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가 누더기, 걸레처럼 되고 있다"

[2016 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5]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건국절과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이유

등록 2016.10.24 09:30수정 2016.10.24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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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생명울배움터는 '생명을 살리는 교육'을 고민하며 2014년 교육문화연구학교를 시작했습니다. 2015년에는 생명의 교육을 일구기 위한 동력을 얻기 위해 '나' 자신부터 교육하고자 '공적 글쓰기'를 주제로 교육문화연구학교를 열었습니다. 올해는 '역사'를 공부합니다.

2017년 19대 대선을 앞두고, 이 땅이 나아갈 길에 대해 다시 한 번 수렴과 응집의 점을 찍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걸음을 걸어왔는지, 지난 과거를 다시 돌아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 가늠하려 합니다. <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 생명의 교육, 역사 위에 서다> '역사 - 과거 현재 미래'는 9월 24일부터 2017년 1월 21일까지 총 19회로 진행합니다. - 기자 말

"역사는 '혼'이에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걸어온 길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의 역사가 누더기가 되고 있어요. 걸레가 되고 있어요. 국정교과서를 추진한다는 둥 건국절을 지켜야 한다는 둥 연설하고 있는 한 여자 때문이에요. 죽기 전 내 소원은 딱 두 가지예요. 친일 독재 청산과 남북통일이에요."

한평생 역사를 공부해 온, 팔순을 넘긴 노역사학자는 참석자들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자신이 인생을 바쳐 공부해 온 역사가 누더기가 되고, 걸레가 되고 있다고. 그러나 그의 눈빛은 깊었다. 그리고 맑았다. 그는 고통과 아픔의 역사를 말하면서도 희망과 승리를 주시했다. 친일 독재 청산과 남북통일이 죽기 전 소원이라 했다. 지난 10월 14일, 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네 번째 시간. 이이화 선생은 '왜 우리는 한국사를 알아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참석자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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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역사를 공부해 온, 팔순을 넘긴 이이화 선생은 참석자들의 눈을 응시하며 강의했다. ⓒ 강한종


대한민국은 역사 전쟁 중

이이화 선생은 대한민국은 역사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대외적으로 중국은 고대사를, 일본은 근현대사를 왜곡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에서는 식민지 근대화론 주창자들이 군사 독재 정권의 잔재인 국정교과서 지정 문제까지 들고 나왔다. 역사적 사건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이 상황이 마치 전쟁과 다르지 않다.

이 선생은 한국사는 수난의 길을 걸어왔다고 정의했다. 예로부터 중국의 중화주의에 물들고, 일본의 식민 지배에 시달리는 등 한국사의 시련은 비단 오늘날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 역사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 선생은 우리의 역사 교육을 훑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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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선생은 역사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의 역사 교육을 훑고 올라갔다. ⓒ 강한종


중화주의에 물든 조선의 역사 교육

조선 초기부터 한국의 역사 교육은 중국의 역사에 치였다. 중화주의가 만연했다. 중국은 조공하는 나라였다. 우리가 사대하는 나라였다. 조선시대에는 현재 초등학교에 해당되는 시기에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가르쳤는데, 이는 철저히 사대사관에 입각한 교육이었다.

'하늘 천 땅 지 누를 황 검을 현...' 으로 시작하는 <천자문>은 단순히 글자를 배우는 노래가 아니라고 이 선생은 설명했다. 중간 중간에 요순시대와 남북조시대 이전의 중국역사가 녹아 있다. 조선의 아이들은 자국의 역사를 배우기도 전에 중국의 역사를 외워야 했다. <천자문>은 중국학자의 손에서 만들어진 책이니까 그렇다 치자. <동몽선습>은 조선이 만든 교과서였음에도 중국의 역사를 먼저 늘어놓았다. 조선의 국호를 명나라 황제가 지정했다고 기술하기도 한다.

관리를 뽑던 '과거 시험'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거제'는 중국의 제도를 차용한 것인데 시험 과목까지 그대로 가져온 탓에 조선의 관리가 되려는 이들은 자국의 역사가 아닌 중국의 역사를 공부해야 했다. 역사 교육이 그러니 조선을 다스려야 하는 벼슬아치들의 역사관이 사대주의적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선생은 시조나 그림 등에서도 중화주의를 엿볼 수 있다고 했다. '태산이 높다 하되...'로 시작하는 시조를 외우면서 공자가 태어난 언저리인 태산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의식을 심어 주었다. 실제로 태산은 설악산보다도 낮은 산이다. 실제 태산의 높이와 상관없이 중국을 칭송하는 내용인 셈이다. 또 가 보지도 않고 직접 보지도 않은 무릉도원을 이상향으로 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 같은 산수화도 일례라 할 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개화기 실학자들은 자주사관을 기술하는 작업에 골몰한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움직임은 민중의식에도 영향을 끼친다. 민속화가 급속도로 발전하며 더 이상 가보지 않은 중국의 경치가 아닌 조선의 경치를 담은 진경산수화를 향유하게 된 것이다. 또 기생과 양반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춘향전>, 민중의 애환을 담은 <흥보전> 등이 유행하며 민중 사이에서 널리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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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선생의 맛깔나는 역사 이야기에 참가자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 강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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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선생이 강의 중에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 ⓒ 강한종


수난의 역사, 35년간의 일제 식민 지배

중국을 사대하는 역사 교육의 시련은 일제 식민 지배 아래에서 식민사관으로 이어진다.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난 1894년, 일제는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청일전쟁을 승리하며 중국을 한반도에서 밀어낸다. 1904년 러일전쟁을 승리하며 조선의 지배권을 거머쥐었다. 일제는 조선을 수탈하며 동아시아의 패권을 잡았다.

일제의 수탈은 지독했다. 이 선생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방식은 자원과 정신을 모두 수탈해 가는 방식이라고 했다. 자원을 수탈해 가나 어느 정도 식민지의 자유를 인정하는 영국형 지배 방식과, 자원은 수탈은 덜하나 식민지의 말과 풍습과 종교를 지배 국가의 방식으로 통일하며 민족정신을 앗아가는 프랑스형 지배 방식, 두 가지를 모두 택한 것이라고 했다.

일제는 금과 쌀 등의 물자 수탈은 물론이요, 창씨개명을 요구하는 등 정신 수탈도 서슴지 않았다. 아이·청년·장년 할 것 없이 전쟁터와 탄광으로 끌고 갔으며, 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신대라는 이름의 노동자로, '위안부'라는 이름의 성노동자로 끌려가야 했다. 이중 '위안부' 문제는 가장 악랄한 것이었다.

이 선생은 한일병합 100주년 행사 차 도쿄에 갔을 때 일을 회상했다. 행사 중에 '위안부'로 끌려갔던 김 할머니의 증언을 듣는 순서가 있었는데, 할머니께서 옷을 벗어 그 시절의 상흔을 고스란히 보여주셨다. 맞고 찍히며 몸에 엉긴 상처들은 할머니의 몸에 흉터로 남았다. 그 자리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일본인, 한국인 할 것 없이 모두 울었다. 이 선생은 할머니의 상흔을 보며 당시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조금이나마 가늠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이거 해야 돼요, 반드시 해야 하는 거예요. 싸우자는 게 아니고, 복수하자는 게 아니에요. 잘못한 건 사과하고, 진지하게 반성하고, 그리고 서로 화해하자는 거예요. 그게 안 되고 있어요."

이 선생은 '위안부'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제가 동학 농민 운동 때부터 한반도에 들어와 대량학살을 벌였지만, '위안부' 문제만큼 악하고 독한 사건은 없다고 했다. 이 선생의 눈물에 겸허한 마음이 들었다. 고난의 민족이 겪어 내야 했던 고통은, 그 고통을 겪으며 살아 낸 이 역사는 단순히 '35년간의 일제 지배' 한 문장으로 욀 수 있는 역사가 아니었다. 할머니 몸에 새겨진 민족의 고통은 외면하겠다고 하여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역사학자의 눈물은 연민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물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역사 앞에 이 나라 민족으로 갖는 통탄함이었다.

그런데 어찌 '위안부' 문제 해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정치 이념을 운운하고, 값을 매기고자 하는가. 바라는 것은 그저 지난 역사에 대한 사죄이다. 고난을 감당해야 했던, 여전히 아픔을 껴안고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머리 숙여 깊이 사죄하는 것, 그뿐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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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선생은 위안부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강한종


건국절과 국정 교과서는 역사를 흐리는 일

일제강점기인 1936년 태어난 이이화 선생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해방 이후 친일 세력과 독립운동 세력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대립했고, 돈이 있던 친일파들은 정권을 잡고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혈안이었다. 4·19세대인 이 선생은 20대 때 역사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 민족은 왜 이리도 고통과 아픔이 많은가?'를 물었고, 문학 공부를 중단하고 역사 공부에 들어섰다. 식민 지배로도 모자라 독재를 겪고 있는 이 나라, 분단을 겪고 있는 이 민족 앞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한 끝에 나온 결심이었다. 이후로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등을 거쳐 다양한 역사 운동에 매진해 왔다.

팔순의 나이에도 그의 활동은 여전히 활발하다. 근래에는 박근혜 정부의 건국절 주장 때문에 더 바빠졌다. 언론 인터뷰는 물론이고, 원로 역사학자들과 성명을 발표하는 자리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목소리를 낸다. 그가 건국절 주장을 반대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유는 그것이 친일 잔재 청산과 남북 갈등 해결의 최전선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 선생은 지금 맞닥뜨린 현실을 제대로 알아야 친일 독재 세력을 타도할 수 있고, 남북통일을 앞당길 수 있으며, 중국의 중화주의와 일본의 군국주의에 맞서야 하는 현실을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있다고 했다. 근현대사를 제대로 알아야 오늘의 역사를 바로 세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근현대사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현실과 맞닿아 있으며,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건국절 주장은 현실을 흐리고자 하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지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 선생은 이러한 주장이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헌법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이라 했다. 헌법에는 엄연히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박근혜 정부의 주장대로라면 1945년 8월 15일 이후 건국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그가 친일파라도 건국공로자가 될 수 있다. 평생 독립운동을 하고도 해방 후 단독정부에 반대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은 독립 운동가들은 반국가사범으로 내몰릴 수 있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는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여론의 거센 비판에도 불구하고 역사교과서를 검정제에서 국정제로 바꿨다.

박근혜 정부가 헌법에 명시된 임시정부의 법통성과 선열들의 독립운동을 부정하면서까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친일파이자 독재 세력을 건국의 주역으로 세우려 하는 것이라고 이 선생은 짚었다. 건국절 논란과 국정 교과서 논쟁의 역사 전쟁의 양상은 정권을 잡은 친일·독재·산업화 세력과 독립·민주화 운동 세력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 선생은 더 이상 민족의 역사를 거짓말로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라고 현 정부와 이에 동조하는 역사학자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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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들이 열심히 강의를 듣고 적는 모습. ⓒ 강한종



"남북통일을 주위의 다른 나라들은 원하지 않아요. 남북이 평화협정을 만들고, 서로 대화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어요. 남한의 전시작전권은 미국에게 있어요. 전시작전권부터 가지고 와야 해요. 북한의 자원개발권의 70%는 중국이 가지고 있어요. 북한은 돈이 없어서 다 팔아먹고 있어요. 이를 원상 복구해야 해요."


이 선생은 남북통일을 위해 남북 대화를 강조했다. 물론 북한의 근현대사는 김일성이 다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등 남한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충분한 합의점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 했다. 고구려사와 발해사의 경우처럼, 한반도의 역사라 서로가 합의한 바가 있다는 점을 들었다. 남과 북의 역사적 인식이 달라서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대화를 하면 공통점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며,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니라고 봤다. 통일이 되면 인구와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남한이 주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놓고 함께 역사를 개척해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역사학자가 남긴 희망

이이화 선생은 2시간이 넘도록 한반도의 고난과 질곡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며, 동시에 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자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국정교과서 문제에 대해서도 현 정부가 역사 교과서를 국정제로 전환했지만, 내년 대선 이후 정권이 바뀌면 이 또한 뒤집어질 거라 예견했다.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기에 야당이 나서지 않더라도 뒤집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난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는 그의 말은 '희망'으로 들렸다. 그가 평생을 역사연구에 힘을 쏟을 수 있었던 이유, 노령에도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고난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거라는 결기와 희망 때문 아닐까. 그리고 그 희망을 다음 세대인 우리에게 계승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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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들이 함께 '터'를 힘차게 부르는 모습. ⓒ 강한종


강의를 시작하며 참석자들은 함께 '터'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이화 선생은 잔잔한 곡조에 힘 있는 가사로 이뤄진 '터'라는 노래가 우리 민중의 정서와 잘 어울린다고 했다. 이 선생의 강의를 곱씹어 보니, 그의 강의가 이 노래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모진 바람, 온갖 슬픔을 다 이기고 지켜온 이 터를 지키자고, 그날은 반드시 오리니 우리 손으로 자유와 평화를 일궈나가자고 호소하고 있다. 

2016 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여는 기사(관련 기사 : '미래를 열고자 과거를 공부하는 모임, 초대합니다')에서 최봉실 대표는 노역사학자 분들의 강의를 듣는 이 시간이 그분들의 노력과 깨달음을 뜨겁게 계승하는 자리가 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살아 낼 것이며, 살아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계승해 낼 것이라고 했다. 이 시간, 한평생을 고난의 역사와 함께 걸어오신 한 노역사학자로부터 '희망'을 계승받았다. 그의 강의를 토양 삼아 이제는 우리가 이 희망을 승리의 역사로 일궈가야 한다.

저 산맥은 말도 없이 오천 년을 살았네 모진 바람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저 강물은 말도 없이 오천 년을 흘렀네 온갖 슬픔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설악산을 휘휘 돌아 동해로 접어드니 아름다운 이 강산은 동방의 하얀 나라
동해 바다 큰 태양은 우리의 희망이라 이 내 몸이 태어난 나라 온 누리에 빛나라

자유와 평화는 우리 모두의 손으로 역사의 숨소리 그 날은 오리라
그 날이 오면은 모두 기뻐하리라 우리의 숨소리로 이 터를 지켜 나가자

한라산에 올라서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머나먼 고향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구나
백두산의 호랑이야 지금도 살아 있느냐 살아 있으면 한 번쯤은 어흥 하고 소리쳐 봐라

얼어붙은 압록강아 한강으로 흘러라 같이 만나서 큰 바다로 흘러가야 옳지 않겠나
태극기의 펄럭임과 민족의 커다란 꿈 통일이여 어서 오너라

모두가 기다리네 불러라 불러라 우리의 노래를 그 날이 오도록
모두 함께 부르자 무궁화 꽃내음 삼천리에 퍼져라
그 날은 오리라 그 날은 꼭 오리라

(터 / 작사·작곡 한돌 / 노래 신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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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마친 뒤, 이이화 선생에게 사인을 받는 모습. ⓒ 강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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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선생과 강의를 들었던 아이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 강한종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카페로 오시면 교육문화연구학교를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의 소감을 더 보실 수 있습니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바로가기(http://cafe.daum.net/kyungdang/coIz/142)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도 기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이이화 #역사 #과거현재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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