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로 회귀한 조민수, 한국당으로 돌아간 김무성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김무성을 닮은 조민수

등록 2017.11.08 20:47수정 2017.11.08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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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박근혜 정권에 깊숙이 개입했다. 친박으로 분류되진 않았지만, 정권의 여당을 이끌었다. 따라서 박근혜 정권 하의 보수 세력의 핵심 지도자였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말 탄핵정국 속에서 박근혜에 반기를 들며 바른정당 창당에 참여했다.

김무성은 2016년 4월 13일 제20대 총선에서 패배하고 다음날 대표직을 사퇴했다. 그후 몸을 낮추고 지내다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박근혜를 비판하며 선 긋기에 나섰다. 제3차 촛불집회 3일 뒤인 2016년 11월 15일에는 대구에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것에 대해서도 반성의 뜻을 표시했다.

올해 1월 24일 바른정당 창당대회 때도 마찬가지. 국회의원 및 당원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대(對) 국민 큰절을 올린 김무성은 마이크를 잡고 "우리는 새누리당의 후안무치한 패권정치와, 박근혜 정부의 일원으로서 대한민국의 헌법 유린과 국정농단을 막지 못했다"라면서 "국민께 사죄하고 용서를 구한다"라고 고백했다.

김무성과 바른정당은 박근혜 및 새누리당 정권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른정당으로 가게 될 29명이 분위기를 조성한 결과, 6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지난해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탄핵소추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헌법 제65조 제2항에서는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즉 국회의원 200명 이상이 찬성해야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2016년 12월 9일에 탄핵소추에 찬성한 의원은 234명이다. 바른정당으로 가게 될 29명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이 아니었다면, 박근혜 탄핵소추안은 국회를 통과하기 힘들었다. 김무성과 바른정당은 그런 면에서 탄핵 정국의 '공로자들'이다. 

돌아간 김무성, 역사의 흐름 거스르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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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대회서 무릎꿇은 바른정당 올해 1월 24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바른정당 중앙당 창당대회에서 인사말에 나선 김무성 의원이 "박근혜 정부의 일원으로서 대통령의 헌법위반과 국정농단 사태를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통절한 마음으로 국민여러분께 사죄드리며 용서를 구한다"며 동료 의원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있다. ⓒ 남소연


박근혜 탄핵을 계기로 한국 정치 질서가 흔들리며 새로운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다. 그래서 이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의 분기점이 될 만하다. 김무성은 그런 분기점을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보수 지도자였지만, 결정적 순간에 보수를 흔드는 진보적 역할을 한 셈이다.


그랬던 김무성이 지난 6일, 8명의 바른정당 의원들과 함께 자유한국당 복당을 선언했다. '후한무치한 새누리당'을 운운했던 그가 불과 10개월 만에 새누리당 계승자인 자유한국당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유승민 체제 하의 바른정당에서는 정치적 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무성의 당적 변동은 여느 당적 변경과 질적으로 판이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출당시켰다 해도, 자유한국당이 새누리당 후계자라는 엄연한 사실은 부정되지 않는다. 자유한국당은 '신(新)새누리당'이지 않나.

새누리당 정권은 단순한 '이전 정권' 혹은 '과거 정권'이 아니다. 국민들의 총의에 의해 부정되고 거부된 '이전 시대' '과거 시대'의 유물이다. 그래서 '신새누리당'으로 돌아가는 것은, 1960년 4·19 이후의 정치인이 4·19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 1987년 6월 항쟁 이후의 정치인이 6월 항쟁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명백한 역사적 퇴행이다. 단순히 이쪽저쪽 왔다 갔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일이다.

그런데도 돌아가는 것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드는 지금 상황의 역사적 의미에 둔감하거나, 둔감하지 않다면 당면한 '정치적 생계'에 매몰돼 있다는 뜻일 것이다. 정치적 생계가 다급해서 그런다 해도 그런 변명은 성립되지 않는다. 자기 앞가림도 못할 정도인 사람이 국민을 위해 정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제까지 역사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 정치인치고 잘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수 강산에의 노래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에 나오는 연어가 아닌 이상, 인간 세상에서 결정적 순간에 역사의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사람치고 잘된 경우는 찾기 힘들다. 역사에 대한 성찰이 무(無)한 사람들이나 벌이는 일이다.

평소에 보수정당을 떠났다가 도로 돌아가면 '철새'가 될 수 있지만, 역사적 전환점에서 그런 일을 하면 철새 정도가 아니라 '역사의 죄인'까지 될 수 있다. 21세기 초반을 기록할 후대 역사서에서 두고두고 손가락질할 만한 일이다. 김무성의 행보는 그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다.    

조민수와 이성계

고려시대 장군. 서울시 용산동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결정적 순간에 김무성과 똑같은 길을 걸은 사람이 있었다. 보수세력 중진급 지도자였다가 보수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지만, 얼마 못 가 개혁 이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보수파로 되돌아간 사람이다.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회군을 성사시킨 조민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무성의 고향인 부산에서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경남 창녕군이 있다. 그곳이 조민수의 고향이다. <고려사> 조민수 열전에 따르면, 그는 고려 공민왕 때 순주부사(순천시장)로서 홍건적 격퇴에 기여하면서부터 중앙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

홍건적은 세계 최강인 몽골에 저항하는 중국인 반체제 집단이었다. 붉은 수건을 머리에 두른 이들은 14세기판 알카에다 혹은 IS(이슬람국가)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을 격퇴하는 공로를 세운 걸 계기로 <고려사>에 기록될 정도의 인물로 떠오른 것이다.   

공민왕의 후계자인 우왕 때, 조민수는 신흥 최강국 명나라에 맞서 요동(만주) 땅을 정벌하라는 왕명을 받고 이성계와 함께 5만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다. 그랬다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유턴'해서 우왕 정권을 전복하는 1388년 위화도회군을 성사시켰다. 이 회군은 고려왕조에 치명타를 가함으로써 4년 뒤 조선 왕조가 수립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역사의 분기점이 됐던 것이다.

위화도회군 직전까지 조민수는 보수파였다. 이 당시 우왕 정권의 핵심 실세는 최영 장군이었다. 최영은 정권의 공동 경영자였다. 조민수는 그런 최영의 신임을 받았다. 최영은 요동정벌군 서열 1위인 팔도도통사였다. 하지만 직접 출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벌군의 현장 책임자는 이성계였다. 하지만 최영은 이성계를 불안해했다.

이유는 많았다. 이성계는 여진족 구역인 함경도 쪽의 동북면에서 독자 세력을 갖고 있었다. 또 진보세력인 신진사대부들과도 친했다. 이 시대의 사대부들은 지방 출신의 중소 규모 부동산 소유자로서 개혁 성향을 보이고 중앙정계에 진출했다는 의미에서 신진사대부로 불렸다. 이성계는 이들과 친했다.

<고려사> 최영 열전에 따르면, 최영은 임금 경호부대 같은 정부군 내에서 잔뼈가 굵었다. 평생을 오로지 임금만 바라보며, 독자세력 구축 같은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양심적인 보수파였지만, 신진사대부들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최영 열전에 따르면, 요동정벌군 출정 얼마 전에는 신진사대부들을 대거 숙청하려고까지 했었다.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산70-2의 최영장군묘 입구에 있는 최영 상상화. ⓒ 김종성


그런 최영이 볼 때 이성계는 위험인물이었다. 독자세력을 기반으로 진보세력과 결합할 가능성이 있었다. '블랙리스트'에 올릴 만했다. 이런 이유로, 요동정벌군 출정 당시, 최영은 이성계와 손은 잡았지만 마음까지는 주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라도 정벌군 5만이 이성계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자 이성계를 정벌군 서열 3위인 우군도통사에 임명했다. 서열 2위인 좌군도통사 자리에는 믿을 만한 조민수를 배치했다. 그렇게 해서 조민수를 형식적으로나마 정벌군의 현장 책임자로 만들었다. 
 
진보세력과 연결된 이성계를 견제하고자 조민수를 좌군도통사에 임명한 데서 드러나듯이, 조민수는 보수세력 내에서 비중있는 인물이었다. 지도자급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조민수는 결정적 순간에 보수 정권을 배반했다. 이성계의 쿠데타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현장에서 이성계와 함께 정벌군을 움직이던 조민수가 회군에 찬동하지 않았다면, 이성계는 쿠데타를 단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설령 단행했더라도 성공 가능성이 낮았을 것이다. 박근혜 탄핵소추 당시 김무성과 바른정당이 수행한 역할을 조민수도 수행했던 것이다.

개혁에 알레르기 반응 보인 조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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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속 조민수(최종환 분). ⓒ SBS 갈무리


조민수는 보수정권과의 인연을 과감히 내던지고, 이성계와 함께 우왕과 최영을 축출하고 창왕을 옹립한 뒤 개혁정권을 구축했다. 이색·정도전·정몽주 같은 신진사대부가 대거 동참하는 정권에 조민수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하지만 조민수의 새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운 상황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신진사대부가 주도하는 개혁운동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토지개혁이 비위에 거슬렸다. 그래서 불안감을 느낀 나머지, 저지 투쟁에 나섰다. 조민수 열전은 "(그가) 사전(私田)을 혁신하려는 논의를 저지했다"라고 기록했다. 사전(私田)은 개인이 소작료 등을 거둘 수 있는 토지로서, 귀족 지주들한테는 치부의 도구였다. 

농업경제 시대의 토지개혁은 지금으로 치면 부동산 소유권 및 기업 경영권의 혁신이었다. 지주가 농민들을 동원해 농업을 경영하는 모습은 지금의 기업 경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농지개혁은 부동산 소유권뿐 아니라 기업 경영권과도 연결되는 문제였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 중 하나는 부동산 소유 및 기업 경영권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하는 점이다. 다수 대중의 편을 드느냐 소수 특권층의 편을 드느냐에 따라 진보·보수가 나뉜다.

토지 문제가 불거지자 조민수는 본색을 드러냈다. 진보세력과 합세해 보수정권을 무너뜨린 그가 보수적 입장으로 회귀했다. 보수세력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가 1389년이다. 진보세력에 동조한 이듬해에 원래 입장으로 돌아간 것이다. 김무성이 복당하는 데 들어간 시간과, 조민수가 회귀하는 데 들어간 시간 역시 비슷했다. 

조민수 역시 '정치 철새'로만 해석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보수세력 지도자였던 그는 고려 역사의 전환점에서 진보세력과 손잡고 보수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얼마 안 있어 보수적 입장으로 도로 돌아갔다. 위화도회군 이후로 단죄의 대상이 된 보수세력 입장으로 회귀한 것이다. 단순한 철새가 아니라 역사의 죄인이 될 만했던 것이다.

조민수 역시, 연어도 아니면서 역사의 물결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 역시 자기 시대의 역사적 의미에 둔감했거나 아니면 '정치적 생계'가 너무 다급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역사 발전에 대해 너무나도 무성의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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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외 8명, 바른정당 탈당 선언 바른정당 김무성 의원을 비롯한 의원들이 6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탈당을 공식 선언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 남소연


김무성과 조민수를 비교하는 글은 끝났다. 현재까지 나타난 두 사람의 행보 중에서 공통점은 '원래 입장으로 되돌아갔다'는 부분까지다. 이제껏 설명한 것은 이 부분까지다. 그리고 지금부터 소개할 부분은 참고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죽은 조민수의 경우에는, 보수세력으로 회귀한 뒤에 어떻게 됐는지를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김무성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자유한국당에 복귀한 이후의 김무성이 또다시 의외의 행보를 걸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조민수의 보수 회귀 이후의 결말이 김무성한테도 벌어지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므로, 김무성한테는 다른 결말이 다가올 수도 있다. 그래서 참고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토지개혁 문제를 계기로 보수적 입장으로 되돌아간 조민수는 얼마 안 있어 신진사대부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신진사대부들은 그에 대한 탄핵을 추진했다. 이 탄핵은 성공했다. 1389년, 조민수는 고향 창녕으로 유배됐다. 유배 뒤 특사됐지만, 진보세력과 다시 맞붙었다가 1390년에 창녕으로 다시 유배됐다. 그리고 거기서 생을 마쳤다. 고려 멸망 2년 전의 일이다.
#김무성 #바른정당 #조민수 #위화도회군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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