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도 내 방은 36도"... 청년예술가의 서울살이

반지하에서 옥탑방까지 10년... 내가 참고 또 참으며 사는 이유

등록 2017.08.12 15:57수정 2017.08.1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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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동옥탑방.36도 2017년 여름 실내온도 36도를 기록하고 있는 보일러 ⓒ 유최늘샘


2017년 여름, 야근을 마치고 만리동고개 옥탑 찜통으로 돌아오면 보일러의 실내온도는 36℃를 기록하고 있다. 그날그날의 최고기온이 내가 사는 옥탑방에서는 한밤중까지 유지된다. 동틀 녘이 되면 겨우 1, 2℃ 떨어졌다가 해가 뜨면 이윽고 온도는 상승한다.

에어컨을 설치하기도 마땅찮은 좁은 3층 주택의 옥탑이고 에어컨 전기세를 감당할 돈도 없다. 찬물을 둘러쓴 뒤 선풍기를 강풍으로 틀고 잠자리에 든다. 곧 다시 땀이 흐른다. 식을 줄 모르는 열기에 화끈거리는 나는 찜통에 든 순대가 된 기분이다.

직장 동료들과 점심 도시락을 먹던 중 더위와 집 얘기가 나왔다. 청년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된 비영리민간단체(NPO) '민달팽이유니온'에서 만든 민달팽이협동조합 주택에 사는 동료가 말하길, 서울시 청년 1인가구 중 40% 이상이 옥탑방, 지하방, 고시원 등 취약한 주거지에 산다고 했다.

"그런 곳들은 사람이 살 집이 아니에요. 없어져야 해요! 민달팽이집으로 오세요."


동료는 '주거권'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런데, 저는 계속 그런 곳에서만 살아왔는데요?!"

열아홉 살에 상경해 16년째, 고시원과 반지하방을 거쳐 옥탑방에 살고 있는 나는,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는 동료의 말에 조금은 마음이 시렸다.  

저는 계속 그런 곳에서만 살아왔는데요?!


처음에 자리잡은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 17만 원짜리 '우리고시원' 내 방은 창문이 없고 복도 끝에 있어서 밤과 낮을 구별할 수 없었다. 1년 후 롯데리아, 텔레마케터 등 아르바이트에 익숙해지고 고정적인 수입이 생긴 나는 1만 원 더 비싼 청원고시원으로 이사했다. 의자를 책상 위로 올려야 잠자리를 펼 수 있는 좁은 방이었지만 작으나마 창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벅찬 행복을 느꼈다.  

2007년 여동생이 상경했고, 둘이 고시원에 살면서 월세를 내느니 어떻게든 방을 찾아보기로 했다. 각각 오백만 원씩을 보탠 천만 원으로 구할 수 있는 전셋방은 반지하방밖에 없었다. 어두침침한 공동화장실을 써야 했고 여름이면 곰팡이가 난무했지만, 합판으로 둘러싸인 한 평 남짓 고시원 쪽방보다는 나았고, 월세가 굳으니 학비와 생활비를 좀더 모을 수 있었다. 그 반지하방에 살면서 겨우겨우 대학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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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동 고시원 오류동 고시원.의자를 책상 위에 놓아야 누울 수 있는 작은 쪽방. ⓒ 유최늘샘


나의 첫 직장은 어릴 때부터 꿈꾸던 영화계, 그러나 '충무로' 영화판이 아닌 독립영화계, 2007년 문을 연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였다. 수습기간 3개월 이후 첫 월급은 80만 원 남짓이었다.

정권 교체와 지원사업 중단으로 극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2년 2개월을 일하고 이후에는 다시 대학 시절처럼 건설노동과 설문조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노동의 와중에도 틈틈이 <편의점 야간 파트타미어의 고통><32.5공수, 건설노동자의 날품><서울의 예수, 강변의 누이> 등의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고정적인 돈벌이가 없어 불안한 상황이었지만 월세가 없었기에 조금씩은 돈을 모을 수 있었고, 늦깎이지만 드디어 또 다른 꿈이던 여행을 할 수 있게 됐다. 2011년 남한을 여행하며 108명의 인터뷰를 담은 <남한기행 - 삶의 사람들>을 만들고, 2012년부터 10개월 동안 중국부터 인도까지 아시아 8개국에서 만난 여행자와 현지인들의 삶을 담은 <늘샘천축국뎐>을 만들었다. 나의 길을 찾기 위해 나는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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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야간 파트타이머의 고통 <편의점 야간 파트타이머의 고통>, 2008, 단편다큐멘터리, 유최늘샘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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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공수,건설노동자의날품 <32.5공수, 건설노동자의 날품>, 2012, 단편다큐멘터리, 유최늘샘 ⓒ 최늘샘


내 나름의 구도(求道)여행이요 탁발(托鉢)여행이었던 '천축국'(天竺國, 중국에서 인도를 부르던 옛말) 여행을 다녀온 뒤, 다시 별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반지하를 벗어났다. 그러나 서울에서 2500만 원으로 구할 수 있는 반지하가 아닌 전셋방은, 옥탑방 밖에 없었다.

"반지하방에서 옥탑방까지 오는데 10년이 걸렸네."
"다 큰 오누이가 단칸방 쓰는 것도 힘들고, 할만큼 했으니, 다음 번에는 방 두 칸짜리 집으로 가든지 각자 집을 구할 방법을 찾자, 부디..."
 

이사하던 날 동생과 나는 그런 말들을 하며 웃었고, 또 슬펐다.

만리동 옥탑방에서 네 번째 여름을 나는 중이다. 옥탑방은 무척 덥고, 비가 좀 새고, 혹한기엔 보일러가 얼지만 곰팡이가 많이 스는 반지하방보다는 낫다. 열악해도 지금의 나에게는 이곳이 최선이다.

좋아서 이곳에 사는 것이 아니다. 벗어날 수 없어서 참는 것이다. 취약한 주거지에 산다는 1인가구 중 40퍼센트의 다른 청년들에게도, 각각의 작은 방들은 소중하고 절실한 최선의 공간일 것이다. 또한 그곳은 언젠가는 반드시 벗어나고 싶은 슬픔의 공간이며 행복이 유보된, 가난의 굴레일 것이다.

주거협동조합에 사는 동료의 말대로, 열악한 주거지들이 개선되고 언젠가는 없어지길 바란다. 튼튼하고 아늑한, '살 만한' 공간에서 사는 것이,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해방'의 날이 올 수 있을까.   

만리재로를 따라 서울역 주변을 지날 때마다 수많은 노숙인들을 마주친다. '사람중심 도시재생 - 서울로7017'라는 이름으로 2017년 5월 20일 서울역고가가 공원화되었지만 서울역 노숙인들의 삶은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안타깝고 슬프고, 사회의 빈부격차에 분노를 느낀다.

한편으로 나에게는 비와 위험을 막아줄 지붕과 벽이, 작으나마 나만의 공간이 있음이 감사하다. 타인의 불행과 아픔의 상황을 보고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는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서울역은 '사람중심' 공간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사회의 균열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집이 없는 노숙인들이 튼튼하고 아늑한, 살 만한 공간에서 잠들고,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헌법은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제35조 3항)고 규정하고 있다. 같은 해 발표된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은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적합한 생활 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제25조 1항)는 내용을 담고 있다. 헌법과 선언이 문장과 구호로 그치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옥탑방의 열기를 참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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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샘천축국뎐.바라나시의 여행자와 현지인들 늘샘천축국뎐.바라나시의 여행자와 현지인들 ⓒ 유최늘샘


서울의 고시원과 반지하와 옥탑방에서 살아오는 동안, 스무 가지가 넘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몇 번의 입사와 퇴사를 했으며, 일곱 편의 단편영화와 네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들은 가까스로 몇 개의 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되었지만 개봉은 하지 못했고, 생계에도 거의 보탬이 되지 못했다. 다섯 살 때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고, 열네 살때부터 포기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그걸로 돈벌이를 해서 먹고 살기란 불가능했다.

먹고 살기 위해 영화가 아닌 일들을 했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를 거쳐 지금은 네 번째 직장인 청년활동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이왕 하는 일이라면 새롭고 재미있는 일을 선택하고 싶었다.

취직한 지 10개월 째, 더위 때문인지 요즘은 유난히 일이 버겁다. 퇴근 이후나, 주말에는 하고 싶은 창작을 하자고 늘상 다짐하는데, 일과 창작을 모두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산재보험공사에 다니며 밤마다 글을 썼다는 프라하의 소설가 카프카를 떠올려 본다. 어떤 생활 환경 속에서도 끝내 창작의 끈을 놓고 싶지는 않다. 

직장 동료들은 나의 옥탑방 생활을 걱정해 준다. 월세를 내더라도 좀더 편안한 집에 사는 게 낫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다. 마음이 고맙다. 하지만 열아홉 살 때 꼬박꼬박 내야 했던 고시원 월세 17만 원도 나에겐 큰 부담이었다.

월세로 사는 동료들은 대략 20만 원에서 40만 원 정도의 비용을 매월 지불한다. 전자 도어락이 있고 에어컨이 있는 방들이다. 아주 더울 때는 가끔 부럽기도 하지만, 주거의 편리보다는 월세로부터의 자유,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택하고 싶다.

어느 날 다가올 실직 혹은 사직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또한 어느 날 끝내 다시 찾아올 다음 영화의 제작비를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떠날 세계여행을 위해서도 지금은 옥탑방의 열기를 참으려 한다.

단 한번의 삶, 오래 아등바등 참지 말고 용기를 낼 일이다. 막막하고 밋밋해도 어떻게든 행복과 자유를 향해,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영원으로 펼쳐진 나의 길을 찾기 위해, 나는 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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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샘천축국뎐 <늘샘천축국뎐>, 2014, 여행다큐멘터리 ⓒ 최늘샘


#주거권 #청년예술가 #독립영화 #취약주거 #청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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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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