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가 변절자? 역사 왜곡이 '숙주나물' 만들었다"

[인터뷰] ‘신숙주 선생 나신 600돌 기념 학술대회’ 여는 한글학회

등록 2017.10.22 19:09수정 2017.12.07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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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선생은 분명히 우리 역사에 큰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선생은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 갔을 뿐, 그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는 않았다. 그는 비난받기에는 정말로 인간적이었고 깨끗한 벼슬아치였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보한재 신숙주 선생(1417~1475)을 평가한 내용이다. 선생이 훈민정음 반포와 국방·외교에서 남긴 업적을 정확하게 재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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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선생 재평가해야 합니다" 신숙주 선생을 재평가하는 학술대회를 여는 한글학회 권재일 회장. ⓒ 신향식


'신숙주 선생 나신 600돌'을 맞아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어학자와 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를 도운 공로자인 신숙주 선생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한글학회는 고령신씨대종회와 함께 '보한재 신숙주 선생 나신 600돌 기념 학술대회'를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한글박물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사)의 후원으로 오는 27일 국립한글박물관 강당에서 개최한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융합 인문학자, 훈민정음 반포 공로자, 정치가, 외교관, 국방 전략가, 문화 예술가 측면에서 신숙주 선생을 업적을 살펴본다. ①'훈민정음, 동국정운과 음운학자 신숙주'(김슬옹, 연세대) ②'조선통신사와 신숙주의 해동제국기'(허경진, 연세대) ③'신숙주의 대일·대명 외교전략'(박현모, 세종리더십연구소) ④'조선초 격변기 신숙주의 정치적 역할'(신병주, 건국대) ⑤'신숙주의 국방정책'(김경록,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⑥'조선전기 미술평론가 신숙주'(고연희, 이화여대) ⑦'조선전기 서예가로서의 신숙주'(이기범, 경기대) ⑧'보한재  전집과 신숙주 평전'(박덕규, 단국대) 순으로 발표한다. '신숙주 공적비' 등의 관련 사진과 '신숙주 평전', '신숙주 유물과 서적'도 전시한다.

한글학회 권재일 회장(서울대 언어학과 교수)과 한글학회 연구위원인 김슬옹 박사(한글학회 연구위원, 연세대 외래 교수)를 지난 17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나 신숙주 선생을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글학회는 1908년 창립 이래 한국어 연구와 한글 보급 및 발전을 이끌어온 국내 최초의 민간 학술단체다. 다음은 권 회장과의 일문일답 내용.

"훈민정음 연구와 보급에 젊음을 다 바쳐"


- 신숙주 선생의 업적을 알려 주세요.
"신숙주 선생은 훈민정음 반포와 보급에 큰 업적을 남긴 우리 말글 연구가입니다. 선생은 훈민정음 연구를 위해 젊음을 다 바쳤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해 <운회>,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등 훈민정음 보급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모든 책에 선생이 관여했습니다. 이것만 감안해도 선생의 높은 업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 또 어떤 업적이 있나요?
"훈민정음 반포 전인 1441년에는 집현전 부수찬을 역임했습니다. 1447년에 집현전 응교가 돼서 <동국정운>과 <사성통고>의 편찬을 맡았는데, 연구를 거듭해 우리식 표준 운서인 <동국정운> 집필로 결실을 봤습니다. 그렇다면 한글 혜택을 누리는 후손으로서 세종의 뜻을 이어 남긴 그의 큰 한글 업적을 기려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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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선생 재조명하는 학술대회 안내문' 신숙주 선생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한글학회 주최로 열린다. ⓒ 신향식


- 세종대왕이 신숙주 선생을 중국 요동지방에 사신으로 보낸 적이 있다면서요?
"선생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를 도와서 음운의 이치를 탐구하기 위해 수천 리 먼 길인 요동지방을 열세 차례나 왕복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한글로 표시하는 운서(韻書)를 편찬할 때, 참고 사항을 묻기 위해 요동에 유배 중인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사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때 세종대왕은 신숙주 선생이 진수(眞髓)를 캐어 올 인재로 판단하고 사신으로 파견했습니다. 이것을 보아도 한글 반포에서 신수주 선생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황찬은 신숙주 선생이 그의 어음(語音)만 듣고도 음운의 이치를 스스로 터득하자 매우 놀라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 한글 반포 이외 분야에서도 업적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정치, 외교, 국방 분야에 훌륭한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신숙주 선생은 훈민정음과 운서 연구만 하신 분이 아닙니다. 명나라와 일본에 파견된 외교관으로서 외교 업적도 남겼고, 강원도·함길도에서 야인을 정벌해 국방 업적으로도 크게 공헌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언어생활뿐만 아니라 국방, 외교 등 주요 분야에서 선생 업적의 혜택을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이번 학술대회는 이러한 신숙주 선생의 업적을 높이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 어떤 예를 들 수 있을까요?
"언어생활뿐만 아니라 국방, 외교 등 중요 분야에서 그가 남긴 업적은 매우 넓습니다. 55세였던 1471년(성종 2)에는 성종의 명으로 세종 때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던 경험을 살려<해동제국기>를 지었습니다. 조선 시대 내내 지침서가 되는 일본과의 외교 지혜를 남긴 것입니다. 56세였던 1472년(성종 3)에는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이어 세조 때부터 작업을 해온 <동국통감> 편찬을 성종의 명에 의해 선생이 총괄했습니다. 또 세조 때 편찬하도록 명을 받은 <국조오례의>의 개찬 산정(刪定)을 위임받아 완성했습니다. 여러 나라의 음운에 밝았던 그는 여러 번역 관련 책을 펴냈으며 또 일본, 여진의 중요 지역을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 신숙주 선생의 업적을 계승해야겠군요.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신숙주 선생의 업적을 계승해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경기도 의정부에 신숙주 선생 묘소가 있는데, 1971년에 우리 한글학회에서 '문충공 고령 신숙주 선생 한글 창제 사적비'를 세웠습니다. 한글학회는 사적비에 새겨 둔 뜻을 굳건히 이어가겠습니다. 신숙주 선생 육백 돌을 기념하며, 온 국민이 선생의 '말글 사랑, 나라 사랑' 정신을 계승해, 우리 말글과 나라가 더욱 발전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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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외교 문화 예술에서도 업적 많아" 한글학회 권재일 회장이 신숙주 선생의 업적을 설명하고 있다. ⓒ 신향식


- 허웅전 한글학회 이사장이 작성한 사적비문에도 선생을 기린 내용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하늘이 우리 겨레에 복을 내리사 불세출(不世出)의 준재(俊才)를 이 땅에 보내시어 어진 임금을 보필함으로써 인류 문화의 금자탑인 한글을 창제하게 하시고 두 번이나 영의정의 대임(大任)을 맡으시어 외교·국방·문화면에 이르기까지 널리 탁월한 치적을 낳게 하시니 그분이 바로 보한재 신숙주 선생이시다. 성장함에 따라 뛰어난 예지는 하나를 들어 열을 깨쳤고, 비범한 문재(文才)는 당대 선비들이 매우 놀라는 바였다. 세종께서 한글을 반포하실 제 대왕을 협찬한 여덟 신하의 한 사람으로 선생을 뽑으셨거니와 오묘한 뜻과 어려운 이치는 선생의 깊은 조예를 힘입어 밝혀진 것이 많았다.'"

- 그밖에 또 어떤 사연이 있나요?
"훈민정음 반포 직전인 1445년에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같은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동시 통역사인 손수산과 함께 중국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는 방법에 관한 조언을 받고자 요동반도에 유배를 와 있던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에 다녀왔다는 얘기는 <세종실록>에 기록돼 있습니다. 신도비문 등에 무려 13번을 다녀왔다고까지 기록해 놓았습니다. 실제로 그 먼 곳을 13번이나 다녀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훈민정음 연구를 위해 그의 젊음을 다 바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때의 고달픈 여정 속에서 성삼문과 주고받은 시가 <보한재집>에 남아 있어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 옛 문헌에도 선생의 역할이 남아 있겠군요.
"<세종실록>은 신숙주 선생과 성삼문이 황찬을 만나러 간 사건을 간단하게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성종실록>에는 이창신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남겨 놓았습니다. 성종 때인 1487년에 이창신은 '세종조에 신숙주·성삼문 등을 보내어 요동에 가서 황찬에게 어음(語音)과 자훈(字訓)을 묻게 해 <홍무정운>과 <사성통고> 등의 책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서 한자 훈을 대강 알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실록 1487년 2월 2일)."

- 선생의 최고 집필서를 든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동국정운>이 대표집필입니다. 신숙주 선생은 1447(세종 29)년 31살 때 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집현전 응교가 됐습니다. <동국정운>·<사성통고> 편찬의 핵심 역할을 한 것입니다. 1445년 2월 집현전 원로학자들이 훈민정음 보급을 반대하자 세종은 '그대들은 운서를 아시오' 하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중국 한자와 한자음 사전인 운서에 관한 연구는 훈민정음 연구의 바탕이었고 운서에 훈민정음으로 발음을 기록한 책은 훈민정음의 놀라운 기능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신숙주 선생의 최고 한글 업적은 1448년 펴낸 우리식 표준 운서인 <동국정운>을 대표로 집필한 걸로 들 수 있습니다."

- <동국정운>에는 뭐라고 적혀 있나요?
"<동국정운> 머리말에서 선생은 '이제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하나의 소리라도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실로 정음이 음을 전하는 중심 줄이 되었다(自正音作而萬古一聲, 毫釐不差, 實傳音之樞紐也)'고 했습니다. 또, '아아, 소리를 살펴서 음을 알고, 음을 살펴서 음악을 알며, 음악을 살펴서 정치를 알게 되나니, 뒤에 보는 이들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으리로다(吁! 審聲以知音, 審音以知樂, 審樂以知政, 後之觀者, 其必有所得矣)'고 감동을 적었습니다."

- <동국정운>의 언어학적 가치는 어느 정도인가요?
"신숙주 선생은<동국정운>을 펴낸 것만으로도 훈민정음 연구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중국 황제와 지식인들이 중국 한자음을 적기 위한 고뇌가 담겨 있는 책이 운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천 년 넘게 적지 못한 발음을 적을 수 있게 된 기쁨을 신숙주 선생은<홍무정운역훈> 서문에서 '우리 동방에서 천백여 년이나 알지 못하던 것을 열흘이 못 가서 배울 수 있으며, 진실로 깊이 생각하고 되풀이하여 이를 해득하면 성운학이 어찌 자세히 밝히기 어렵겠는가(東方千百載所未知者. 可不浹旬而學. 苟能沉潛反復. 有得乎是. 則聲韻之學. 豈難精哉)' 하면서 적은 것입니다."

"신숙주 선생이 변절자? 잘못 알려진 측면 많아"

한편, 이번 학술대회에 함께 참여하는 훈민정음 연구가 김슬옹 박사는 "신숙주 선생이 변절자라는 주장도 사실은 잘못 알려진 측면이 많다"면서 "이분법적으로 선생을 매도할 수는 없고, 오히려 우리 후손들은 선생이 남긴 업적의 덕을 많이 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슬옹 박사와의 일문일답 내용.

- 신숙주 선생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글이 해례본을 통해 제대로 세상에 반포될 수 있었던 것은 음운과 문자 연구에 남다른  신숙주 선생의 눈물겨운 노고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생의 업적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이제라도 선생을 온당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세종대왕께서도 선생의 역량을 인정하셨고, 신임도도 높았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 한글 창제에 선생의 공로가 크다는 말씀이군요.
"창제는 1443년에 세종이 비밀리에 한 것입니다. 그것을 널리 알리는 해례본 집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 신숙주 선생입니다. 한글은 배우기 쉽고 쓰기 쉬워서 우리말을 적는 글로서도 완전합니다. 특히 제자(制字) 원리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으뜸가는 문자입니다. 이런 한글 해설서 집필에 선생의 공이 가장 컸습니다. 우리 후손들이 잊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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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선생 신위 봉안된 불천지위사당 보한재 신숙주 선생 신위가 봉안된 불천지위사당. 경기도 평택에 있다. ⓒ 신향식


- 그런데 신숙주 선생이 변절자라는 지적도 있지 않나요?
"그의 삶을 정확히 살펴보면 이는 온당치 않은 주장입니다. 그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학자와 관리의 길을 간 것입니다. 세조에게 얽힌 관계 때문에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선생이 남긴 업적은 업적대로 기려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숙주 선생이 변절자라는 주장은 역사 왜곡이라고 봅니다.

신숙주 선생은 36살 때인 1452(문종 2)년에 수양대군이 명나라 사신 대표로 갈 때 서장관으로 함께 가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37살 때인 1453(단종 1)년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는데, 선생은 당시 출장 중이었습니다. 직·간접으로 관련돼 있지만 전체 역사 맥락으로 보면 세조가 그의 측근으로 끌어들이고자 공신록에 올렸고 곧이어 도승지로 삼았습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변절자의 굴레를 쓰게 됐습니다. 그런데 진짜 선생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면 변절자란 평가는 옳지 않습니다. 44살 때인 1460년(세조 6)에 강원·함길도의 도체찰사에 임명돼 야인 정벌을 위해 출정해서 국방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 사육신과 대비해 신숙주 선생을 폄하하는 역사학자들이 있지 않나요?
"우리 후손들은 그의 업적을 제대로 모릅니다. 오히려 선생이 세조 편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폄하하고 있습니다. 사육신, 생육신의 삶은 고결하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신숙주 선생이 사육신이나 생육신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세조 편에 선 것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볼 수 없는 정치적 맥락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가 살아남아 이룩한 업적은 참으로 크고 고귀합니다."

-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도 신숙주 선생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이화 선생은 신숙주 선생의 행적은 보통 사람이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정도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이 뛰어난 학자요, 세종·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였기에 유명세가 따라 붙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숙주 선생이 생육신처럼 초야에 묻혀 지냈더라면 역사에 업적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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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선생을 변절자로 매도할 순 없다" 훈민정음 연구가 김슬옹 박사가 한글 창제와 보급에 공이 큰 신숙주 선생이 변절자라는 주장은 역사 왜곡이라고 밝히고 있다. ⓒ 신향식


- 신숙주 선생에 관한 재평가가 있어야겠군요.
"맞습니다. 선생이 변절해서 그의 부인 무송 윤씨가 죽으려 했다는 이야기는 우리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명백한 역사 왜곡이기 때문입니다. 왜냐 하면, 단종 복위를 위한 사육신 사건에 따른 사육신이 처형된 사건은 1456년(세조 2년) 6월이었는데 그의 부인은 5개월쯤 전인 1456년 1월에 죽었습니다. 아마도 같은 연도에 두 사건이 일어나다 보니 이야기 만들기 좋아하던 사람들이 이이화 선생의 말처럼 '그의 변절을 미워하는 자들이 날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신숙주 선생과 그의 후손들은 억울하겠네요.
"신숙주 선생이 변절자라는 이야기가 조선 시대에 나온 여러 문집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계속 입에 오르내렸던 듯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박종화는 <목매는 여인>에서, 이광수는<단종애사>에서 무비판적으로 받아씀으로써 왜곡된 역사적 사실이 더욱 널리 퍼지게 됐습니다. 이 모든 왜곡이 '녹두나물'을 '숙주나물'로 바꿔 부르는 데까지 이른 듯합니다. 이는 그의 직계손이 아니더라도 보통 억울한 일이 아닐 겁니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생의 업적과 우리 후손들의 태도를 차분하게 되돌아보는 게 이치에 맞습니다. 한가로이 공부에만 열중하겠다는 의미로 지은 호(보한재)대로 그는 학자로서 관리로서 묵묵히 나라를 위해 일하다 59세 나이로 운명했습니다. 신숙주는 스물두 살 때인 1438년(세종 20)에는 과거시험에 붙어 생원과 진사가 됐고 훈민정음 창제 전인 스물다섯 살 때인 1441년에는 집현전 부수찬을 역임했습니다. 창제하던 해 27살 때인 1443년에는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 변효문 선생의 서장관에 뽑혀 일본에 갔습니다. 신숙주 선생의 업적을 반드시 재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신숙주 #세종대왕 #훈민정음 #보한재 #고령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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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글쓰기 전문가. 스포츠조선에서 체육부 기자 역임. 월간조선, 주간조선, 경향신문 등에 글을 씀. 경희대, 경인교대, 한성대, 서울시립대, 인덕대 등서 강의. 연세대 석사 졸업 때 우수논문상 받은 '신문 글의 구성과 단락전개 연구'가 서울대 국어교재 ‘대학국어’에 모범예문 게재. ‘미국처럼 쓰고 일본처럼 읽어라’ ‘논술신공’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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