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문 뛰쳐나와 진범 잡은, 참 특이한 기자

[서평] <지연된 정의>를 읽고

등록 2016.12.29 15:54수정 2016.12.29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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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상규 기자를 2015년 1월 9일 오후 1시 강화도에서 처음 봤다. '오연호의 기자만들기 52기' 현장이었다. 박상규 기자는 강사로 왔다. 그는 터덜터덜 앞으로 걸어 나와 현장취재를 주제로 강연했다.

당시 그는 막 <오마이뉴스>를 그만뒀다고 했다. 그는 "사대문 안의 기사보다 사대문 밖의 기사를 쓰겠다"고 말하며 사표를 썼다. 10년 차 정규직 기자 생활을 그렇게 접었다. 그때만 해도 '박상규라는 사람 참 특이하구나' 하고 말았다.


진범보다 못한 공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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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된 정의 박상규 박준영, 후마니타스, 2016 ⓒ 후마니타스


<지연된 정의>(박상규·박준영, 후마니타스, 2016)는 박상규 기자와 박준영 변호사가 다음(Daum) 스토리펀딩에서 진행한 재심 프로젝트를 책으로 엮은 책이다.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살인 사건들에 이 둘이 뛰어들어 누명을 벗기고 진범을 밝힌 과정을 썼다.
"변호사나 기자나, 그냥 보면 안 보이는 걸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줘야 해요. 당신이이나 나나, 그런 거 해야 해요. 안 보이는 걸 보여 줘야지……. 안그래요?" (26쪽)

<지연된 정의>는 가짜 살인범 3인조의 슬픔(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부터 시작한다. 3인조 강도 치사 사건은 삼례 나라슈퍼에 3인조 강도가 침입해 할머니 한 명을 살해, 금품을 갈취한 사건이다. 완주경찰서는 진범 대신 '좀 모자란' 3인조 가짜 범인을 체포한다. 경찰이 잡아 가두는 데 가짜 3인은 아무것도 안 했냐고? 가짜 살인범들은 범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경찰은 듣지 않고 그들을 때렸다. 그들은 경찰에게 맞았고 맞지 않기 위해 경찰이 시키는 대로 자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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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규 기자와 박준영 변호사 ⓒ 이희훈


세 남자가 이 사건의 누명을 썼다. 강인구, 최대열, 임명선이다. 강인구씨는 지적장애에 한글을 쓰기 어려웠다. 최대열씨도 지적장애가 있었고 한글을 쓸 줄 몰랐다. 부모님도 몸이 불편했다. 임명선씨는 중학교를 중퇴했고 아버지는 알코올에 의존했다.

세 친구는 함께 있을 때 서로에게 슬쩍 물었다.
"야, 네가 그랬냐?" "아니"
"그럼, 너가 할머니 죽였냐?"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우릴 때리냐?" "몰라" (63쪽)

가짜로 조작했으니 수사 기록도 허술했다. 한글을 쓸 줄 모르는 지적장애인이 쓴 논리정연한 자술서가 있었다. 3명의 범행 진술 또한 사실과 일치하지 않았다. 이게 끝이 아니다. 한 제보자는 경찰에 삼례 나라슈퍼 강도 사건의 진범을 제보했다. 제보자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경찰은 듣지 않았다. 진범이 나와 자백까지 했다. 검사는 진범을 풀어줬다.

진범이 스스로 입을 열었다. 박준영 변호사와 박상규 기자를 찾아와 범행을 자백했다. 진범은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을 만나 사죄했다. 당시 살해된 할머니의 묘소에 찾아가 참회했다. 누명 쓴 가짜 3인조에 사과했다.
"갑시다. 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고개 숙이고 참회해야죠." (97쪽)

진범은 가짜 3인조를 만나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가짜 3인조는 "이렇게라도 진실을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피해자 할머니의 유가족 박씨는 "죄는 밉지만 이렇게 용기를 내줘서 고맙네. 늦게라도 반성하고 사죄를 한다니, 다행이네"라며 진범의 손을 꼭 쥐었다. 진범은 피해자 할머니의 묘소에서 "할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게 찾아왔습니다. 이제라도 좋은 곳에서 편히 쉬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진범이 피해자 유가족을 찾아와 사과했을 때, 누명을 쓴 3인조에게 미안하다고 했을 때, 그들은 진범을 욕하거나 때리지 않았다. 용서했다. 억울하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해줘 고맙다고 했다. 이미 공소시효가 끝나 진범이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데도 말이다.

사건을 오판한 판사나 검사, 경찰이 찾아와 가짜 3인조에 미안하다고 했다면 가짜 3인조는 그들에게 욕을 했을까? 피해자 유가족에게 사죄하면 용서하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진범과 달리 그들은 아직 제대로 사과하지 않아서.

<지연된 정의>는 공권력이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짓밟았는지 보여준다. 경찰들은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몽둥이로 때려 범인으로 만들었다. 진짜 범인이 자백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에서는 경찰은 무단으로 김신혜의 누드 사진을 가져갔다. 사건과 상관없는 누드 사진을 김신혜 앞에서 형사들끼리 돌려 봤다.

"SNS에서 가족들 사진 다 지우세요"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을 다룰 때 박상규 기자와 박준영 변호사는 떨었다. 진범을 공개하기로 했다. 보복이 두려웠다. 박준영 변호사는 인터넷에 올린 가족사진을 모두 숨겼다. 박상규 기자는 머리맡에 몽둥이 두 개를 두고 잠을 잤다. 작은 인기척에도 쉽게 잠에서 깼다. 프로젝트에 함께한 황상만 전 반장은 그의 사무실에 손도끼 하나를 뒀다.

얼마나 고민했을까? 진범이 복수하면 어쩌지? 누명이 아닌 진범인데, 거짓말하는 것은 아닐까? 확인한 사실들은 모두 믿을 만한가? 박상규 기자와 박준영 변호사는 진실을 향한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밤을 새웠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들의 길이 천 길 낭떠러지 위에 놓인 줄 하나라는 것만 나는 안다. 발을 조금만 헛디디면 끝장이다. 줄을 다 타서도 얻는 건 없다. 또 다른 줄타기만 있을 뿐이다.
내게 필요한 건 믿음이 아니라 물증이었다. 게다가 그는 의심하기 이전에 의뢰인 편에 서서 의뢰인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변호인이다. 변호인과 기자의 역할은 다를 수밖에 없다. (199쪽)

지연된 정의 -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

박상규.박준영 지음,
후마니타스, 2016


#지연된정의 #박상규 #박준영 #삼례나라슈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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