없을까. 그 기준은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따라서 '좋은 영화', '나쁜 영화'란 없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 내가 싫어하는 영화는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싫어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건 왜 좋아하고, 왜 싫어하느냐다.

영화를 평한다는 것은 그 물음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영화에 대해 느낀 감정을 유연하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주장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주장 같아도, 근거가 합당하다면 설득력이 있기 마련이다. 평론가는 그것을 해내는 사람들이다. 당신이 평론가를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그것 때문일 테다.

평론가는 관객에게 작품을 해설하는 역할이기에 그들의 글은 대부분 친절하다. 따라서 당신이 평론을 읽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평론가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평론가가 내놓는 의견을 막연하게 무시하는 건 당신의 잘못이다. 분명 평론가는 작품에 대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권력집단이지만, 당신도 평론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왜 이 영화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근거를 댈 수 있다면 당신도 평론가다. 다시 말해,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평론가가 낮은 평가를 했다고 해서 그들을 막연하게 싫어하지 말자. 그들의 의견에 대항할 반박의 논거를 찾자.

영화 <올드보이>의 한 장면 ⓒ (주)쇼이스트


"나 영화 좀 본다" - 영화에서 '그 장면'은 왜 나왔나?

서두가 길었지만, 이 글은 영화를 평하는 것을 돕기 위한 글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 영화 좀 본다"고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평론가로 나아가는 그 첫 번째, 자신이 싫어하는 영화를 찾자. 어떤 대상을 평할 때,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을 찾는 게 더 쉽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영화를 보고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불쾌함을 '구리다'는 말 한마디로 정리하기엔 너무 아쉽다. 위에서 말했듯이, 그 불쾌함에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박찬욱의 영화 <올드보이>를 예를 들어보자. 그 영화는 전체적으로 폭력적이어서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왜?'라는 물음을 던져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을 꼽을 수 있다. 주인공 오대수(최민식 분)가 생낙지를 잘근잘근 씹어 먹는 장면, 장도리를 들고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장면, 자신의 딸과 성관계를 했음을 알게 되는 장면.

이제 그 장면이 '왜?' 나왔는지 생각해보자. 오대수가 생낙지를 씹어 먹음으로써 관객은 '야만성'을 느끼게 된다. 그 야만성은 오대수가 15년 동안 갇혀 지내 사회성이 떨어짐을 암시하는 동시에, 잘근잘근 이라는 시각적 효과로 자신을 감금한 인물에게 복수심을 불태움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 장면은 인물을 설명하기에 적합했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인물을 설명할 다른 방법도 있지 않았느냐 물을 수도 있다. 낙지를 씹어먹는 것보다 더 나은 장면이 없었느냐는 말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개인의 의견이 갈리게 된다. 당신이 그 장면에 납득했다면, 그 불쾌함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이라 주장할 것이다. 당신이 그 장면을 싫어한다면, 직접 보여주는 것 말고 간접적으로 보여주어도 괜찮지 않았느냐고 주장할 수 있다.

영화 <올드보이>의 한 장면 ⓒ (주)쇼이스트


즉, '왜?'라는 물음은 영화가 내세우는 근거와 합리화에 반박을 가하는 작업이다. 모든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게 있고, 그것을 위해 여러 도구를 사용한다. 이탈리아의 이론가 리치오니 카누도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당신이 어떤 영화를 보고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영화가 내세우는 모든 근거'를 반박해야 한다. 영화를 평한다는 건 그래서 어렵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평론가는 무척 재밌는 사람이다. 자신의 의견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영화를 보고 끝없는 공부를 하니 말이다.

"나 영화 좀 본다" - 이 영화는 뭘 말하나

그렇다면 영화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야 영화에 반박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장면 하나를 분석하는 건 쉽지만, 그 장면 수백 개가 모여 만들어진 영화 전체를 통달하는 건 어렵다. 따라서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파악하는 건 '넓은 시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일단 영화를 많이 볼수록 그러한 작업이 쉬워진다. 흔히 '직감'이라 말하는 그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영화광이 아니고 평론가가 아니라는 가정하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받지는 못할 테다. 따라서 전체 대신, 일부를 모아 전체를 분석하는 방법을 취할 것이다.

영화 <올드보이>의 한 장면 ⓒ (주)쇼이스트


일부를 모아 전체를 분석한다는 건, 강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드문드문 있는 돌덩어리로도 강을 건널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기승전결마다 어떤 의미가 있고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알면 전체가 파악된다.

다시금 <올드보이>를 예로 들어보자. 오대수가 납치 및 감금된 장면이 초반, 자신을 감금한 인물을 찾아가는 게 중반, 범인을 찾아 대면하는 게 후반이다. 초반에서 우리는 왜 오대수가 감금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오대수가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것을 A라고 놓자. 중반에서 우리는 오대수가 복수심에 불타는 걸 보게 된다. 그리고 미도(강혜정 분)와의 사랑은 왜 나오는 것인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것을 B라고 놓자. 후반에서 우리는 미도가 왜 나왔는지, 오대수가 왜 감금되었는지 확인하게 된다. 이것을 C라고 놓자.

이제 A, B, C의 표지가 있다. 차례대로 보면 A-B-C의 순서로 진행된다. 하지만 우리는 '왜?'라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만약 순서를 바꾼다면 이 영화가 어떻게 보일까? A-C-B의 순서로 예를 들어보자. 감금된 오대수(A)가 자신이 감금된 이유를 알고(C) 복수심에 불탄다(B) 그때, 이 영화의 전개는 A-B-C와 달라 보인다. A-B-C가 오대수가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이야기라면, A-C-B는 속죄보다 복수 자체에 집중하는 이야기다.

당신이 다른 영화에서 A-C-B 형식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면 이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C-B의 순서만 바꾼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A-B-C를 섞는 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는 무언가 '콕' 집어서 말해주지 않는다. C만 결말이라 생각하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영화 <올드보이>의 한 장면 ⓒ (주)쇼이스트


"나 영화 좀 본다" - 그건 왜 나왔나

사실 위의 설명은 정확하지 않다. 영화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변질되곤 한다. <올드보이>에는 감금-복수-딸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가 있는데, 그건 <다이하드>도 마찬가지다. <다이하드>는 딸을 납치 감금한 집단에 아버지가 복수하는 영화다. 이야기의 뼈대가 같지만, 두 영화는 완벽하게 다르다. 즉,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야기의 뼈대만 가지고 담론을 이끌어 내기엔 부족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구성하는 주요 테마를 하나하나 짚어나가면 그것을 보완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올드보이>에서 '근친상간'이라는 테마를 뽑아낼 수 있다. <다이하드>에서 아버지는 딸을 구하는데, <올드보이>에서 아버지는 딸과 성관계를 가진다. 여기서 다시금 하나의 키워드를 도출할 수 있다. <다이하드>는 딸이 납치된 사실을 '알았고', 결말에서 딸을 구해 일상으로 돌아간다. <올드보이>는 미도가 자신의 딸인지 '몰랐고', 결말에서 딸을 구해 일상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몰랐고'라는 키워드는 영화의 결말에서 이우진(유지태 분)이 오대수에게 묻는 대사 중 하나다.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왜' 감금되었는지 아직도 '모르느냐'고 묻는다. 또한 오대수는 자신이 이우진에게 주었던 상처를 '모르는' 상태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모른 채' 성관계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그 키워드가 반복-재사용되는 것을 통해 이 영화가 '모른다'를 강조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영화 <올드보이>의 한 장면 ⓒ (주)쇼이스트


그렇다면 그것을 왜 강조하느냐, 혹은 어떻게 강조하느냐를 물을 수 있다. <올드보이>에서 미도가 오대수의 딸임이 밝혀질 때 관객은 경악하게 된다. 말하자면, '모르던' 것이 밝혀지는 순간의 충격이다.

그런데 이우진도 남들이 '모르던' 것이 밝혀져 피해를 본 사람이다. 바로 오대수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는 오대수가 받았던 충격이, 이미 오래 전 이우진이 받았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충격은 오대수에게 '근친상간'이고, 이우진에게 '누이의 사망'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보면 근친상간은 금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자의로 근친상간을 택한 이우진은 비판의 대상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우진을 비판의 대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오대수를 이우진에게 속죄하게 만듦으로써, 소문을 퍼뜨린 행위를 근친상간보다 '죄질이 나쁜 것'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아이러니를 통해 의도하는 바가 뭔지 물어야 한다.

"나 영화 좀 본다" - 나는 어떻게 생각하나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와 이우진은 학교 동창이다. 이것이 공통점 첫 번째다. 오대수와 이우진은 근친상간을 했다. 이것이 공통점 두 번째다. 오대수는 딸이었고 이우진은 누이였다. 이것이 차이점 첫 번째다. 오대수는 몰랐고 이우진은 알았다. 이것이 차이점 두 번째다.

작품의 서사는 이렇다. 오대수가 한 행동으로 이우진의 누이가 자살한다. 이우진은 오대수를 자신처럼 '근친상간'의 관계로 만든다. 그런데 이우진은 자신의 누이처럼, 오대수와 근친상간의 관계인 미도를 죽이지 않는다. 즉 이우진에게 누이의 죽음은 복수의 대상이 아니다. 이우진은 누이를 자살에 이르게 한 오대수의 혀를 증오한다. 그것을 위해 이우진은 오대수가 근친상간을 했음을 스스로 깨닫게 한다.

따라서 '타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으로 추가된다. 누이의 죽음과 딸과의 근친상간은 '어쩔 수 없어서' 두 사람에게 크나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 불가피함이 바로 아이러니다.

영화 <올드보이>의 한 장면 ⓒ (주)쇼이스트


그런데 그 크나큰 고통은 시간을 멈출 정도의 것으로 묘사된다. 이우진은 외형이나 내형이나 모두 그때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이우진에게 사건 이후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이우진은 오대수를 자신과 같은 위치에 놓으려 15년의 세월을 감금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감금의 행위가 오대수의 인간성을 앗아가며 이우진과 같은 위치에 올린다. 오대수는 이우진을 만들고, 이우진은 오대수를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오대수가 어린 시절 소문을 퍼뜨리지 않았더라면 이우진의 복수도 없었다는 걸 상기해보자. 오대수는 이우진을 만들고, 이우진은 오대수를 만든다.

마침내 오대수는 혀를 자르고, 이우진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우진 쪽에서 일방적으로 끊긴 순환은 다른 한쪽의 오대수를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오대수는 무당에게 찾아가 기억을 지움으로써 균형을 맞춘다.

"나 영화 좀 본다" - 단점을 찾아내자

결과적으로 <올드보이>는 소년 괴물이 어른 괴물을 죽이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 글에서 도출한 해석일 뿐이다. 당신은 얼마든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올드보이>는 '입조심'에 관한 영화다. 누군가에게 <올드보이>는 폭력의 미학이다. 누군가에게 <올드보이>는 쓸데없이 과장된 영화다. 여기에 당신이 하나의 의견을 얹는다면 다음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 당신이 이 영화를 사랑한다면 비판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단점'을 찾아내고, 그에 대한 반론을 준비해야 한다.

당신이 이 영화를 싫어한다면 비판하기 위해 '단점'을 찾아내고, 그에 대한 근거를 준비해야 한다. 결국 영화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은 변함없다. 좋은 영화 나쁜 영화는 당신이 만드는 것이다.

영화를 평하기 위해 많은 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인문학적 지식 또한 영화를 보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물론 인문학적 지식이 넓다면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가 보는 것이지, '지식'이 보는 게 아니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난 순간부터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 영화는 우리의 것이다. 당신은 이미 평론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하여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올드보이 칼럼 박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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