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신사임당'이 현모양처로 둔갑한 까닭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사극 <사임당 빛의 일기> 첫 번째 이야기

등록 2017.01.28 10:30수정 2017.01.28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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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빛의 일기>. 이영애와 송승헌이 주연이다. ⓒ SBS


인간의 몸값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그게 가능한 어머니와 아들이 있다. 몸값 합이 5만 5천 원인 신사임당(신인선)과 율곡 이이가 바로 그들이다. 이 중에서 '오만원권'은 26일부터 방송되는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이가 성장한 곳이 경기도 파주다. 이곳에는 '파주 이이 유적'이 조성되어 있다. 이이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과 가족들이 묻혀 있는 가족묘 등이 관광지로 만들어져 있다. 제례 의식을 준비하는 이곳의 재실 앞에 가보면, 5만 원짜리 어머니가 5천 원짜리 아들과 함께 마치 커플처럼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형으로 복사된 오만원권과 오천원권이 이곳 재실의 마루 벽면에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다. 


이이가 태어난 곳은 어머니의 고향인 강릉이다. 이이는 네댓 살까지 여기서 살았다. 그 당시 대부분 신랑은 처가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몇 년 혹은 평생을 데릴사위로 살다가 자기 집으로 이사했다.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도 그런 코스를 밟아 강릉에서 이이를 낳은 뒤 파주로 돌아갔다. 

그런데 시댁에 간 신사임당은 오래 살지 못했다. 10년 정도 살았다. 1504년 태생인 그는 1551년 4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이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당시까지 이이는 어머니를 훌륭한 화가로 인식했다. 현모양처의 대명사가 아니라 훌륭한 화가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신사임당은 죽기 전에도 훌륭한 화가로 칭송을 받았다. 그의 산수화를 극찬한 사람들은 그와 동시대 사람들이었다. <패관잡기>라는 책으로 유명한 어숙권은 1480년에 태어났고, 글씨와 시로 국제적 유명세를 탄 소세양은 1488년에 태어났고, 대제학 벼슬을 지낸 정사룡은 1491년에 태어났고, 좌의정을 지낸 정유길은 1515년에 태어났다. 이런 사람들이 어머니의 그림을 극찬했기 때문에, 이이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대단한 화가로 인식할 수 있었다. 

"포도그림과 산수화는 한때 최고였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의 ‘파주 이이 유적’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신사임당의 그림이 어느 정도의 평가를 받았는지 보여주는 증빙이 있다. 수필집인 <패관잡기>의 제4권에서 어숙권은 본관이 동양(평산)인 신사임당의 그림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지금 동양 신씨가 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포도 그림과 산수화는 한때 최고였다. 비평가들은 그가 안견 다음 간다고 말한다."

<몽유도원도>란 그림으로 유명한 안견은 이 당시 저세상 사람이었다. 정확히 언젠지는 모르지만, 그는 1400년 즈음에 태어났다. 1504년에 태어난 신사임당한테는 증조부뻘 되는 사람이었다. 16세기 전반기의 비평가들은 그렇게 이미 고인이 돼 예술적 가치가 한층 높아진 안견과 아직 살아 있는 현역 화가 신사임당을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그런 뒤에 '신사임당은 안견 다음 간다'는 평가를 했다. 이것은 신사임당이 살아생전부터 훌륭한 화가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이는 어머니가 화가로 추앙되는 모습만 지켜봤다. 현모양처로 존경되는 모습은 목격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어머니가 자신을 잘 가르쳤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어머니를 칭찬하는 것을 들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어머니가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사회적 존경을 받는 모습은 지켜보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의 입에서는 어머니가 안견 다음가는 화가로 회자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2017년 대한민국에 환생하게 된다면, 이이는 휴전선 이남 여러 곳에 있는 어머니와 자신의 동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도 아닌 자신이 어머니의 파트너가 되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상당히 당황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한테 죄송한 마음이 살짝 생길 수도 있다. 

이이는 어려서부터 예술의 중요성을 배웠다. 다른 사대부 가문보다 이 집에서는 그림 교육의 중요성이 특히 강조됐다. 이렇게 예술의 가치를 중시하도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이의 입장에서는 어머니가 20세기 이후에 화가가 아니라 현모양처로 유명해져 있는 사실이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예술적 능력이 거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 사실이 약간은 분할지도 모른다. 

화가 신사임당이 현모양처 신사임당으로 둔갑한 이유

파주 이이 유적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화가 신사임당이 현모양처 신사임당으로 둔갑한 데는 정치적 사연이 있었다. 사림파라 불리는 유림 세력이 정권을 잡은 것은 선조 임금이 등극한 1567년이다. 정권을 획득한 사림파는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갈라졌다. 동인당은 이황을 따르고, 서인당은 이이를 따랐다. 

그 후 한동안 동인당이 정권을 잡았다. 그러자 정권을 잡은 동인당은 남인당과 북인당으로 갈라졌다. 북인당의 지지로 왕이 된 사람이 광해군이다. 그런데 광해군이 1623년 쿠데타(인조반정)로 물러나면서 서인당이 정권을 차지했다. 이들의 집권은 그 후 약 50년간 이어졌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인 숙종 임금 때 들어 서인당이 시련을 겪기 시작했다. 숙종 시대에는 서인당의 장기집권이 끝나고 서인당과 남인당이 번갈아가며 정권을 잡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만큼 서인당의 힘이 약해져 있었다.

이때 서인당의 대표가 그 유명한 송시열이다.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그는 숙종 이전만 해도 왕을 능가하는 정치 거물이었다. 그런데 숙종이 왕이 된 후로 정치 행로가 험난해지기 시작했다. 숙종의 집중적 견제를 받아 귀양까지 가는 신세에 처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송시열은 숙종의 부인인 장희빈과도 사이가 나빴다. 장희빈은 남인당의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송시열은 장희빈의 아들이 세자가 되지 못하게 훼방을 했다. 하지만 송시열의 노력은 실패했고, 그래서 서인당은 더욱더 힘들었다. 

이런 위기에서 벗어날 묘책으로 송시열이 떠올린 아이디어 중 하나가 '율곡 이이 띄우기'였다. 서인당의 정신적 구심점인 이이를 영웅으로 만듦으로써 서인당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서인당의 사회적 기반을 견고히 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런 일을 하자면 이이를 신성한 인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이를 신성하게 만들려면, 그 부모부터 신성하게 만들어야 했다. 다행히도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은 이미 화가로 유명했다. 그래서 송시열은 인지도가 높은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부각시키는 데 착수했다. '현모양처 밑에서 성장한 위대한 율곡 이이를 모시고 있으니 서인당은 훌륭한 정치집단이다'라는 논리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신사임당 이미지 깎기 나선 송시열

파주 이이 유적에서 찍은 신사임당 모자. ⓒ 김종성


송시열은 신사임당의 이미지를 바꿀 목적으로 신사임당 그림에 대한 기존의 비평들을 깎아내렸다. 그중 하나가 앞서 소개된 소세양이란 인물에 대한 헐뜯기였다. 소세양은 신사임당의 그림에서 승려들이 소나무 정자에서 한가롭게 바둑을 두는 장면을 보고 이를 묘사하는 글을 남겼다. 이것이 그의 문집인 <양곡집> 제10권에 남아 있다.

1676년에 70세 나이로 <사임당 산수화 발문>이란 비평문을 쓰면서, 송시열은 소세양의 글을 깎아내렸다. 고매한 부인의 그림을 두고 승려를 운운한 것은 무례하고 공손치 못하다고 비판했다. 소세양은 신사임당의 그림을 글로써 그대로 묘사했을 뿐인데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비판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송시열은 신사임당의 그림을 두고 "장난삼아 그린 그림 같지는 않다"는 말을 했다. '봐줄 만한 그림이다'라는 식의 평을 남긴 것이다. 신사임당 자체를 깎아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사임당의 예술을 깎아내릴 목적으로 이렇게 폄하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송시열은 신사임당이 어진 덕을 가졌었기에 율곡 같은 성현을 낳을 수 있었다며 그한테 현모양처 이미지를 씌우려 했다. 

서인당 지도자 송시열이 이렇게 하자, 지지자들도 이 대열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서인당 학자나 정치가들도 신사임당의 삶이나 그림에서 현모양처 이미지를 찾아내는 데 가담한 것이다. 저명한 화가의 그림을 보고 화가나 작품을 칭송하는 게 아니라, 화가의 아들을 칭송하고 화가의 모성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이상한 현상이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일례로, 서인당 출신 학자 겸 관료인 김창흡은 <삼연집>이란 문집에 남긴 글에서 '그런 어머니가 있었기에 그런 아들이 태어났다'며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로 평가했다. 숙종 후반기부터 서인당과 그 후예인 노론당의 권력 기반이 다시 공고해진 가운데 이런 식의 평가가 줄을 잇다 보니, 신사임당은 훌륭한 화가에서 훌륭한 현모양처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신사임당의 현모양처 신화가 탄생했고 이 흐름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사임당은 분명 훌륭한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머니라는 직분 못지않은 중요한 직분이 또 있었다. 그것은 화가가 되어 예술적 소질을 발휘하고 이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분야에서 대단한 성과를 거뒀고, 안견 다음가는 화가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서 화가의 이미지를 걷어내고 '누구의 어머니' 이미지만 씌우는 것은 그에 대한 올바른 예의가 아닐 것이다. 어떻게 보면 화가에 대한 만행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서인당이 정치적 목적으로 그런 만행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신사임당은 취미로 그림을 그린 현모양처가 아니라 시대를 풍미했던 훌륭한 화가로 우리 머릿속에 남게 됐을 것이다. 그림에 집중하는 그 바쁜 와중에도 자녀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은 부지런한 화가로 우리 기억에 남게 됐을 것이다. 새로 방영되는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그의 진짜 면모가 좀이라도 더 드러나게 되기를 희망해본다.
#사임당 빛의 일기 #신사임당 #이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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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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