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별이 된 아버지, 지난 생을 돌아보다

[휠체어에서 마라톤까지⑭] 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다

등록 2017.01.02 10:47수정 2017.01.03 21:4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16년 12월 19일 내 아버지의 시계는 멎었다. 숨쉬는데 꼭 필요한 공기처럼 늘 그 자리를 지키시던 내 아버지가 이젠 영정 속 사진으로만 존재하셔야 한다는 현실 앞에 난 한없이 무너져야만 했다. 6 ·25 참전유공자인 아버지는 이천 국립 호국원 26-12묘역에 안장되었다.


a

아버지는 이천 국립호국원 26-12에 안장되었다. 6,25 참전 유공자이신 아버지는 이천 국립 호국원 26-12묘역애 안장되었다. ⓒ 서치식


a

국립 이천 호국원 26-14구역 좌상단에 안치된 내 아버지 국립 이천 호국원 26-14구역 좌 상단에 안장되기 전 ⓒ 서치식


암으로 인해 2013년 11월 12일 서울대학병원에서 후두를 적출하는 수술을 받아 목소리를 완전히 잃으신 후 만 3년 43일을 사신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브라스밴드를 하신 분이라 70대 중반까지 고향 교회 성가대 지휘를 하시며 중후한 바리톤으로 찬양하시던 아버지는 어린 내겐 큰 자부심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목소리를 잃으셨으니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는가?

서울대학병원에서 후두적출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하시기 전 마지막 주일예배에서 아버지는 몇몇 교인들과 복음성가 '세상에서 방황할 때'로 특송을 하셨다.

어느 교인에게 당신의 휴대폰을 주어 촬영하게 하신 이 영상 끝부분에서 아버지는 대열에서 벗어나 지휘를 하시는데 이는 당신 특유의 흥과 영원히 목소리를 잃게 되는데 대한 안타까움의 몸짓이다. 이 영상은 장례기간 중 영전에 틀어놓아 많은 조문객들의 옷깃을 여미게 했다.



식도 역시 많이 잘라내 식사에도 애로가 많으셨다. 후두를 적출하며 장의 절단된 부위가 수축을 하는지라 주기적으로 풍선시술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번번이 발생하는 비용과 병원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에 당신 스스로 기구를 고안해서 혼자서 하시곤 했다 한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연명하시는 아버님을 뵈며 "아버지가 우리 곁에 계시는 것만 바라는 자식들의 욕심이 오히려 당신께 더 큰 고통만 드리는 것은 아닌지?" 회의가 들곤 했다. 결코 회복될 수 없는 투병 생활이 길어지며 늘 당당하시던 아버지는 의기소침해지셨다. 역시 약하신 어머니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셔야 했다.

그렇게 힘겹게 버텨나가시던 아버지는 추석이 지난 9월 어느 날 쯔쯔가무시에 감염되어 논산의 백제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으셨다. 그때부터 전혀 걷지를 못하셔서 휠체어에 의지하셔야 했다.

그 상황이 되자 아직 치료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아버지는 강하게 퇴원을 요구하셨다. 자의에 의해 퇴원을 한다는 병원 서류에 서명을 하시고서 퇴원을 감행하셨다. 지나고 보니 그 시점부터 내 아버지는 처절하게 이어오던 생존의 끈을 놓고 정리를 시작하신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주의 한 주민센터에서 주민등록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내가 장례 후 사망신고를 위해 유품을 정리하며 보니 가족관계증명서 등을 미리 발급받아 고이 간수해 놓으셨으며 통장마다 용도와 비밀번호를 꼼꼼히 기록해 두신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오래전에 당신 카메라로 스스로 찍은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쓸 것을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는 등 혼자서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신 것이다.

a

손수 찍으신 이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사용할 것을 유언하셨다 한다. 고등학생시절부터 카메라를 소유하고 사진찍기를 즐기셨던 아버지는 스스로 찍으신 이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사용할것을 유언하셨다한다. ⓒ 서치식


어려웠던 1970년대 초 시골 면 소재지에 있던 우리 집에는 당시엔 귀하던 '소년 동아일보'가 매일 배달되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그 신문에 연재되던 김삼의 '소년 007' 고우영의 '어린이 삼국지' 등을 통해 한글을 익힐 수 있었다.

거기에 사냥에 남다른 취미와 재능이 있으셨던 아버지는 손수 나무를 깎고 쇠를 잘라 만든 공기총으로 겨울이면 참새를 잡아 한 마을에 사는 30여명의 사촌들이 만두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한겨울 하얗게 눈이 내리면 사촌 형제 중 나이순으로 산으로 사냥을 가는 아버지를 따라갈 수 있었다. 어린 난 사냥 길에 따라나서는 형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그렇게 사냥을 다녀온 형들 손에 토끼며 꿩이 몇 마리씩 들려 있곤 해 그날은 또 잔칫날이 되곤 했다.

여름은 여름대로 여름방학이 끝나가는 8월 15일이 되면 온 사촌들을 아버지가 인솔하셔서 밤나무골, 치마바위 등지로 피서를 다녀오곤 했다. 그렇게 온 사촌들이 우애를 지켜가며 생활하던 중 큰 사촌 형님이 군대를 가게 되었다.

어려운 시절인지라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위문품을 모으고 위문편지를 써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시절에 집안의 장손이 군대를 가게 되자 아버지께서 사촌들을 모두 큰집 마루에 모이게 해서 위문편지를 쓰게 하고 각자가 마련한 위문품을 큰 꾸러미로 포장해 보내던 추억이 있다.

그렇게 나를 비롯한 사촌형제들에게 수많은 추억을 만들어준 내 아버지는 2005년 끔찍한 사고로 장애를 입고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며 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늘 내 마음의 대화 상대였다.

그 아버지 덕에 난 뇌병변 2급 장애를 얻고도 포기하지 않고 11년째 '하프마라톤 완주'를 목표로 가열찬 재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행동으로 생활 속에서 가르쳐주신 모든 것들에 대해 외롭고 힘든 시절 수없이 돌이켜 생각했다. 듬직한 자녀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지난한 세월, 스스로를 엄하게 다그쳐 나갈 수 있었다.

장례 기간 중 아버지의 삶의 깊이와 폭에 대해 다시금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조문객들을 보며 교회, 지역사회, 가족들로 뚜렷하게 구분됨을 알 수 있었다.

a

아버지 당신이 넉넉한 품을 지니셔서 줄지어 늘어선 조화 당신이 평생 교회, 지역사회, 집안 등을 넉넉한 품으로 안으셔서 줄지어 선 조화들 ⓒ 서치식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던 1904년에 설립된 고향 교회를 평생 섬기시며 두 번에 걸쳐 교회를 건축하셨으며 특히 교육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셔서 아버지를 스승으로 따르시는 목사님들, 장로님들이 여러분이었다.

a

아버지를 스승으로 따르는 장로님들의 조문 교회의 교육에 남달리 헌신하신 내 아버지를 스승으로 섬기며 따르는 장로님들의 조문 ⓒ 서치식


지역의 공립 중학교가 생기기 전에 이미 '덕은강습소(德恩講習所)'란 이름의 교육기관을 운영해 교육에 힘써오던 게 고향 교회의 전통이었다.

유치부, 유년부, 중·고등부로 체계를 정확히 갖추고 교육에 힘쓴 결과 목회자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이 유난히 많이 배출됐다. 그런 연유로 이번 아버지의 장례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남부연회 연무지방 장(葬)으로 치러졌다.

a

기독교 대한감리회 남부연회 연무지방 장(葬)으로 치러진 장례식 112년 역사의 교회를 평생 섬기시며 두번 교회를 건축하셨으며 70대 중반까지 성가대 지휘를 하신 고향교회에서 기독교 감리회 남부연회 연무지방 장(葬)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 서치식


유복한 집안의 셋째 아드님이신 아버지는 당시 충남의 명문 고등학교인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구태와 인습에 찌든 고향마을의 계몽에 뛰어들어 사방공사, 농협운동, 농지개량사업에 헌신하셨다.

60년대에는 미군물자이던 속칭 '삐삐선(야전선)을 어렵게 구해 250여 호의 가구를 선으로 일일이 연결했다. 여기에 '앰프'를 달아 농협에서 트는 라디오를 각 가정에서 들을 수 있도록 하셨다.

전신주가 없던 시절 나무에 묶어가며 가가호호 선을 연결하시다가 떨어져 크게 다친 적도 있다고 한다. 마을의 중앙에 큰 우물이 있어 집집마다 물동이로 물을 길어다 먹던 시절, 우리 집은 아버지가 직접 시공하신 수도가 설치된 부엌의 씽크대(이 역시 손수 시멘트로 만드신)를 사용했다. 거기에 지금의 가스레인지와는 사뭇 다르지만 우리 집은 가스불로 취사를 했다. 집집마다 나무를 해다가 취사를 하던 시절에 아버지의 주도로 우리 마을의 여러 집들도 가스를 사용할 수 있었다.

70년대 초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화장실의 분뇨를 이용한 메탄가스생산시설을 가정마다 설치해 취사연료로 사용했는데 <새농민>이라는 잡지에 소개 될 정도로 열성적인 새마을 지도자였던 아버지께서 하신 일들이다. 그런 연유로 고향 출신 사람들 중 고향을 떠올리면 내 아버지가 함께 연상된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다.

아버지보다 열세 살 어린 사촌누이는 부모님 신혼여행을 따라갔던 추억이 있다. 소년이셨던 아버지께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셔서 사촌들까지 온 집안이 믿음을 가꾸게 되었다. 혼자 되어 어렵게 가정을 일구어 나가는 누나의 자녀들에게는 든든하고 자애로운 외할아버지가 되어주셨다.

목소리를 잃으시고도 종중의 회장을 작년까지 맡으시는 등 남보다 너른 품으로 온 가족과 집안을 품으셨다. 존경하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당신이 남기신 뚜렷한 궤적, 넉넉한 품과 삶의 깊이를 볼 수 있었다.

a

2013년 11월 서울대학병원에서 후두적출 수술 후 어머니를 배려해 환자용 침대를 양보 평생을 사이좋은 오누이 처럼 사신 당신들은 늘 상대를 배려해 주셨다. 2013년 서울대학병원에서 후두적출 수술 후 오히려 병약하신 어머니를 배려해 당신의 환자용 침대를 양보하신 아버지는 그 넉넉한 품으로 주변을 안았다. ⓒ 서치식


a

하관예배시 빈소를 가득매운 조문객 하관예배를 빈소에서 드리는데 빈소가 좁을 정도로 참석자가 많아 아버지의 넉넉한 품을 엿볼수 있었다. ⓒ 서치식


내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필자는 2005년 뇌병변 2급 장애를 얻었다. 완전한 재활을 이루어 21.0975킬로를 3시간 안에 주파해야 하는 하프 마라톤 완주를 내 재활 최종목표로 삼고 11년간을 가열차게 노력 중이다.

그 목표를 세울 당시는 불가능한 목표라서 말할 엄두조차 못낼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나만의 목표를 정해두고 하나님 아버지를 내 재활의 주치의로 삼고 단계를 정해 지난한 세월을 가열차게 노력할 수 있었음은 온전히 내 아버지 덕이다.

내 아버지는 이제 내 가슴속 영원한 별이 되어 곧 이루게 될 내 하프 마라톤 완주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2013년 후두를 적출하셔서 목소리를 잃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시던 내 아버지가 2016년 12월 19일 돌아가셨다.
#서치식 #휠체어에서 마라톤까지 #서승길 #육곡교회 #가야곡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뇌병변2급 장애를 가진 전주시 공무원으로 하프마라톤 완주를 재활의 목표로 만18년째 가열찬 재활 중. 이번 휠체어 사이클 국토종단애 이어 장애를 얻고 '무섭고 외로워'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휠체어에서 마라톤까지"시즌Ⅱ로 필자의 마라톤을 마치려 함.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5. 5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