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세상은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등록 2017.01.31 10:10수정 2017.01.3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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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대 인근 대학동 고시촌에 사는 취준생이다. 원래는 철학 교수가 되겠다는 큰 꿈이 있었지만, 지금은 책임감 적게 들고 돈 적게 받아도 퇴근 후 독서할 시간 있는 직장에 들어가겠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옥수수 술빵 장사도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진학을 포기한 이유는 역시 돈. 출신 학교에서 대학원 '등록금'을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도 있는 성적이었지만, '생활비'는 해결할 수 없는 게 결정적인 어려움이었다.

인문계는 교수들조차 프로젝트를 수주받기 힘들다(국내 인문계에 학문 후속 세대가 단절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나는 첫째로 노동 능력을 상실한 모친도 있다. 인문계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은 크게 둘 중 하나다. 중산층 이상 가정 출신이라 그 정도 문화 자본까지는 누릴 여유가 있는 행운아거나, 대담한 사람이거나. 나는 행운아는 아니지만 겁이 없는 쪽도 아니었다. 현실과 타협한 내 나름의 논리다.

"가장 좋아하는 일은 역시 취미로 즐기고,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해."

. ⓒ 김시연


이번 설 연휴는 모처럼 생긴 여유였다. 나는 이 여유를 가장 좋아하는 일을 위해 써보고 싶었다. 잔소리와 용돈은 동생이 탈 차례다. 결심이 서자 대형 서점을 방문해 평소 읽고 싶었고 소장하고 싶었던 책 몇 권을 사 읽기로 했다. 교통카드를 충전하려고 들어선 편의점에는 알바생이 열심히 바닥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인사를 했다.

나도 그녀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한국의 여성 노동자 중 저임금 노동자의 비율은 37.8%로 OECD 1위다(남성은 15.4%로 11위). 일자리 질이 낮은 만큼 명절에도 못 쉬는 여성들이 흔하다. 사장들이 수당은 짭짤하게 챙겨줄까.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는 순전히 사장의 인성 문제로 치환될 뿐 의무는 아니다.

설 연휴 첫날은 분명 공휴일이지만, '근로기준법상' 휴일로 인정되지 못 한다. 사용자가 보통 노동자에게 수당을 지급해야 하는 경우는 '근로자의 날(5월 1일)'과 주 15시간 노동했을 시 시간에 비례해 주어지는 '주휴수당' 정도다. 설사 출근하지 않아도 남자들이 고스톱 치는 동안 전을 부치는 여성들도 많을 것이다. 휴일은 휴일인데 쉴 수 없는 휴일.

설은 많은 여성들에게 그런 날로 남아있다. 물론 6513번 버스 운전석에는 기사 '아저씨'가 앉아있다. 다만 시내버스는 마을버스보다 처우가 좋다. 마을버스 기사는 주 6일 2교대 근무로 기본급에 야간 및 무사고 수당을 합쳐도 세전 월 급여가 180만 원에 못 미친다. 시내버스 기사는 주 5일 하루 8시간 근무에 연봉이 3700만 원 내외다.


젊은 남성들이 시내버스 기사가 되려고 마을버스 기사로 경력 쌓는 경우도 부쩍 늘고 있는 이유다. 아무리 그래도 버스가 편의점보다는 사정이 낫다. 야근 수당은 편의점처럼 노동자 5인 미만인 경우가 많은 사업장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버스 창밖 군데군데 켜진 가게 불빛들 각자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여러분, 모두 두번째로 좋아하는 일하면서 살고들 계시는지요."

'영신로 24길'

영신로 24길과 영등포역. ⓒ 하지율


영등포역에서 내려 교보문고가 위치한 타임스퀘어까지 가려면 조금 걸어야 했다. 학교를 다닐 때는 9호선 신논현역점을 자주 이용했는데 영등포점을 이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영등포역 앞을 가로지르는 경인로를 따라 녹슨 간판에 철제 셔터를 내린 공장들이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천막, 철제 박스 같은 것들이 인도 쪽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었다. 타임스퀘어에 가려면 고가도로 앞에서 오른쪽으로 한 번 꺾어야 했다. 꺾어서 조금 걷다 보니 웬 노란 현수막 하나가 걸려있었고 이렇게 적혀있었다.

"사진 촬영 금지 적발 시 법적 조치하겠음"

무엇을 찍지 말라는 뜻일까. 주변에 초상권이나 저작권 보호를 해야할만한 것들은 딱히 안 보였다. 현수막 앞에는 작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빨간 커튼을 쳐놓은 것을 보니 그 너머에 그림이나 조각품 같은 것들이 있는 예술가들의 공간 아닐까, 추측해봤다. 스마트폰 지도에는 '영신로 24길'이라고만 나와있었다. 손이 시려서 더 찾아보지는 않았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건축물들을 찍는 것은 법 위반이 아니므로 몇 장 카메라에 담았다. 그런데, '영신로 24길'의 정체와 현수막의 의미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안 걸렸다.

(실제 현장 촬영이 아닌 영화 <섹스 볼란티어>의 스틸컷임) ⓒ 조경덕 감독


이윽고 교보문고에서 책 몇 권을 사들고 타임스퀘어를 나서 흥에 부풀어 조금 걸었을 때, 먼발치에서 아까 커튼이 쳐져 있던 가게들에 선홍빛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보였다. "불 켜져 있네? 한 번 가볼까"라는 생각에 '영신로 24길'에 들어섰다. 불빛이 가까워지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점점 뚜렷해져갔다.

"설마..."

군 복무 시절 내가 한창 청소 중일 때, 다음날 휴가인 선임들이 용주골이 어떻고 영등포가 어떻고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품평하고 음담패설을 하며 자기들끼리 무언가 작당 모의를 하던 기억이 났다.

영등포, 빨간 불빛, 다소 노출 있는 복장의 여성들. 모든 정보를 종합해볼 때 이곳이 말로만 듣던 '홍등가'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 낯선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내심 당황하며 걷고 있을 때, 여성 몇 분이 다가와 "오빠, 놀다가자"라고 하자 추론은 사실로 확정됐다. 조용히 목례를 하며 "괜찮아요"라고 몇 번 말씀드리자 붙잡지 않았다.

'영신로 24길'을 나오는 옆길에서 또 다른 여성 몇 분이 활짝 웃으며 "오빠, 놀다 가세요!"라고 했다. 이분들은 아까 여성분들보다 나이가 조금 있어 보였다(나중에 구글 검색을 해본 바에 의하면, 이러한 고참급 여성들을 홍등가에서는 은어로 '펨프'라 부른단다). 그때였다. 비로소 아까 용도를 알 수 없었던 철제 박스와 비닐 천막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영등포역 인근 홍등가에 설치돼 있는 간이 철제 박스, 비닐 천막. 저녁이 되면 펨프들이 난로 하나 켜놓고 거리를 오가는 손님들을 기다린다. ⓒ 하지율


이곳은 펨프들이 난로 하나 갖다 놓고 밤새 추위를 버티며 손님을 기다리는 곳이었던 거다. 말문이 막혔다. 펨프들이 추위를 제대로 피할 수 있을 때는 나이가 적든 많든 '오빠'라 불러야 할 남성들과 '거래'가 성사돼 장소를 옮겨 체온을 나눌 때뿐일 것이다. 게다가 이날은 설 연휴 첫날이었다.

'혹시라도 동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실례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목례를 한 뒤 '영신로 24길'을 나왔다. 영등포역 교차로에는 설 연휴를 맞아 각 정당들이 내건 현수막들이 있었다. 한편에는 이재용 삼성 그룹 부회장의 구속을 촉구하는 노동당과 정의당의 현수막이, 다른 한편에는 "광장의 촛불, 새해엔 정치개혁으로 밝히겠습니다"라는 녹색당의 현수막이 보였다.

"국민이 승리하는 2017년!"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구호를 내건 더불어민주당의 현수막도 보였다. 바른 정당과 새누리당은 그들 스스로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지, 내가 미처 발견 못 했는지는 몰라도 현수막이 안 보였다. 하지만 이중 어느 것도 '영신로 24길' 초입의 노란 현수막보다 마음에 울림으로 다가오지는 못 했다.

설날에도 '영신로 24길'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설날에도 저녁 8시경이 되자 홍등가의 업소들이 하나 둘 커튼을 걷고 영업을 했다. ⓒ 하지율


고시촌의 하숙집으로 돌아온 나는 새로 구입한 책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지만 읽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영신로 24길'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성매매는 해묵은 논쟁 거리다. 한편에서는 반대론자들이 성매매가 사회의 미풍양속을 저해하고 여성의 상품화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찬성론자들이 성매매란 성을 사는 쪽 입장에서는 돈을 주고 용역을 구매하는 것이며, 파는 쪽 입장에서는 개인의 자율적 결정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한편에는 여성계의 다양한 입장들이 있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성 상품화는 사회적 폭력(사회적 강간)의 결과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그 사회적 폭력의 원인을 가부장주의라는 문화적 층위보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층위에서 찾는다.

혹은 미성년자 혹은 강제적 성매매가 아닌 이상 성인끼리의 성매매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달려있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도 있다. 성매매를 범죄로 볼 것인지, 처벌을 한다면 그 대상은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의 문제 이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근원적 사실이 있었다. 이를 확인하고자 다음날 저녁 다시 '영신로 24길'을 찾았다.

이날은 설날이었다. 그리고 설날 저녁 8시가 되자, 홍등가의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설날에도 많은 홍등가의 여성들이 쉬지 못 한다는 것을.

파지수거인 할머니의 리어카. ⓒ 하지율


6513번 버스에 몸을 실고 다시 고시촌으로 돌아왔다. 신호등 근처에는 평소에 폐지를 주우시던 할머니의 리어카가 서있었다. 바인딩이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오늘은 쉬시려나 생각이 들었다. 기대가 무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넜고 할머니의 리어카가 다시 생각나 몸을 돌려 길 건너편을 바라봤을 때였다.

그곳에는 리어카를 끌고 가시는 할머니가 계셨다. 역시 세상은 너무 잔혹하다. 잔혹한 세상은 미쳐돌아가기 때문에 예외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허기는 졌다. '봉봉△△△'는 불이 꺼져있고 '라면○○○'은 불이 켜져 있었다. 라볶기에 공깃밥을 추가했다. 식사를 마치고 용기를 내 아주머니께 하루 종일 입가에만 맴돌았던 질문 한 마디를 털어놓았다.

"오늘 설날인데, 안 쉬세요?"

잠깐이었지만 스쳐지나가는 슬픈 표정을 보았다.

"네... 안 쉬어요."

그렇군요. 나는 더 묻지 않고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아주머니도 내게 인사를 해주셨다.

"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언덕 길을 올라 하숙집에 이르러 방문을 열자, 온기와 함께 벽지에 핀 곰팡이 냄새가 올라왔다. 그대로 이불에 쓰러지듯 파묻혔다. 그리고 곧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이 잔혹한 설날에 만난 사람들 그 누구에게도 차마 다음 질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

"여러분, 모두 두 번째로 좋아하는 일들 하며 살고 계시는 거 맞나요?"
#홍등가 #영등포 #폐지 할머니 #고시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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