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셋에 끌려간 소녀, 아흔에 노래로 해방맞이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 음반제작 발표회

등록 2017.08.10 14:27수정 2017.08.10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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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가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14일 음반 발매를 앞두고 음반 <길원옥의 평화> 제작발표회를 하고 있다. ⓒ 이희훈


'전라남도 남원고을 바람났네. 춘향이가 신발 벗어 손에 들고 버선발로 걸어오네.
쥐도 새도 모른 듯이 살짝살짝 걸어오네. 오작교로 광한루로 도령 찾아 헤매 도네.
남원에 봄 사건 났네.' (노래 '남원의 봄 사건' 중에서)

열세 살, 노래를 좋아하던 소녀는 돈을 벌 수 있다는 일본군 말을 믿었다. 평양에서 출발해 중국 하얼빈 위안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1940년부터 4년이 넘게 위안부 생활을 했다. 소녀 나이 열일 곱, 대한민국이 해방을 맞고서야 위안소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위안부였던 사실을 숨겼던 소녀는 아흔 살이 되어서야 마음껏 노래를 부르며 음반을 냈다.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가 음반 제작 발표회를 열었다. 길 할머니는 늘 노래를 흥얼거렸다. '남원의 봄 사건', '한 많은 대동강', '아리랑', '눈물 젖은 두만강'을 즐겨 불렀지만 혼자 있을 때만 부르던 노래였다.

"그냥 집에서 혼자 있으면 괜히 내가 좋아하니까. 나 혼자 노래했지요. 노래하는 게 직업이야요."

노래하고 춤을 추면 다른 사람들이 수군덕거리는 것 같아 방 안에서만 부르며 노래를 숨겼다. 노래를 부를 때 길원옥 할머니는 4년 넘게 위안부 생활을 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병들어 있던 몸과 마음, 가족이 있는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한 한을 노래에 실어 달랬다. 아들을 입양해 그 아들을 목회자로 키워내며 흥얼거린 노래다.

할머니의 노래 창고를 알아본 건 윤미향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공동대표였다.

"가장 좋아하는 걸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어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이 아닌 노래를 좋아하는 길원옥이 마음껏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요. 할머니가 잘하는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있게 하는 게 길원옥이라는 여성의 해방이 아닐까 싶어요."

노래 앞에서 수줍은 소녀가 되는 길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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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가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14일 음반 발매를 앞두고 음반 <길원옥의 평화> 제작발표회를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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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가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14일 음반 발매를 앞두고 음반 <길원옥의 평화> 제작발표회를 하고 있다. ⓒ 이희훈


지난해부터 할머니는 말수가 부쩍 줄었다. 치매 증상이 나타났다. 주위 사람들도 마음이 급해졌다. 장상욱 휴매니지먼트 대표와 윤민석 음악감독이 음반 제작에 뜻을 모았다. 장 대표는 "할머니 꿈이 가수였고 사람들은 모두 그 꿈을 이룰 때 가장 행복해한다"며 "더 늦기 전에 할머니의 꿈과 목소리를 담으려 했다. 할머니가 행복하면 우리가 모두 행복해질 것 같았다"고 말했다.

손자 손녀의 재롱잔치처럼 할머니 곁에서 목소리를 더해줄 사람들도 나타났다. 청년 10명이 이번 음반에 코러스로 참여해 7곡을 녹음했다. 코러스로 참여한 김재원씨는 "할머니가 오랜 시간 가져왔던 꿈이 이뤄지는 자리라 참여했다"며 "할머니가 인권운동가로 또 개인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해 9월에 시작한 음반 녹음이 올해가 되어 마무리됐다. 음반의 마지막 수록곡은 '바위처럼'으로 정해졌다.

"나 별로 노래 잘하지 못하는데 가수 길원옥이라고 하면 부끄럽지요. 90살 먹은 늙은이가 아무 때나 노래한다고 주책 떠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한데, 노래가 참 좋아요. 고저 평안하게 안녕히들 돌아가시라요."

노래 앞에서 수줍은 소녀가 되는 길 할머니의 음반에 '길원옥의 평화'라는 이름이 붙었다. 음반은 오는 14일,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에 2000장 한정판으로 발매된다. 음반이 나오는 당일엔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기림일 문화제가 열린다. 이날 할머니는 신인가수로 첫 콘서트 무대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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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이희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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