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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로맨틱하면서도 지적인 배우, 만난 것 자체가 '행운'

[<재꽃> 박석영 감독이 말하는 나의 아름다운 배우들②] '진경' 박현영과 '철기' 김태희

17.07.13 17:24최종업데이트17.07.1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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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영 <재꽃> 감독이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보내왔습니다. 그가 필름에 채 담지 못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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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누군가의 첫사랑일지 모를 그리운 이름들에 대하여

시나리오 속 진경은

"저는 박현영씨가 멜로드라마적인 인물을 연기하는 장면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눈 먼 결정을 내리는, 그러나 결국 후회하고야 마는 그런 인물을요." ⓒ 딥포커스


진경은 하담과 해별과 함께 외지인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현대인의 딜레마, 즉 꿈과 현실의 괴리, 바라는 것과 현재 처지와의 괴리감이 매우 큰 인물이며, 이미 인생의 많은 부분에 실망한 30대 중반의 여성이기도 합니다. 

진경의 과거를 떠올려 봅니다. 그녀는 오랜 시간동안 도시에서 부동산을 전전하며 스스로는 소박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꿈을 꾸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실패했고, 그 이후 작은 농촌의 읍내에서 정착해 살고 있는, 불안과 욕망이 혼재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진경은 어쩌면 가장 모던한 인물이었고, 정서적으로는 도시에서 제가 느끼는 '끊임없이 떠돌고 있다'는 공포를 내밀하게 담아내야 하는 역할이었습니다. 또한 저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었기에, 저는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마음 깊게 다가왔습니다.

배우 박현영의 캐스팅 과정은   

박현영 배우는 <살인의 추억>과 <강원도의 힘>에서 매우 현재적인 인물들을 유연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 신수원 감독님의 <레인보우>에서 그는 철없는 어머니의 역할을 마음 저리게 표현해 냈습니다. 그래서 꼭 함께 작업하고 싶었기에, 작년 초여름에 부탁을 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박현영씨가 멜로드라마적인 인물을 연기하는 장면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눈 먼 결정을 내리는, 그러나 결국 후회하고야 마는 그런 인물을요. 또 박현영 배우는 단편을 연출한 특별한 연출자이기도합니다. 그래서 더 함께하기로 하면서 정말 많은 의지가 됐습니다. 연기에 대한 많은 고민들과 더불어 영화라는 일에 대한 고민까지 많은 대화들을 나눌 수 있어서 더 기뻤고요.

영화 안팎의 진경에 대하여

"저는 현영씨가 연기자로서 보여준 어떤 순간을 기억합니다. 마당의 난장 장면에서, 그러니까 두 남자의 악다구니 앞에서 진경은 하담과 해별을 발견한 뒤 결국 카메라에서 등을 지고 맙니다. 어른으로서 차마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거죠. 저는 그것이 연기자로서 매우 숭고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딥포커스


저 같은 경우, 영화를 준비할 때 배우와 인물을 매우 혼동하는 편입니다. 사실 좋지 않은 습관이죠. 인간으로서 배우와 역할로서의 배우를 혼동한다는 것은요. 하지만 박현영이란 배우와 작업하면서, 배우가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같이 상상하고 그 인물의 전사를 함께 찾아내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한 배우가 매우 지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인물을 내재화하는 모습을요. 그 과정 속에서, 모든 배우들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인물의 성격을 찾아간다는 사실을 감독인 제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현영씨는 진경이란 인물의 디테일한 전사를 고민했고, 어쩌면 진경이 그 이전의 몇 번의 연애의 실패와 기대에 대한 경험들이 있었을 것이란 상상을 해냈습니다. 그 안에서 진경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순박한 시골 남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스스로 찾아나간 거죠. 

또 현영씨는 진경이란 인물이 너무나 가족을 이루고 싶다, 철기의 가족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스스로 찾아내고 그 마음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건 진경이 철기를 사랑해서만은 아니라는 현영씨의 해석이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진경은 이제는 정착하고 싶고, 그래서 철기와 삼순의 안마당에 살아 보고 싶었던 거죠. 저는 그런 지침과 피로함이 진경의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내면이란 사실을 현영씨와의 수많은 대화를 통해서 깨우치게 됐습니다.

아울러 영화에서 쓰지 못한 장면이지만, 진경이 안경원에서 10여 분 동안 삼순의 안경을 고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박현영 배우는 진경이 하나하나 안경을 고르면서 보여주는 주저를 사랑받고 싶은 어떤 애정으로 표현했습니다. 제가 시나리오에 들었던 외부자로서의 쓸쓸함이 배우의 연기를 통해 사랑받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승화되는 것을 보면서, 솔직히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박현영이라는 배우에 대하여

배우는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이해를 온몸으로 표현해내야 하는 배우라는 직업이라는 측면에서, 배우가 카메라에 뒷모습을 보여주는 일은 매우 주체적이고 놀라운 결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현영씨가 연기자로서 보여준 어떤 순간을 기억합니다. 마당의 난장 장면에서, 그러니까 두 남자의 악다구니 앞에서 진경은 하담과 해별을 발견한 뒤 결국 카메라에서 등을 지고 맙니다. 어른으로서 차마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거죠. 저는 그것이 연기자로서 매우 숭고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저의 '디렉션'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배우로서 감성뿐 아니라 지성을 다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이 자리에서 더 저 두 소녀를 바라보면 안 되겠다, 그런 심정으로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등을 보여준 거죠. 그렇게 한없이 로맨틱하면서도 지적인, 제게 매우 특별한 경험을 선사해 준 박현영 배우, 감사합니다.

시나리오 속 철기는

"철기라는 인물의 모티브는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빌리 역할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그저 모두의 행복을 바라며 스스로 갇힌 채 그 자리에 멈춰 선 청춘이기도 합니다." ⓒ 딥포커스


철기라는 인물의 모티브는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빌리 역할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그저 모두의 행복을 바라며 스스로 갇힌 채 그 자리에 멈춰 선 청춘이기도 합니다. 마치 우리 부모 세대처럼, 내면의 모든 질문과 고통을 감춘 채 인내하는, 우리 주변에 많지만, 눈에는 잘 보이진 않는 남자의 모습을 담아내고 싶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전봇대에 붙어 있는 만년필로 정성 들여 쓴 전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50대 남자, 신체 건강하고, 집을 한 채 가지고 있고, 같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자신의 핸드폰 연락처를 적어 놓았던 전단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그 글귀들을 보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서늘해졌습니다.

철기도 그런 사람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누구에게 한 번도 자기변명을 해 본 적이 없는 남자, 그 누구에게 한 번도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해 본 적이 없는 남자.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만 가족을 지탱할 수 있다고 믿은 채로 살아왔던 너무나 답답한 사람.

배우 김태희의 캐스팅 과정은

언젠가 대학로에서 연극 연출을 하는 태희씨의 공연을 보러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 연극은 '전태일'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태희씨가 전태일을 연기했고, 연출까지 도맡았습니다. 연극 속 전태일은 너무나 선한 마음으로 여공들을 감싸며, 모든 책임을 감당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 전태일을 연기하는 김태희 배우의 연기는 감동이었습니다.

그에 앞서, 김태희 배우님은 처음 백재호 감독의 <그들이 죽었다> 속 연기자로 만났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상영됐던 이 작품은 청춘들의 혼란과 희망을 우아하게 직조한 자화상 같은 독립영화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멋진 그(감독과 배우)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고, 이런저런 기회를 거치며 배우 김태희를 자주 만나게 되면서 그의 근본적인 성실함에 매혹됐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1년이란 시간 동안 깊은 토론을 거치며, 함께 철기라는 인물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영화 안팎의 철기에 대하여

김태희란 배우를 보면서, '최선을 다한다', '성실하다' 이런 수사들의 기준이 참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들과의 비교가 아니라 자신의 기준과 늘 싸워가는 모습 때문에 그렇습니다. 연기자들은 역할을 위해 어떤 준비까지 했는가에 대해서 자랑삼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기억으로 태희씨는 그런 말을 쉽게 던지지 않습니다.

실은 태희씨는 <재꽃> 촬영을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삼순의 집을 함께 만들었고, 함께 생활했습니다. 또한, 역할을 위해 트럭 운전을 배우고 직접 음료 박스들을 배달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실함은 그런 외양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에겐 캐릭터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준비하고 집중하는 열정적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또 저는 태희씨가 연기하는 매 순간, 철기라는 특정 인물을 연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 군상들의 어떤 집합체를 연기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이 들기도 했습니다. 훗날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태희 배우는 자신을 연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수많은 철기를 기억해내며 연기했다고 합니다.

그가 주변에서 본, 어쩌면 세상의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서 삶의 몫을 묵묵히 감당하면서도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수많은 철기. 타인들과 조화를 이루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철기들, 그 인물들 안에 잠재된 어떤 '깊은 균열'을 김태희 배우가 찾아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다시, 김태희라는 배우에 대하여

"영화의 마지막, 삼순 집에서의 난장 시퀀스에서 김태희 배우가 가슴을 치며 펼쳐낸 연기는 어떤 즉흥이나 애드립, 순간적인 제안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김태희라는 배우가 1년에 걸쳐 고민해낸 결과물입니다." ⓒ 딥포커스


영화의 마지막인 삼순 집에서의 난장 시퀀스에서 김태희 배우가 가슴을 치며 펼쳐낸 연기는 어떤 즉흥이나 애드리브, 순간적인 제안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김태희라는 배우가 1년에 걸쳐 고민해낸 결과물입니다. 그 장면은 수많은 철기의 갑갑함을 뜯어내듯 표현해낸 이 배우의 연기와 그 순수한 에너지를 통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토속적인 이미지로 인해, 동일한 이름을 가진 한 배우로 인해 김태희란 배우를 진지한 예술가로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편견을 가지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지금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제가 느낀 김태희 배우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깊은 연민을 가진, 스스로 감당 못 할 정도로 그 연민을 채워 넣는 좋은 사람, 좋은 배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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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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