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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내내 엎드렸던 이병헌, 그가 눈물을 아낀 이유

[인터뷰] 영화 <남한산성> 최명길을 통해 보인 말의 힘... "그 중요성 항상 느껴"

17.10.05 18:05최종업데이트17.10.0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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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 그가 다시 사극으로 돌아왔다. ⓒ CJ엔터테인먼트


'삼전도의 굴욕', 대외적으론 명청 교체기, 정쟁과 당파싸움의 절정이던 당시 조정의 역사와 외세에게 패배한 역사를 영화로 옮긴 <남한산성>. 김훈 작가의 작품 중 최고라는 평도 있지만 대중을 상대로 한 상업영화에서 굳이 이 소재를 택해야 했던 이유가 여전히 궁금했다.

출연 배우 중 화친파 최명길 역을 맡은 이병헌은 오히려 "큰 고민이 없었다"고 말했다. "치욕의 역사지만 그걸 돌이켜 본다는 차원에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며 그는 "시나리오를 되게 재밌게 봤다"고 출연 계기를 전했다. 영화 내내 그는 왕 인조(박해일)에게 명나라가 아닌 새롭게 패권을 잡은 청나라와 화친을 맺자고 주장한다.

패배의 역사

"승리의 역사라면 참 좋겠지만 그간 그런 영화가 많이 나왔잖나. 내가 말한 재미는 물론 주관적인 거다. 코믹함이나 어떤 스펙터클이 없다고 재미없는 건 아니다. 영화화 하지 않더라도 시나리오 자체가 작품 같다고 생각했다. 한 잡지 기자는 '여태껏 본 시나리오 중 최고라고 책으로 갖고 싶다'더라. 

어떤 멜로 영화보다도 사랑하는 마음이 진짜 강하다고 느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말이다. 그리고 어떤 액션 영화보다도 치열하다고 생각했다. 쉽게 말해 (김상헌) 말싸움이라고 할 수도 그 말들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나. 말 한 마디로 백성의 운명이 갈릴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출연 자체는 큰 고민이 없었지만 정작 연기할 때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계절 배경이 한 겨울이라 강원도 산간에 지은 큰 세트장에서 내내 입김을 내뿜으며 대사를 해야 했고, 왕을 설득하는 신하였기에 전체 촬영 분량 중 상당 부분을 엎드려 있어야 했다. 이병헌은 "한 80프로 정도를 엎드려 있었다"며 당시를 묘사했다.

영화 <남한산성> 속 최명길(이병헌)의 모습. 현장성을 살리기 위해 궁궐 세트장엔 어떤 난방 장치도 돼 있지 않았다. ⓒ CJ엔터테인먼트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더라(웃음). 상대 눈을 보지 않고 땅만 보고 있어야 했기에 상대방의 기운을 읽고 연기를 해야 했다. 그래서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새로운 경험이었다. 상대 눈을 마주치지 않고도 눈을 마주치며 연기할 때보다 더 뜨거운 감정을 토해내야 하니까. 영화 후반부에 왕에게 호통 치는 딱 한 장면에서 눈을 바라보는데 그때도 시선은 허리 쪽에 멈춰 있었다.

그래서 더 예민하게 주변 소리들과 감정들에 더 날이 서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정치적 색깔을 직접적으로 띠고 연기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자기 소신을 주장하는 인물인데 딱히 정치 드라마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이야기가 우선이고 나중에 장르가 붙는 거지."

슬펐던 김윤석과의 맞대결

아무래도 흐름상 그와 정반대 주장, 즉 청나라를 몰아내고 임금의 위상을 떨쳐야 한다고 주장한 김상헌(김윤석)과 가장 많이 부딪힐 수밖에 없다. 정서적으로 부딪히기에 현장에서도 일정 부분 거리를 유지했을 것 같지만 이병헌은 "그 반대"라며 "카메라가 돌면 엄청 근엄하게 하다가도 꺼지면 옹기종기 모여 연극 얘기, 사람 얘기를 이어갔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다만 우리가 감정적으로 세게 부딪히는 장면을 찍는 날은 다들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 긴장했다. 스태프들은 배우들 시야에 안 잡히려고 조심하고, 근데 또 오히려 그게 더 신경 쓰이고(웃음).

지금 생각하면 신하들 대화하는 방식이 특이하잖나. 바로 옆에 있으면서 왕을 쿠션 삼아 말을 던진다. 임금에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신하 둘이 싸우는 거잖나. 특이하지만 묘한 뉘앙스가 있다.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말들의 대결이 그만큼 무겁게 다가온다. 사상이 완벽하게 다른 두 사람이지만 정치가 아닌 장사꾼들이었다면 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거라 상상했다."

ⓒ CJ엔터테인먼트


이어 이병헌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눈물 흘리는 장면을 설명했다. 사실 촬영 때 그는 여러 번 눈물 흘리는 장면을 찍었는데 개봉 버전에선 청나라 왕에게 무릎을 꿇을 때 딱 한 번 눈물을 흘린다. 편집에 대해 그는 "관객 분들이 우는 지점과 다를 수도 있는데 눈물을 강요한다는 느낌을 주면 역효과가 날까봐 감독님과 이야기를 몇 번 했다"며 "눈물 흘리지 않으면서도 서글퍼지는 느낌을 가지려 했다"고 말했다.

"내가 감정적으로 울만한 지점이 몇 번 있었다. 우는 장면도 같이 찍었는데 결국 편집본을 붙이면서 우는 장면을 뒤로 밀었더라. 맞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배우가 계속 쏟아내면 좀 그렇지 않을까? 감정을 꾹꾹 누르며 이어나가다가다 울컥 하고 쏟아내는 포인트가 중요했다."

올바른 정치인의 자세

영화 속 최명길의 고민 지점은 분명했다. 자신은 실리를 내세워 임금에게 화친을 제안하지만 역사적으로 자신은 임금에게 항복을 강요한 역적으로 기록될 여지가 컸다.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그런 내면 고민도 연기로 드러내야 했던 게 이병헌의 숙제였다.

"근데 어떤 정치적 방법론으로 접근했다면 이 영화가 매력적이지 않았을 거다. 방법이 중요한 게 아니잖나. 누가 옳았나를 증명하기 보단 최명길이 가졌던 인본주의를 표현하려 했다. 만백성의 목숨을 대전제로 두고 나머지를 생각하는 느낌으로 말이다. 지금의 정치인들과 반대 느낌이라고? 내가 현실 정치는 잘 모르지만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게 진짜 정치 아닐까. 정치가 있고, 사람이 있는 건 아니니까."

질문을 이어서 그에게 올바른 정치인의 자세를 물었다. 사람보단 당론에 따라 자기 소신도 뒤집는 요즘 정치인들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내가 그런 말을 할 처지는 못 되는 것 같다"며 짐짓 조심하는 태도로 그가 답했다.

"다만 명길 역을 하면서 어떤 걸 느꼈냐면 난 절대로 정치는 못 하겠구나. 자기 안위와 주변 상황을 잘 조율하는 것도 힘든 일반 사람이라면 나와 같을 거다. 정치인은 어떤 주장을 하느냐에 따라 국민의 삶이 바뀐다. 매우 중요한 역할인데 자기 확신이 강하고, 그런 부담을 짊어질 사람이 아닌 난 절대 못할 거 같다." 

"380년 전 역사와 지금의 현실이 맞닿아 있는 것 같다"는 말로 이병헌은 질문에 대한 답을 맺었다. 여기엔 외교적으로 강대국들의 입장을 따져야 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염두에 둔 걸로 해석할 수 있겠다.

묵직한 분위기에 어떤 웃음 코드 또한 없지만 이병헌은 "내 필모그래피에 <남한산성>이 들어간다는 게 뿌듯하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싱글라이더>와 함께 그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이 작품을 꼽을 거 같다"고 덧붙였다.

TV 브라운관에서 이병헌의 연기를 더 자주 접할 수 있게 됐다. ⓒ CJ엔터테인먼트


영화 개봉 이후 그는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등으로 연말을 달릴 예정이다. 약 9년만의 드라마, 그것도 김은숙 작가 작품 출연에 대해 이병헌은 "주변에서 하도 추천했다"고 솔직히 말했다. 소속사 대표 이름을 들며 그는 "대표가 좋아하는 작가가 있으면 어떻게든 연결시켜 주려고 한다"며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작가의 글을 내 입으로 표현해서 시너지 효과가 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아직 대본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이병헌은 "그런 믿음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정"이라 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은 미군 신분으로 조선에서 의병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이병헌은 "지금이 지나면 그런 감수성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며 나름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의 연기를 보다 자주 가까이 볼 수 있게 됐다는 건 팬들에게도 분명 축복일 것이다.

이병헌 남한산성 박해일 김윤석 김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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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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