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피고인 된 김기춘 "나는 정치적 희생양"

[블랙리스트 1차 공판] 증인 나온 유진룡과 신경전... 조윤선 "깊은 오해 쌓여"

등록 2017.04.06 18:00수정 2017.04.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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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인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왼쪽)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수십 년 동안 법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하며 권력을 누려온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6일 드디어 피고인석에 섰다.

이날 오전 10시, 회색라운드티셔츠에 검은색 재킷을 입은 김 전 실장이 417호 법정에서 열린 1차 공판(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0부·부장판사 황병헌)에 나타났다. 검은 뿔테안경이 걸린 귓가 주변에는 희끗희끗한 머리들이 무성했다. 다소 야윈 얼굴의 김 전 실장은 어딘가 불편한 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피고인석으로 향했다. 재판장 황병헌 부장판사는 인정심문(피고인의 생년월일, 직업, 주소 등을 확인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김기춘 피고인, 생년월일이 어떻게 됩니까?"
"네, 1939년... (재판장이 직업을 묻자) 무직입니다."

목소리는 담담했다. 자신의 직권을 남용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지원배제명단)'을 작성했다는 혐의 등을 두고도 당당했다. 김 전 실장과 변호인들은 자신들의 행위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처벌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철저히 법리에 입각한, '법꾸라지'란 별명다운 주장이었다.

법꾸라지의 반격

김 전 실장은 ▲ 박근혜 전 대통령·최순실씨와 공모해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을 지시하고, ▲ 여기에 반대하는 문화체육관광부 1급 공무원들의 사직을 강요했으며, ▲ 국회 청문회에서 관련 내용을 두고 위증한 혐의를 받고 있다. 변호인 이상원 변호사는 이 공소사실을 두고 특검이 공모관계를 특정하지 못했으며 정부 정책 시행을 두고 범죄조직에서 하부 조직원들의 행위를 윗사람이 책임지라고 하듯 법리를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고 반박했다.

또 강요죄가 성립하려면 폭행이나 협박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 증거가 없다고 했다. 이 변호사는 위증죄 역시 '고의로 거짓을 말했다'는 구성요건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김 전 실장은 "그런 기억이 없다, 제가 민정수석에게 지시한 것 같지 않다"고 답한 만큼 거짓을 말했다고 보기 어렵고 설령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일주일에 세 번씩 개최한 회의에서 발언한 내용을 모두 기억해야 하냐"는 얘기였다.


김 전 실장 쪽은 거듭 '블랙리스트는 문화예술정책의 하나'라고도 강조했다. 이 변호사는 "김기춘 피고인이 (정부의 세월호 참사 대응 등을 비판한) <세월오월> 같은 작품을 갖고 '왜 이거 창작했냐, 잡아넣어'라고 한 게 아니라 굳이 정부가 지원할 필요가 있냐는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했다. 정부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작품활동을 걸러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변호사는 또 "이것이 위법하고 형사소추까지 할 사안인지 의문"이라며 "피고인은 근거 없는 여론 재판과 그를 구속시켜야 이득을 볼 수 있는 세력을 위한 희생양"이라고 했다.

유진룡 "박근혜, 김기춘 무한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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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룡 "블랙리스트는 정권반대자 차별과 배제 위한 것"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실체를 폭로한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월 23일 오후 서울 강남구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수사를 하고 있는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에서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들어서며 취재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유성호


이 논리는 오후 증인 신문에서도 변함없었다. 김 전 실장 쪽은 6일 증인으로 나온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에게 '김기춘 전 실장이 블랙리스트나 문체부 인사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뭐냐, 본인의 추측인 것 아니냐'고 캐물었다. 이 과정에서 이용복 특검보는 변호인의 질문이 장황해 증인이 답변하기 어렵다고 지적했고, 이상원 변호사는 "증인이 그런 분인지 몰랐다, 이해할 줄 알았다"고 받아쳤다. 참다못한 유진룡 전 장관이 "IQ 테스트하냐, 모욕적인 발언"이라며 사과를 요구하자 결국 재판부가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변호인단의 공격에도 유 전 장관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모철민 당시 교육문화수석이 '대통령 비서실장 지시'라며 수시로 영화 <변호인>이라든가 어떤 문화예술활동을 두고 '이건 왜 (보조금을) 줬느냐 등등 참견했다"며 "실·국장들에게 모 전 수석 지시를 따르지 말라고 했더니 수시로 싸움이 벌어져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고 했다. 유 전 장관은 이 내용을 보고한다고 하면 김 전 실장이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른 내용을 보고사안으로 정했다고 덧붙였다.  

특검은 그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 지시 없이 김 전 실장 혼자 블랙리스트를 만들었겠냐'고 둘의 공모 가능성을 묻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유 전 실장은 퇴임 직전인 2014년 7월 9일, 박 전 대통령과 독대한 얘기를 꺼내며 에둘러 답했다.

"인사나 블랙리스트 문제 등을 두고 김 전 실장이 호가호위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미동도 없이 듣다가 마지막에 한 말씀 했다. '(김 전 실장이) 우리가 모르는 걸 알고 계신 부분이 있을 것이다. 김기춘 피고인을 무한신뢰하는 표현이었다."

"깊은 오해"라는 조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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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 등 문화계 시민단체 회원들이 3월 7일 오전 서울 서초구 국정원 정문 앞에서 블랙리스트작성 국가정보원 고발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한편 블랙리스트사건의 또 다른 주역,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도 자신의 처지를 두고 "몇 가지 오해가 겹쳤다"고 했다.

그의 변호인 김상준 변호사는 "피고인은 6년 전 한 인터뷰에서 '정권마다 문화예술계를 편가르기식 지원하는 모습이 가장 안타까웠다'고 한 것과 생각이 다르지 않다"며 "그럼에도 왜 이런 일에 관여했다고 오해받았는지는 차근차근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또 조 전 장관 역시 여론의 희생양이라고 했다. "직권남용죄는 누군가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국민감정상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그냥 넘기기가 타당하지 않아 의율이 이뤄진다, 이 사건도 그럴 수 있다"는 이유였다.

조 전 장관도 직접 억울함을 호소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은색 정장을 입고 차분하게 법정에 나온 그는 발언기회를 얻어 "저에 대해 깊은 오해가 쌓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조 전 장관은 "제가 근무했던 시간과 자리를 생각했을 때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앞으로 제가 겪은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소상히 밝히기 위해 변호인들과 성심껏 (재판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김기춘 #조윤선 #유진룡 #블랙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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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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