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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같은 실화, 그게 다가 아니었다

[권오윤의 더 리뷰 91] 입양인에 대한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낸 <라이언>

17.02.10 10:54최종업데이트17.02.10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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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입양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나 소설, 수기 등을 볼 때 아쉬웠던 점은, 그들이 겪은 혼란과 고통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지만 정작 가슴으로 그것을 느끼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타국으로 입양되어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인물의 외부적 조건은 극화하기 좋은 요소이지만, 아무래도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극으로 만들면 입양인의 내면 풍경을 반영하기가 어렵습니다. 입양인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만든 창작물의 경우에도, 자기 객관화가 덜 된 상태에서 주관적인 분노와 슬픔이 작품 전체를 압도해 버려 균형을 잃어버릴 때가 많지요.

다섯 살, 인도에서 호주로

영화 <라이언>의 한 장면. 다섯 살 인도 소년 사루는, 기차 플랫폼 벤치에서 형을 기다리다가 깜박 잠이 든다. 적막한 한밤중의 기차역에 혼자 남겨진 사루는 형을 불러 보기도 하고 기차역 곳곳을 둘러 보다가 정차된 열차에 올라타게 된다. ⓒ (주)이수C&E


이 영화 <라이언>은 어느 국제 입양인의 기적과 같은 이야기를 소재로 합니다. 다섯 살 인도 소년 사루(써니 파와르)는 기차역에서 형을 기다리다가 잘못 올라탄 기차에서 깜박 잠이 들고 맙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 보니 기차는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중간 정차역에서는 사람이 내릴 수 없게 돼 있어, 사루는 꼼짝없이 고향 마을에서 1200km 넘게 떨어진 콜카타까지 가게 됩니다. 거기서 몇 달씩 거리를 떠돌다가 결국 보육 기관에 수용되어 호주로 입양되게 되죠.

다행히 좋은 부모를 만나 행복한 성장기를 보내며 어느덧 20대 중반이 된 사루(데브 파텔)는 우연한 기회에 인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된 '구글 어스'를 이용해 자기가 기차를 잘못 탔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 주변의 기차역 위성 사진을 대조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영화의 특징은 입양 이전의 기억과 상처에 대해서도 충분히 시간을 할애한다는 점입니다. 어린 사루가 텅 빈 기차에서 깨어나 어딘지도 모르는 광막한 대지를 혼자서 가로지를 때의 막막함,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도시 중 하나이며 사용하는 언어까지 다른 콜카타에서 지내야 했을 때의 당혹스러움,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 변화에 적응하면서 느꼈을 혼란 등을 담담하게 따라가면서 관객의 진심 어린 공감을 끌어냅니다.

이렇게 충분히 기반을 다져 놓기 때문에 중반 이후 성인이 되어 등장하는 사루의 감정이 훨씬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자신을 거둬 준 양부모에 대해 보답을 하기 위해서는 바르게 잘 자라야 한다는 정신적 부담감, 자신의 뿌리 찾기를 위한 노력이 양부모를 배신하는 일이라 생각해서 느끼는 죄책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신을 기다리며 걱정하고 있을 가족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것들 말이죠. 남들은 괜찮다고 하지만, 스스로는 절대 괜찮지 않은 이런 '마음의 빚'은 그가 고향 마을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게 한 주된 동력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입양인을 다룬 작품들은 입양 후 성장 과정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만 생김새가 다르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혼란과 자괴감, 알게 모르게 자행되는 인종 차별 때문에 겪는 어려움 같은 것들 말이죠. 그런 특별한 경험들에 주목하는 것은 일반 관객들이 입양인의 처지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는 해 주지만, 아무래도 흔치 않은 경험이다 보니 깊이 공감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서른 살, 호주에서 인도로

영화 <라이언>의 한 장면. 고향을 떠난 지 25년 후, 구글 어스 위성 지도를 통해 자신의 고향을 찾아내기로 마음 먹은 사루는 자신이 기차를 타고 캘커타까지 갔던 시간을 계산하여 자기 고향이 캘커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 역산한다. 그리고 그 근방 모든 기차역의 위성 사진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 (주)이수C&E


그에 비하면 이 영화의 접근 방식은 누구나 겪을 수 있을 법한 상황에서 출발하여 주인공의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쪽입니다. 위성 지도를 통해 25년 만에 고향 마을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신기한 미담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이야기가, 입양인의 내면 풍경을 섬세하게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어린 사루 역할을 맡은 인도의 아역 배우 써니 파와르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아이다운 천진함부터 막막한 현실의 장벽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슬픔까지 섬세하게 표현하는 그의 연기는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립니다. 신파적인 연기 하나 없는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이 돋보입니다.

영화의 나머지 절반을 책임진 데브 파텔은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극 중 배역을 연기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몸매 관리부터 호주 악센트, 연기 패턴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부분에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실제로 최근작인 <채피>(2015)나 <무한대를 본 남자>(2015)에서의 연기와 비교하면, 훨씬 깊이 있는 감정 표현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루의 양어머니 역할을 맡은 니콜 키드먼과 여자 친구 역할로 나온 루니 마라는 분량은 적지만 명성에 걸맞은 연기로 중심 캐릭터인 사루를 든든하게 뒷받침합니다.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온갖 감정을 다 표현해 낼 줄 아는 두 여배우는 사루가 의지할 수 있는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 줍니다.

흔히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이게 좀 말이 안 되고 지루한 에피소드인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야'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렇게 얘기하면 스스로의 무책임함을 고백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더 재미있거나, 더 의미 있는 장면으로 만들지 못하고 변명만 늘어놓은 격이니까요.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고민해야 할 것은 딱 하나뿐입니다. 제작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무엇이 최선인가를 숙고하는 일 말이죠. 실화를 그대로 재현하든, 실제 있었던 일을 변형하거나 사실과 다른 설정을 끼워 넣든, '그것이 정말 효과적인가'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합니다. 성공한 실화 소재 영화들의 비결은 언제나 소재 자체가 아니라 좋은 이야기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죠. 이 영화 <라이언>처럼요.

영화 <라이언>의 포스터. 구글 어스를 통해 25년 만에 고향을 찾게 된 국제 입양인의 이야기를 소재로, 입양인의 내면을 충실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 (주)이수C&E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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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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