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미스'라는 장르가 있다, 읽고 나면 기분이 나빠지는

[서평] 중년을 맞이한 사람들의 절망적인 미스터리 <갱년기 소녀>

등록 2017.10.04 18:18수정 2017.10.0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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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다크 초콜릿 상품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일반적인 초콜릿은 보통 단 맛이 나지만, 다크 초콜릿 상품들은 쓴 맛, 정도가 심하면 텁텁한 맛이 났다. 그래서 친구들이 장난으로 다크 초콜릭을 놀이의 벌칙으로 걸었다. 우연히 가위바위보에 져서 먹으면 크레파스를 먹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정신이 혼미해졌다. 달콤한 초콜릿인 줄 알고 먹었다가는 쓴 맛을 보게 되는 음식이었다.

최근에 읽은 미스터리 소설도 굉장히 쓴 맛이 났다. 소녀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 꽃이 그려진 표지를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알고 보니 매우 씁쓸한 책이었다. 일상 속의 소소한 미스터리를 다루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인간의 이기적인 내면을 다루는 작품이었다.


일본에는 '이야미스'라는 장르가 있다.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미스터리 장르다. 일본어의 이야'いや'에 mystery를 합친 단어다. 싫음을 뜻하는 일본어 이야와 미스터리의 미스를 결합했다. 인간의 내면과 정교한 심리 묘사에 치중하여, 읽으면 읽을수록 기분이 불쾌해지고 침전되는 미스터리를 말한다. <고백>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미나토 가나에 등이 이야미스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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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년기 소녀 ⓒ 문학동네

내가 읽은 <갱년기 소녀>라는 작품도 그런 '이야미스'의 하나였다. 이야미스는 귀신이 등장하는 호러, 오컬트 류의 미스터리와도 다르고, 탐정이 범인을 추적하는 추리 소설과도 다르다. 이야미스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더럽고 불쾌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읽는 사람의 정신을 파고든다.

<갱년기 소녀>는 중년을 맞이하고 있는 일본의 갱년기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미스터리 소설이다. 수십 년 전 연재되었던 가상의 만화인 <푸른 눈동자의 잔>이라는 만화의 팬클럽에서 일어나는 기이하고 불쾌한 사건들을 주제로 했다.

작품의 배경은 <푸른 6인회>라는 팬클럽 간부 모임이다. 수십 년 전 연재되었던 인기의 소녀 만화 <푸른 눈동자의 잔>은 가상의 작품으로, 당대 소녀들의 마음을 빼앗은 희대의 소녀 만화다.

귀족의 딸인 잔이 근대의 역사 속 사건들을 경험하며 사랑과 우정을 지켜나간다는 내용의 만화다. 많은 소녀들이 이 작품에 매료되었고,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 열정을 지니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팬클럽을 결성했다. 그 팬클럽의 간사 역할을 하는 간부회가 바로 <푸른 6인회>다.


작품이 오래된 만큼, 소녀 시절부터 작품을 즐겼던 6인은 중년이 되었다. 40, 50대가 되어 아이도 대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었고, 본인도 과거와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푸른 눈동자의 잔>에 대한 열정은 전혀 식지 않았다.

이들은 작품의 방향성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고, 프랑스식 식당에 가서 프랑스식 드레스를 입고 식사하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또한 정기적으로 모여서 그림을 그리고, <푸른 눈동자의 잔>의 등장 인물로 소설을 쓴다. 많은 돈이 들지만, 그들의 노력과 정열은 오랜 세월에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팬클럽 내에서 '미레유', '지젤', '에밀리' 등의 서양식 닉네임을 사용하며 서로를 호칭한다.

"어머." 누군가가 종을 울렸다. 그러자 웨이터가 소리 없이 다가와 아까운 오리고기 조각을 소스와 함께 훔쳐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했다. 마그리트 님, 가브리엘 님, 지젤 님, 미레유 님, 그리고 에미코의 바닷가재를 입으로 가져가는 실비아 님. "어머. 이 바닷가재 진짜 맛있다." 실비아가 입술을 날름 핥았다. 윤기 없는 긴 머리카락 한 올이 입술에 붙어 있었다. 실비아는 머리카락도 혀로 삭삭 훑어서 입안에 집어넣었다. "씹는 맛이 정말 끝내줘." -9P

이런 중년의 독특한 취미 생활을 전개하는 정도에서 이 소설이 전개되었다면, 반드시 기분나쁜 미스터리라고 할 것은 없을 것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즐기고 싶은 취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의 숨겨진 가정사 때문에 이 소설은 처참하게 우울하다. 팬클럽 간부들의 가정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절망적인 현실 위에 자리하고 있다. 가정폭력을 일삼고 아내를 뼈가 으스러지도록 폭행하면서도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 방문을 잠그고 말을 듣지 않으며 저항하는 자녀, 남편과 가정에 모든 흥미를 잃고 갱년기의 불안을 겪는 본인까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들의 팬클럽 활동은 일종의 도피 행위다.

그래도 에미코에게 이 시간은 소중하다. 겨우 찾아낸 평온한 시간, 위안을 주는 한때, 답답한 일상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시간이다. 이 시간을 유지할 수 있다면 살림살이에 빨간불이 들어와도, 아니, 아예 파탄나더라도 상관없다. -11P

무너질 것 같은 가정을 돌보는 일은 고통스럽기만 하고, 중년을 맞이한 자신은 인간관계가 지긋지긋하다.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기존의 인간관계 속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그들은 도피를 위해 팬클럽 활동에 더욱 열중한다. 하지만 그 팬클럽 활동 역시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고 싶은 욕망의 연장선상에 있다.

때문에 팬클럽 활동은 점점 갈등이 심해진다. 중년의 사기와 협잡이 난무한다. 마침내는 회원간의 유혈 사태로 나아가며 모든 이가 폭주한다. 중년의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적인 요소도 있다.

같은 '이야미스' 작가로 분류되는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작품보다 훨씬 더 우울하고 기분이 침전되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을 바닥부터 긁어 내려가는 작가의 묘사는 마음에 들었다. 단, 즐거운 기분을 유지하고 싶다면 읽기 전에 주의하길 바란다.

갱년기 소녀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문학동네, 2017


#갱년기 #중년 #미스터리 #소녀 #팬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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