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 주인 바뀌는 날, 두 장의 사진에 경악했다

[책이 나왔습니다] 자세히 배우지 못한 <미군정 3년사>를 쓰기까지

등록 2018.01.16 10:28수정 2018.01.1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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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열차로 서울역에 도착한 미 제7사단 제32보병연대 소속 미군병사들이 기마경찰의 인도로 조선총독부를 향해 행군하고 있다. ⓒ NARA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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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입성하는 소련군을 환영하고자 대동강 대동교에 내걸린 환영 현수막과 대형 붉은 깃발. ⓒ NARA / 눈빛출판사


나는 지난해 섣달 초순, <미군정 3년사>를 펴냈다. 미군정 3년은 불과 70여 년 전의 현대사이건만,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늘진 역사로 그 장면들을 사진에 곁들여 정리해 보았다. 책이 나온 뒤 많은 독자들의 성원과 격려, 그리고 여러 매체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도해 주고 있다. 대단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관련기사 : 70대 '역사학도'가 발굴해 낸 <미군정 3년사>]


내가 그동안 둘러본 여러 선진국들은 영광된 역사뿐 아니라, 오욕의 역사도 원형 그대로 보존하면서 후세의 교훈으로 남기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를 올곧게 기록하거나 이를 제대로 보존치도 않을 뿐더러, 이미 있던 역사 현장이나 기록조차도 훼손하거나 왜곡해 버리고 있다. 그 결과 같은 잘못을 거듭 되풀이하는, 반역사적인 작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실례로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은 역사에 대한 소양 부족과 '나는 예외다'라는 초역사적인 망상에 빠져 비극적인 결말을 답습하고 있다. 백성들조차도 역사에 무지몽매하거나 소홀하여 안전 불감증에 따른 대형사고들이 거듭 꼬리를 물고 일어나 숱한 인명 피해뿐 아니라, 나라의 근간조차 뒤흔들고 있는 현실이다. 이 모두가 역사를 제대로 기록치 않고, 기록한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데서 나온 무지의 탓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까닭

역사학자 김성식은 <내가 본 서양>에서 "영국 사람은 역사를 아끼며, 프랑스 사람은 역사를 감상하고, 미국 사람은 역사를 쌓아간다"는 말로 그들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네들은 사소한 것이라도 역사가 될 사료라면 이를 아끼고, 그대로 본존하며, 원형을 손상치 않고자 건물의 먼지를 닦는 것조차도 주저한다. 그들은 설사 조상의 어둡고, 부끄러운 오욕의 역사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후손들에게 바른 역사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

이웃 중국은 근현대사의 굴욕적인 역사에서 매우 힘겹게 벗어난 뒤, 온 나라 곳곳에 있는 그들의 오욕된 역사의 현장에다 '물망국치'(勿忘國恥,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자) '전사불망후사지사'(前事不忘後事之師, 지난 일을 잊지 말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자)라는 글귀를 돌에 새겨 놓은 뒤 백성들에게 지난 치욕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준엄하게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한때 중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으로부터 '종이호랑이'로, 심지어는 자기네 나라 안 땅이건만 "개와 중국인은 출입을 금한다"(狗與華人不進入內)라는 어처구니 없는 팻말 때문에 근접치도 못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지난날 그런 수모의 역사를 매우 뼈저리게 느끼면서 크게 각성한 끝에 오늘날 G2 강대국으로 당당하게 우뚝 솟은 것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사실 적당한 망각은 정신 건강에 매우 좋다. 하지만 사람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망각한다면 결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도 하등동물처럼 시행착오를 거듭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서가는 슬기로운 사람들은 망각의 방지책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그 역사를 사랑하면서 금과옥조로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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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3년사> 표지 ⓒ 눈빛출판사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된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투키디데스(Thukydides)는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 된다"고 역사의 연속성을 설파했다. 또 다른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 하여, 현재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실을 끄집어내어 현재의 관점에서 그 해답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 두 학자의 말은 역사학의 알파요, 오메가다.

나는 30여 년 일선 교단에서 2세들을 가르쳤던 훈장으로, 그동안 우리 사회와 나라에 입은 은혜를 되갚는 길은 이제까지 보고 듣고 배운 바를 다음 세대에 바로 전수하는 일로 알고<개화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등의 저서를 펴낸 바 있다. 그리고 이제 한국근현대사 시리즈 세 번째 저서로 <미군정 3년사>를 펴냈다.

흔히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군정기 3년은 '잘 모르는 역사' '덮어 버린 역사' '묻혀 버린 역사' '묻어 버린 역사' '잃어버린 역사' 등으로 말하고 있다. 나는 초중고교에서 국사를 배웠지만, 매번 미군정기 3년은 자세히 배우지 못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은 삼국시대나 고려 조선시대 역사는 시시콜콜한 연대까지도 잘 외우면서도 불과 한 세기도 안 된 해방전후사에는 아주 까막눈이다. 그 까닭은 미군정기는 현대사로 교과서 맨 뒷부분에 있기에 학년말로 대체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진급하거나, 배워도 시험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현대사는 해방 후 역대지도자의 정통성과 그들의 치부와 직접 관련성이 있었기 때문에 두루뭉술하게 기술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학생들은 학교에서 역사를 배워도 일천 년 전의 역사적 사실은 잘 알면서도 근현대사는 잘 모르는 절름발이 역사교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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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우익의 3.1절 기념대회(1947. 3. 1.) ⓒ NARA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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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에서 거행된 좌익의 3.1절 기념대회(1947. 3. 1.) ⓒ NARA / 눈빛출판사


'고문정치' '통역정치'가 활개를 치다

2004년2월 4일, 나는 한 재미동포의 안내로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을 방문하여 그곳에 소장된 한국현대사 사진자료를 열람했다.

그날 내가 본 사진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후,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항복문서에 서명한 다음, 그날 오후 4시 조선에 진주한 미군들이 조선총독부 광장에 도열하여 국기 게양대의 일장기를 끌어내리고 곧 이어 미 성조기를 게양하는 두 장의 사진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패망했지만 사실상 일제강점기는 계속되다가 그날(1945. 9. 9)부터 나라의 오너만 바뀌는, 곧 일제강점기에서 미 군정기가 시작되었던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 실정에 어두웠던 미군들은 미군정기 3년 동안 '고문정치' '통역정치'로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을 통치했다. 게다가 주둔군 사령관 존 하지는 인문적 소양이 매우 부족한 군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군정청장으로서 시행착오나 오판이 많았다.

해방 직전까지 일제 조선총독부는 대동아전쟁을 치르기 위해 정치·경제 등, 사회 전 분야에 엄격한 통제정책을 폈다. 일제는 조선 백성들에게 모든 생활필수품조차 최소 수준으로 공급했다. 그러다가 명목상 해방이 되자, 이런 내핍 통제경제가 한꺼번에 무너졌다. 게다가 고급 기술을 죄다 장악했던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생산설비가 제대로 가동치 않아 식량을 비롯한 모든 생필품들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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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환영대회에 참석한 조선인과 연합군 고위 장교단(1945. 10. 20.) 단상 위 인사들 머리 위에 무장 경계병이 이채롭다. ⓒ NARA / 눈빛출판사


친일정상배와 모리배들의 극성시대

더욱이 패망한 조선총독부나 급조된 군정당국은 임시방편으로 통화량을 무분별하게 남발했다. 그 때문에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 틈에 친일정상배를 낀 모리배들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들은 혼란한 그 시기를 치부의 기회로 삼았다. 백성들은 식량과 생필품 부족으로 아우성인데, 그들 창고에는 매점매석한 식량과 생필품이 가득했고, 일본인의 적산을 가로채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특히 미군정기 식량 부족은 매우 심각했다. 군정청은 이를 해결하고자 미곡수집령을 발동했으나,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와 38선 이북에서 월남 동포의 폭증으로 식량은 절대량이 부족한데다가 모리배의 장난으로 도시민들은 식량 부족에 아우성을 쳤으며, 또 농민들은 시중가보다 낮은 수매로 불만이 증폭했다.

결국 미군정 관리들은 미곡파동이 나자 "쌀이 없으면 고기를 먹어라"고 할 만큼 조선인에 대한 무지로 생활안정을 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미군정은 조선 통치에 이력이 있는 친일 관료들을 다시 요직에 앉히자 해방 후 숨죽이던 그들은 새로이 활개를 치며 설쳤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 백성 위에 군림했다. 왜냐하면 미군들은 영악한 일본인보다 어수룩했다. 이 땅에 친일관료들이 다시 활개 치자 일반 백성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러 마침내 폭발하기 시작했다. 1946년 9월 미군정의 식량, 노동정책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은 곧 대구 '10월 항쟁'으로 이어지고, 그 항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잠복했다가 1948년 제주 '4·3' 항쟁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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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에 진주한 붉은 군대 소련군 (1945. 10.) ⓒ 눈빛출판사


백성들이 주인의식을 가져야

1948년 8월 15일, 38도선 이남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명목상 미군정기는 끝났지만 실제로는 미군이 철수한 1949년 6월까지 군정장관 직무대리 찰스 헬믹(Charles G. Helmick)은 한국정부 고문단 대표 자격으로 활동했다. 한편 38도선 이북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일찍 권력을 장악한 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로써 남과 북의 두 신생 정부는 명목상 미 군정, 소 군정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 강대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후 두 강대국들은 한반도를 통째로 자기네 판도에 넣겠다는 야욕이 분출하여,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은 두 세력 간 대리전쟁으로, 숱한 사상자와 이산가족을 남기고, 끝내 분단 문제는 해결치 못했다. 전쟁 후 일직선의 38도선은 곡선의 군사분계선(휴전선)으로 바뀐 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전선에서는 일단 포성이 멎었다.

나는 미군정 3년사를 다음 세대에게 쉬우면서도 정확하고 간결하게 전달코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판을 두들겼다. 집필하는 동안 울분을 금치 못할 때는 글방에서 가까운 원주 치악산을 오르거나 남한강 강둑을 거닐며 쓰라린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곰곰이 그 울분의 시발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남의 탓 이전에 우리 곧 내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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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원 선출을 위한 5. 10. 총선거일 투표장으로 가는 흰옷 입은 백성들 ⓒ 눈빛출판사


'경천애민' 하라

지난날 우리 선조들은 바깥세상의 물정을 모른 채 봉건의 인습을 개혁치 않았다. 또 지도층이나 사대부들은 현실에 안주하면서 힘없는 백성의 볼기짝이나 치며, 수탈에 전념하다가 마침내 나라를 이웃 일본에게 빼앗겼다.

또 일제 패망 후 나라의 지도자들은 집권에 눈이 먼 채 사분오열된 데도 그 원인이 있었다. 아니, 강대국은 한반도에 상륙하기 이전부터 조선인의 자주 독립은 그들 안중에 없었다. 그들에게 조선은 한낱 전리품이었고, 조선인은 미개인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나라의 지도자나 백성들은 이를 자각치 못하고, 해방 후 미관말직에라도 오른 관리들은 여전히 백성 위에 군림하며 수탈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미욱한 백성들은 정의감이 무뎌진 채, 나라의 미래보다 내 땅값이나 집값이 오르는 데에 한눈을 팔고 살아온 감이 없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지난날도, 지금도, 앞으로도 나라의 백성들이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나라의 역량을 키워야 진정한 자주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라의 지도자들이 정의롭지 않고, '경천애민'(敬天愛民)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고, 외세의 지배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을 간곡히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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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정부수립 국민축하식(1948. 8. 15.) ⓒ NARA / 눈빛출판사


<미군정 3년사> 수록 사진전 안내
일시 : 2018년 1월 16일(화)부터 1월 28일(일)까지
관람시간 : 오전 11시~오후 6시
장소 : 류가헌 갤러리 2층
(서울 종로구 자하문 터널 어귀 청운초등학교 앞. 전화 02-720-2010)

*저자와의 대화
나의 책을 말한다. - 박도
2018. 1. 20. 토요일 오후 4시 류가헌 2층

미군정 3년사 - 빼앗긴 해방과 분단의 서곡

박도 엮음,
눈빛, 2017


#미군정 3년사 #박도 #류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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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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