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뒤집은 최초의 사건, '학반령 전투'를 아시나요

[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10] 〈조선상고사〉 읽기 세 번째 시간, 고구려 선배들의 물러설 수 없는 힘의 원천을 찾아서

등록 2016.12.01 14:37수정 2016.12.09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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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 한눈에

  • 고려 말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쓴 것으로 알고 있던 단심가(丹心歌)를 <조선상고사>에서 만난 것은 의외였다. 정몽주보다 구백 년을 앞선 백제의 어느 옥중에서 울려 퍼진 노래였다.
새들생명울배움터는 '생명을 살리는 교육'을 고민하며 2014년 교육문화연구학교를 시작했습니다. 2015년에는 생명의 교육을 일구기 위한 동력을 얻기 위해 '나' 자신부터 교육하고자 '공적 글쓰기'를 주제로 교육문화연구학교를 열었습니다. 올해는 '한국사'를 공부합니다. 

2017년 19대 대선을 앞두고, 이 땅이 나아갈 길에 대해 수렴과 응집의 점을 찍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걸음을 걸어왔는지, 지난 과거를 다시 돌아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 가늠하려 합니다. <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 생명의 교육, 역사 위에 서다> '역사 - 과거 현재 미래'는 9월 24일부터 2017년 1월 21일까지 총 19회로 진행합니다. - 기자 말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내 모든 걸 바쳤지만 이젠 모두 푸른 연기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내게 남아 있는 작은 힘을 다해 마지막 꿈속에서 모두 잊게 해줄 바다를 건널 거야
(달팽이, 작사·작곡 이적)

달팽이가 가면 얼마나 갈까. 이 달팽이는 바다를 건너 어디까지 가고 싶은 것일까.

11월 19일, 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참가자들은 달팽이의 아득한 심정으로 패닉의 '달팽이'를 노래했다. 질곡의 역사, 왜곡된 역사,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망망대해를 마주한 아득한 심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설 수 없게 하는 어떤 힘이 노래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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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한 시간들을 박차고 나오듯, 한 모둠에서는 변화에 대한 소망들을 서로 공유했다. 그 소망들을 담아 바다를 건너는 달팽이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에서는 매주 금요일 '역사-과거·현재·미래'라는 주제로 함께 공부하고 있다. 이번은 4주에 걸친 <조선상고사> 읽기 세 번째 시간이다.

11월 4일 첫 시간은 <조선상고사> 총론과 1편 '수두시대'를 읽어온 뒤 읽은 소감을 나누고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많은 참가자들이 이 시국에 이런 책을 만난 것에 대한 반가움, 주체적인 역사를 세우고자 했던 신채호 선생의 뜻에 공명한 소감, 함께 공부하고 함께 토론하며 생각을 공유하는 기쁜 마음들을 풀어놓았다. (관련 기사: 우리는 박근혜와 최순실을 사랑할 수 있을까)


11월 11일 두 번째 시간에는 3편 '삼조선의 분립시대'와 4편 '열국 쟁웅 시대'를 읽고 토론했다. 모둠별로 이야기를 나눈 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었던 역사 속 사건을 모둠마다 3개씩 선별해서 발표했다. 참가자들은 역사적 혼란 속에서 스스로 서고자 했던 민중, 고구려 연대 삭감을 비롯한 역사 왜곡, 고구려와 백제를 건설한 여제 소서노 등에 주목하며 이 시국을 반추했다. (관련 기사: 백만, 이름 없는 존재들이 나를 울렸다)

이번 시간은 5편 '고구려의 전성시대'부터 8편 '삼국 혈전의 시작'까지 총 4편의 분량을 읽고, 최근 각자가 겪고 있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읽은 본문 중에 크게 다가왔던 내용을 나누었다. A4크기 종이를 반으로 접어 왼쪽 면에는 자신의 사건을 적고, 오른쪽 면에는 <조선상고사> 본문 속 사건을 적은 뒤 모둠별로 토론했다.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일이 없기를

토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최봉실 새들생명울배움터 대표는 역사를 평가할 때 유의할 점을 언급했다. 지난 시간 여러 참가자들이 역사 속 중요한 사건으로 꼽았던 '삼신설(三神設)의 파탄'을 예로 들었다.

삼신(三神)이란 천신(天神), 지신(地神), 태신(太神, 우주유일신)으로, 자연과 신을 경외의 대상으로 여겼던 고조선 체제의 근간이었다. 그런데 흉노와 중국 등의 거듭된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자 그 권위가 실추되었고, 민중은 지배계급의 신적 위상을 회의하게 되었다. 신채호 선생은 고조선 몰락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삼신설에 파탄이 생기자 민중은 산발적으로 자치를 시도했다. 지배체제의 신엄(神嚴)을 부정하고 민중이 스스로 역사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이 시도에 대해 다수의 참가자들은 긍정적인 반응과 함께 결과적으로 시도가 좌절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여기서 최 대표는 물음표를 던진다. 고대사회의 신정(神政)이란 지도자가 초월적 존재의 도움을 구해 백성을 책임 있게 다스리고자 했던 것인데, 이것이 무너진 것이 정말로 잘된 일인가? 어째서 추호의 의심도 없이 신정의 붕괴에 대해 긍정하는 동시에 신을 경외하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까지 폐기하려고 하는지 의문을 표했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

근래 화제가 되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이 발언, 그리고 신의 도움을 구하던 단군들의 마음이 같을까. 만약 그렇다면, 지도자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 사사로이 욕심을 채우는 것을 간절히 원해도 도와주는 우주, 그런 삼신이라면 무너져 마땅하다. 삼신설의 파탄은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삼신설 본연의 정신은 지도자가 백성을 위하려는데 그 책임의 무게가 워낙 막중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신의 도움을 요청하고 만백성의 안녕을 도모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이때 '천·지·신'에 대한 공경이란 곧 백성에 대한 공경에 다르지 않으므로, 삼신설은 무너뜨리고 해체해야 할 것이 아니라 회복하고 재건해야 할 핵심 가치가 되는 것이다.

어떤 역사적 변화를 바라볼 때 그 앞 단계에서 긍정적으로 계승해야 할 측면과 극복해야 할 측면을 같이 볼 수 있어야 한다. 목욕물 버리려다가 그 안의 아기까지 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최 대표는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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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실 대표는 계승해야 할 역사와 극복해야 할 역사를 같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조선 붕괴' 위에 붙여진 그림 두 장은 교육문화연구학교에 참석한 어린 친구들이 그린 그림이다. 우리가 반드시 계승해야 할 역사가 이후 세대에게 반드시 흘러가야 할 것이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뒤집어엎는 때가 반드시 온다

이어서 최봉실 대표는 지난 시간에 다뤄지지 않았던 역사 속 중요한 사건 하나, '학반령 전투'를 소개했다.

유류왕(유리왕) 당시 고구려는 동부여에 굴욕을 당하며 두 태자 도절과 해명이 죽는 비극을 겪는다. 이에 분개한 셋째 왕자 주류(무휼)가 동부여에 맞서 싸우는데, 이것이 학반령 전투다.

당시 동부여는 기병으로 무장한 강한 전력으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병사 수나 군세, 정치적 상황 등 모든 면에서 고구려의 기량을 앞섰다. 좌절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 열세. 박근혜 하야가 까마득해 보이고 친일 청산이 까마득해 보이는 것과 같은 까마득함.

그게 뒤집어졌다. 아니, 뒤집어엎었다.

최 대표는 이 전투를 모든 역사의 전진의 걸음을 가장 처음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보았다. 열세를 뒤집어엎는 학반령 전투의 변이들이 이후로 무수히 일어났고, 또 지금도 일어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색깔론만 나왔다 하면 맥을 못 추었어요. 우세한 상황 같다가도 종북으로 몰리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몇 차례 있으면서 색깔론이 무력해지기 시작했어요. 무수한 사건들이 모여 때가 형성된 겁니다. 어느 시점에 더 이상 먹히지 않는 때는 반드시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박근혜 고집 못 꺾는다'는 김종필의 한마디. 여기에 오천만 국민의 힘이 풀렸다. 그래, 박근혜는 내려올 사람이 아니지. 우리마저 스스로 이 말을 되풀이한다. 한 사람의 말 한마디에 장악되어 버리는 이 황당한 상황을 두고 최 대표는 분개했다.

우리까지 동조하고 나서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다. 그 고집은 평생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고집 더 이상 못 부릴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다시는 먹히지 않는 때가 온다는 것을 확신하고, 공허한 말의 힘을 거부하고, 여론의 방향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고 최 대표는 요청했다.

"가야 할 길이라면, 무조건 가세. 가리라. 갈 것이다. 가게 될 것이다. 가고야 말리라. 가 있을 것이다. 가서 추억할 것이다. 거기서 또 새로운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역사 청산, 해야 할 말을 하는 것부터

"역사 청산? 그게 되겠어?"

각 모둠별 토론을 마친 후 첫 모둠이 발표하는 자리에서, 신수임씨(36세)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지난 시간 역사 청산이 될 거라고 믿느냐는 최 대표의 질문에 불편한 마음이었다.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과 사회구조 속에서 낙담했고, 소통을 포기할 때가 많았다. 말할 수 있을까? 말한다고 될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 아닐까? 비관하기 일쑤였다. 그는 <조선상고사>를 읽으며 고구려의 재상 을파소가 뜻을 관철시키는 방식에 주목했다.

"을파소는 그에게 주어진 관작으로는 자기의 포부를 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양하면서, 다른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다시 구하여 높은 지위를 주어서 대업을 성취하라고 청하였다. 왕이 그의 뜻을 알고 을파소를 '신가'로 임명하여 모든 관리들보다 높은 지위에서 국정을 처리하게 하였다." <조선상고사 257P>

겸허하게, 그러나 의연하게 요구했다. 을파소가 집권할 당시 고구려는 '좌가려의 난'을 수습하느라 심란했다. 좌가려를 위시한 외척의 무리들이 횡행한 이래 나라의 기강은 문란하기가 짝이 없었다. 부패한 관습을 청산하고 국정을 개혁하려면 왕에 버금가는 권력이 필요했고 을파소는 마땅히 필요한 분량을 요구했다.

"을파소는 책임 앞에서 할 이야기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자신의 역량, 분량을 알고 더 큰 책임의 자리를 당당히 요구했던 것처럼 자기 책임의 분량을 알고 할 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신수임씨, 36세)

"부담스럽고 두려운 마음에 해야 할 이야기를 못하고 있을 때, 다른 친구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내가 피하고 있을 때, 나보다 어린 그 친구는 용기를 냈던 것입니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모습들을 지켜보는 시국이라 더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나이가 들면 나잇값을 하는 인생 선배가 되고 싶습니다" (이혜인 학생, 16세)

막막하다고 해서,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고 해서 지레 포기하면 거기서 끝이다. 안 된다고 생각해도 해야 할 말이라면 하는 결기, 서야 할 책임의 자리라면 서는 결기, 이것이 역사 청산의 첫걸음이다.

한 모둠은 책임지고자 하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들고 나왔다. 종이에 '우물 정(井)' 자를 크게 그리고 한가운데 '일상'이라고 썼다.

'우물 정' 자는 혁명의 상징으로 그렸다. 중국 한(漢) 대에 왕망(王莽)이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려 했던 일을 두고 신채호 선생은 그 혁명성을 인정했다. 그 중심에 '일상'을 쓴 것은 진정한 혁명은 책임 있게 살아가는 각자의 일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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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일상에서 책임 있게 사는 것이 진정한 혁명의 길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우물 정의 나머지 여덟 칸은 각자의 일상 속 책임들을 표현한 그림으로 채웠다. '귀' 그림을 그린 박애영씨(37세)는 왕망의 야심찬 혁명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아 좌절된 것을 보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운 경험을 반성했다.

김난희씨(43세)는 익숙한 일을 예사로 여기다가 멸망한 안라가라(아라가야)의 사례를 보며, 어린이집에서 책임 맡은 한 아이의 이상한 행동을 원래 그렇거니 방치하다가 심각해졌던 경험을 떠올렸다.

명권영 학생(15세)은 온달이 싸움에 나서면서 빼앗긴 땅을 수복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던 이야기에, 어떤 일을 결심할 때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고 했다.

해야 할 말은 하고, 들어야 할 말은 잘 듣기. 익숙한 일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세밀하게 살피기. 결단했다면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

혁명은 이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시작되고 있다.

민족적 결기는 도도한 역사의 물결을 타고

우리 한민족은 고유한 기풍이 있다. 그 기풍은 민중의 근저에 유유히 흐르고 있어서 외세의 침략이나 강압적 권력에 눌려 있는 듯하다가도 민족적 각성의 계기가 찾아오면 들불처럼 일어난다. 고구려의 선배제도는 그러한 민족적 기풍을 국가 차원에서 적극 배양하려는 시도였다. 신라 역시 화랑제도로서 고구려의 본을 받았다.

"화랑(花郞)은 한때 신라 발흥의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 한문화가 발호하여 사대주의파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 풍속, 학술을 지배하여 온 조선을 들어 중국화하려는 판에 이에 반항하고 배척하여 조선이 조선으로 되게 하여 온 것도 화랑이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의 역사를 말하려 하는 것은 골수를 빼버리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방책이다." <조선상고사 342P>

"국선(國仙)과 화랑(花郞)은 진흥대왕이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방해 온 것이다... '신수두' 단전(檀前)에서의 경기대회에서 '선배'를 뽑아서 학문에 힘쓰게 하고, 수박(手博), 격검(擊劍), 사예(射藝), 기마(騎馬), 턱견이(=택견), 깨금질, 씨름 등 각종 기예를 익히게 하고, 멀고 가까운 산을 찾아 탐험을 하고, 시가와 음악을 익히고, 공동으로 한 곳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평소에는 환난의 구제, 성곽이나 도로 등의 수축을 자임하고, 난시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 공익을 위하여 한 몸을 희생하는 것이 '선배'들이었다." <조선상고사 348P>

조선이 조선되게 해 왔다는 그 기백. '선배'의 기풍은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를 따라 우리의 골수에까지 각인되지 않았을까.

윤희윤씨(37세)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책임인지 감각적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안에 내재된 감각은 기회가 찾아오면 불씨가 되어 변화를 이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싶게 한 것도 역사적 감각이 깨어 변화를 이끈 것이다.

책임감과 의연함, 민족적 결기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다만 그러한 기풍을 짓누르고 무력화하는 시도가 끊임없이 함께 있다. 그 세력은 무지하고 막지하며 육중하다. 여기에 맞서려면 파편화된 개인의 무력한 역사를 박차고 나와 삶을 드러내고 가치를 공유하고 연대해야 한다. 선배는 '함께' 되어 가야 한다.

바람 불면 촛불은 꺼진다고 했는가.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런데 모여 있는 촛불은 다르다. 바람 불면 옮겨 붙는다. 꺼지는 듯 불씨가 옮겨 붙어 들불처럼 번진다.

구한글 학생(18세)은 지난 12일 촛불 문화제에 참석했고 백만 인파의 함성 속에서 울컥했다. 그는 전태일 열사를 떠올리며 '아름다운 청년'이 아닌 '비참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그 죽음의 의미,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운동 절대 끝내지 말라'는 아들이 남긴 한마디에 남은 평생을 투신한 이소선 여사를 떠올렸다. 그는 부끄러움에 눈물을 흘렸고, 전태일이 죽음으로 지핀 불길을 꺼지지 않게 지켜내고 더욱 타오르게 해야 할 책임을 느꼈다.

한 모둠에서는 '선배가 되려면'이라는 제목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첫째 조건으로 '공적인 삶에 투신'을 내세웠다. 발표자는 공적 삶이 없는 것을 비참하게 여겼다는 그리스인들의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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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모둠에서는 선배가 되고 싶은 마음을 나누었다. 선배가 되는 첫째 조건은 공적 삶에 나서는 것이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사적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 정당화된 사회, 나와 내 가족의 안위만을 배타적으로 위하는 기류에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사회,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자신의 사생활을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하는 사회에서 선배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모둠에서는 모두가 선배가 되고 싶어 했다.

"우리 같이 선배가 되자. 더 많이 책임지는 사람이 선배다." (박현지씨, 32세)

물러설 수 없는 힘의 원천, 사랑

"죽어 죽어 일백 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 되고 넋이야 있든 없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조선상고사 358P>

고려 말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쓴 것으로 알고 있던 단심가(丹心歌)를 <조선상고사>에서 만난 것은 의외였다. 정몽주보다 구백 년을 앞선 백제의 어느 옥중에서 울려 퍼진 노래였다.

사연은 이렇다. 고구려 22대 안장왕이 태자 시절 백제를 정탐할 때 한씨와 연을 맺었다. 고구려에 돌아와서도 잊지 못하더니 왕이 된 후에 한씨를 맞이하기 위해 백제와 전쟁을 벌이지만 수월하지 않았다.

백제의 태수가 한씨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아내로 맞으려 했으나, 한씨는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옥에 갇혔고, 옥중에서 단심가를 부른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애가 탄 안장왕은 자신의 여동생 안학을 깊이 사랑한 을밀에게 한씨를 구해주면 안학과의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했고, 목숨을 건 을밀의 무훈으로 마침내 안장왕은 한씨와 다시 만나게 된다.

안장왕과 한씨, 을밀과 안학, 서동과 선화, 온달과 평강, 가실과 설씨녀...

<조선상고사> 8편 '삼국 혈전의 시작'에는 이와 같은 애끓는 사랑의 이야기가 많다. 혈전 그리고 사랑. 붉은 피 그리고 붉은 장미.

한 모둠이 고구려 궁사가 활을 쏘는 그림을 들고 나왔다. 그림의 접힌 반을 펼치니 궁사가 쏘는 화살이 장미로 바뀐다. 이명구씨(34세)는 고구려의 '선배'들이 그 많은 공적 의무를 감당해낼 수 있었던 것을 '사랑의 힘' 때문이라고 했다.

선배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계급에 상관없이 사람을 깊이 위하고, 생명을 지키는 최전선에서 책임을 감당했다. 이러한 구조가 사회적으로 구현된 나라, 그런 나라여서인지 더 강렬한 기상을 느꼈다고 그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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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펼치니 고구려 궁사의 화살이 사랑의 장미로 변한다. 고구려의 강한 기상이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선배와 화랑의 무리는 시를 읊고, 노래 부르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문학과 음악은 진심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마음에 울림이 없이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는다는 것은 얼마나 무가치한 일인가. 그러므로 그들에게 시와 노래란 진심을 다해 서로를 만나고 목숨 걸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 사랑은 한 집단을 넘어 백성 전체를 향한 공적 사랑으로 확장된다. 이것이 한 나라의 힘이고 한 나라의 기상이다.

난관과 어려움을 통과하며 사랑은 피어난다. 삼국이 혈전을 벌이는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더욱 순결한 사랑이 꽃피었다. 목숨을 내어놓아야 할 만큼 치열한 시국은 진정한 삶의 가치를 일깨운다. 사랑. 우정. 책임. 정의.

박근혜 하야 정국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시국이야말로 국민 전체가 총체적으로 각성하고 있는 가장 순수한 시국이다. 현 정부를 지지하고 선출했던 아버님 어머님들도 촛불을 들고 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고 있다.

박근혜 하야뿐 아니라 지금 이때 드러나야 할 것, 청산되어야 할 것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국민들의 손에 의해 백일하에 드러나고 기필코 청산되어야 한다. 생명을 잠식하는 암세포는 단 하나도 남김없이 적출해 내고 태워 없애야 한다. 우리가 끝까지 촛불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촛불 정국은 서로를 만나게 한다. 끈끈하게 연대하며 만나든, 치열하게 부딪치며 만나든. 어떤 만남이든 더는 회피할 수 없다. 어떤 역사적 만남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가. 귀를 기울이자. 부르는 소리를 듣자. 그 현장으로 달려가자. 지금이 그때다.

수없이 계절은 바뀌어도 변치 않는 단 하나
그대를 향한 내 그리움 그리워 너무 그리워
우리의 이별은 너무 길다 이제 만나야만 한다
서운한 마음은 모두 잊자 우리는 하나니까
우리의 소원은 단 하나 다시 만나야만 한다
너와 나 두 손 꼭 잡고서 기쁜 노래를 부르자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 다시 만날 그날
기쁨과 행복의 눈물로 세상 가득한 그날을
그리운 백두산 산새 소리 한라산이 춤을 출 때
가슴에 맺혔던 애달픔이 이제야 녹는구나
우리의 소원은 단 하나 다시 만나야만 한다
너와 나 두 손 꼭 잡고서 기쁜 노래를 부르자
(그날이 오면, 작사·작곡 최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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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우리를 불렀다. 우리를 만나게 했다. 함께하게 했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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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우리를 불렀다. 우리를 만나게 했다. 함께하게 했다. ⓒ 새들생명울배움터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카페로 오시면 교육문화연구학교를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의 소감을 더 보실 수 있습니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바로가기(http://cafe.daum.net/kyungdang/coIz/200)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도 기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조선상고사 #신채호 #새들생명울배움터 #배움터경당 #교육문화연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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