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기밀누설 사건, '당당한' 여운형의 해명

4월 13일 임시의정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선포

등록 2017.04.13 10:43수정 2017.04.1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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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의 임시정부 청사. 서울시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 옆에 있는 경교장에서 찍은 사진. 경교장은 백범 김구가 해방 이후에 살았던 곳. ⓒ 김종성


1919년 4월 13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 대외적으로 선포된 날이다. 임시정부가 내부적으로 수립된 날은 이틀 전인 4월 11일이다. 4월 11일 오전 10시, 임시정부 구성을 위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폐막됐다. 4월 13일은 임시의정원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이 대외적으로 선포된 날이다.

바로 그 임시의정원에서 6년 뒤 기밀누설 사건이 발생했다. 1925년 8월이었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가 발칵 뒤집혔다.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의 동포들은 "의정원 안에 밀정이 있다"며 발끈했다.

1919년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무책임과 구성원들 간의 분열로 인해 얼마 못 가서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임시정부를 개혁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새로 만들자는 창조파의 대립이 일어났다.

이런 분열상이 수습될 기미를 보이며 임시의정원이 개편된 때가 바로 1925년 8월이다. 이때 이동녕이 의장이 되고 김창숙이 부의장이 되었다. 선비 출신인 김창숙은 1951년경에 자서전 <벽옹 73년 회상기>에서 "각계 인사들이 모두 호응하며 대동 통일의 희망이 있게 되었다"며 1925년 8월 당시의 분위기를 소개했다.

벽옹(躄翁)은 앉은뱅이 노인이란 뜻이다. 김창숙은 1927년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된 뒤 태도가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래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이 때문에 스스로를 벽옹이라 부른 것이다.

그렇게 임시정부를 되살려보자며 개회한 1925년 8월의 의정원 회의 내용이 외부에 누설됐던 것이다. 극비리에 진행한 회의의 내용이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일본인 신문에 세세히 보도됐다. 비밀 회의록에 적힌 내용이 일본인 신문에 공개적으로 보도됐으니, 임시정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의정원 안에 밀정이 있을 거라며 분개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누가 비밀누설의 장본인인가를 놓고 의정원에서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 지목된 사람은 열혈 독립투사 여운형이었다. 훗날 해방 직후부터 미군정 개시 직전까지 3주간 국내 치안을 담당하게 될 여운형이 장본인으로 지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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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의 몽양 여운형 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의 신원역 뒤편에 있다.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주말에는 자전거를 타고 남한강변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 김종성


무명인사였던 여운형, 그의 인생을 바꾼 사건

여운형은 서른세 살 때인 1918년까지만 해도 무명 인사였다. 공식적인 신분은 중국 유학생이었다. 그랬던 그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있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이 바로 그것이었다.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여운형은 이것이 조만간 한국 독립운동에 영향을 줄 것을 직감했다. 본래 그는 판단력이 빠른 사람이었다.

여운형은 곧바로 행동에 착수했다. 나이도 젊고 조직도 없고 유명세도 없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목적으로, 당시의 터키 영웅인 케말 파샤의 터키 청년당을 모방해서 신한청년당을 급조했다. 그리고 제1차 대전을 수습할 목적으로 열리는 파리 평화회의에 신한청년당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다. 한국의 독립을 호소할 목적이었다. 때마침 3·1운동이 터지고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김규식은 임시정부 대표 자격으로 파리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임시정부가 김규식을 대표로 추인함에 따라, 이 일을 주도한 청년 여운형의 위상도 급격히 높아지게 되었다. 제1차 대전 이후의 정세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한 결과로 그는 1919년 한 해 동안에 국제적인 인물로 급부상했다. 임시정부 안에서도 임시의정원 의원 겸 외무차장의 위치를 차지했다.

일본 정부도 여운형에게 주목했다. 3·1운동 뒤에 한국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일본은 청년 지도자 여운형을 국빈급으로 도쿄에 초청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청년 독립운동가를 도쿄에 초빙해서 환대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일본의 포용력을 과시하는 것이 그 의도였다.

임시정부는 여운형의 방일을 반대했다. 임정 간부가 적지인 일본에 발을 디디면 곧바로 체포될 수 있다는 점, 일본에서 신변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잘못하면 이용당할 위험성이 크다는 점 등이 이유였다.

여운형은 용감하고 대담했다. 그런 위험성에 개의치 않았다. 여운형이 말을 안 듣자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 포고를 내려 '여운형의 방일은 위험하니 중단하라'는 뜻을 공표했다. 이것이 임시정부 국무총리 포고 제1호였다.

하지만 여운형은 방일을 강행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도쿄에서 일본 각료들을 만난 그는 "일본은 지금 만용을 부리고 있다"며 "일본이 3·1운동을 진압한 것은, 타이타닉호가 빙산을 무시하고 항해하다가 침몰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자초하는 일"이라면서 면전에서 경고를 날렸다.

여운형은 타고난 웅변가였다. 그의 웅변은 호쾌하고 강연 내용도 감동적이었다.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열린 강연에서도 그랬다. 그의 웅변이 어찌나 감동적이었던지, 강연이 끝나마자 일본인 청중 몇몇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일까지 있었다.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연설에 푹 빠진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여운형의 방문으로 일본의 포용력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도쿄 한복판에서 "대한독립 만세!"가 나오게 되자 일본 신문들은 이 일을 대서특필했다. 그러자 일본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일본인들은 하라 다카시 총리가 이끄는 내각을 맹렬히 비판했다. "내각은 대체 뭐하는 곳이냐!", "이 내각이 여운형 내각이냐?" 등등의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매서운 비판을 이기지 못하고 하라 총리는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재실시해야 했다. 일본의 포용력을 보여주겠다며 여운형을 국빈급으로 초청한 하라 내각이 국회를 해산해야 하는 정치적 위기로까지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임시정부의 태도도 싹 바뀌었다.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은 "독립운동사에서 유례없는 성과"라며 여운형을 극찬했다. 이때가 1920년이다. 여운형이 35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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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제국호텔의 옛날 모습. ⓒ 위키백과 일본어판(퍼블릭 도메인)


독립운동으로 두 차례 투옥

이랬던 여운형이 5년 뒤 임시의정원 비밀회의 내용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의심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대책수립을 위한 임시의정원 특별 회의에서 부의장 김창숙은 여운형을 장본인으로 지목했다. 여운형이 평소에 아오키라는 일본 밀정과 접촉한 사실이 그 근거였다. 이에 따라 국무총리 대리 김구(50세)가 여운형(40세)을 불러 조사를 진행했다. <벽옹 73년 회상기>에 수록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구: 당신은 아오키가 일본 정부의 밀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여운형: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김: 알면서 만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여: 저는 그자를 통해 일본 정부의 정보를 얻으려고 한 겁니다.
김: (웃으며) 당신이 아오키를 매수하려 했던 말입니까? 내 생각에는 당신이 매수된 것 같은데.

일본 밀정한테서 정보를 캐낼 목적으로 의정원 회의 내용을 알려줬다는 것이 여운형의 해명이었다. 일종의 정보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의정원에서는 여운형의 해명을 받아주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적들과도 과감하게 손을 잡는 그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의정원은 공개회의에서 여운형의 조심성 없는 태도를 견책하면서 "다시는 그러지 마시오"라는 경고를 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1936년 8월 10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을 보도할 때,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삭제한 최초의 신문은 조선중앙일보였다. 조선중앙일보는 지금의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와는 무관하다. 조선중앙일보는 8월 13일자 신문에서 일장기를 삭제했고, 동아일보는 8월 25일자 신문에서 일장기를 삭제했다.

그때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사람이 바로 여운형이다. 여운형은 이 사건 때문에 사장직에서 해임됐다. 또 그는 독립운동 때문에 1929년과 1942년에 두 차례 투옥됐다. 이처럼 1925년 임시의정원 사건 이후로도 그는 독립운동 노선에서 이탈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뛰어갔다. 이런 인생 행보를 보더라도 1925년 당시의 해명은 믿을 만한 것이었다.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여운형 #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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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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