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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포기를 강요하는 영화 속 세상... 어쩐지 닮았다

[리뷰] 영화 <이퀄스>가 그린 사랑의 아픔들

16.09.04 15:58최종업데이트16.09.0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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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퀄스>의 포스터. ⓒ 씨네그루


영화 <어바웃 타임>은 국내에서 성공한 로맨틱 영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덕분에 개봉하는 외국 영화 중 종종 <어바웃 타임> 제작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개봉하는 영화들이 눈에 띤다. 2014년에 개봉한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 그랬고, 이번에 개봉한 <이퀄스>가 그러했고, 9월에 또 개봉할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가 그렇다. <어바웃 타임> 제작진을 믿고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이들 영화에서 <어바웃 타임>에 필적할 만한 잔향 깊은 로맨스를 기대한다.

그 기대가 늘 부합하는 건 아니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사랑을 앞세웠지만 막상 영화를 통해 만나게 되는 것은 <어바웃타임>과는 다른 질감을 가진 사랑의 생로병사였다. 마찬가지로, 청춘스타 니콜라스 홀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내세운 <이퀄스>에 대한 반응 역시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니콜라스 홀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사랑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어바웃 타임>의 돔놀 글리슨과 레이첼 맥아담스의 진득한 사랑 저리 가게 두 청춘 남녀의 사랑은 곡진하다. 마무리 이후 여운도 쉽게 잦아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를 온전히 사랑만으로 완결시키지 않는 건 제목에서 암시하는 일종의 이들이 사는 세상의 세계관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사랑의 전제 조건이 되는 세상에 대한 질문일 수 있다.

사랑이 허용되지 않는 세상에서

인류는 서로간의 전쟁으로 지구 대부분을 파괴시키고, 겨우 피해를 입지 않은 일부의 지역 선진국과 반도국을 남겼다. 선진국은 인간이 살기에 매우 완벽한 환경과 조건을 갖췄다. 전쟁 원인이 '인간의 통제되지 않은 감정'에 있다고 생각한 선진국 사람들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거세시켜, 이퀄(equal)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먹고 살 것을 걱정하지 않고, 쾌적한 환경에서 적절한 보호를 받으며 각자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 선진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사일러스(니콜라스 홀트 분), 그는 여느 때처럼 일어나 식단에 맞는 식사를 하고 갖춰진 옷을 차려 업무에 종사한다. 그런 그에게 변화가 생겼다. 그의 눈에 이상이 감진된 동료 니아(크리스틴 스튜어트 분)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의 시선은 니아를 쫓는다. 영화는 '감정'을 맛보지 못한 사일러스가 스토커처럼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을 통해 그의 감정을, 그리고 사랑이란 감정의 불가항력을 설명한다.

감정이 느껴지면 스스로 병원에 가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약을 받거나, 그걸 숨겨야 한다. 다만 발각되면 감호소로 끌려가는 세상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 두 남녀는 동시에 의문에 빠진다. 과연 사랑이 문제일까?

선진국에서 사랑을 범죄시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들이 종사하는 '노동'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일러스와 니아는 그런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느낀다. 처음 사랑에 빠져들 때의 혼란도 잠시, 스스로 병원에 갔던 것을 후회할 만큼 두 사람의 나날은 환희에 차있다. 오히려 방해는커녕 노동 생산성은 높아진다. 그저 문제가 되는 것은 주변 동료들과, 사랑을 범죄시하는 사회다.

사랑을 넘어선 존재의 묵시록

ⓒ 씨네그루


두 스타 배우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에 몰입하는 잦은 클로즈업, 그리고 온전히 두 사람의 감정에 집중하는 서사지만 영화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이들이 사는 선진국에 대한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인간을 통제하는 사회에 대한 서사는 2003년 크리스찬 베일의 <이퀼리브리엄>에서 이미 다뤘다. <이퀼리브리엄>이 영화 후반 감정 통제를 둘러싼 액션이 백미를 이루었다면, <이퀄스>는 그걸 온전히 두 주연 배우의 감정 연기로 설명한다.

사일러스와 니아가 사는 세상은 감정만 제외하면 완벽한 세상이다. 온통 하얀 옷에 하얀 건물의 거세된 감정을 상징하듯 무미건조한 색채의 세상이지만, 그걸 제외하면 생로병사의 모든 것을 사회가 책임져 주는 세상인 것이다. 하지만 선사시대 동굴 벽에다 '예술'을 했던 인간의 감정은 유전자 조작으로도 거스를 수 없다. 그 완벽한 삶을 뚫고 나오는 송곳처럼 곳곳에서 감정을 느낀 사람들은 그 감정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스스로 몸을 던지거나, 울부짖으며 잡혀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렇게 영화는 거스를 수 없는 인간 감정의 숭고함을 설파하며 두 남녀의 순애보를 설득하고자 한다.

사랑의 숭고함과 함께, 동시에 솟아오르는 의문, 이 가상의 감정 전체주의 선진국이 과연 가상의 사회일까? 굳이 멀리 갈 것도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퍼져가고 있는 삼포, 오포의 포기 증후군은 21세기 자본주의에 완벽하게 통제된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다. 과연 사랑과 결혼과 연애를 포기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사회적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을 조장하고 암묵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는 이퀄스 속 하얀 전체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영화에서 사랑은 노동에 대적되는 소모적 감정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노동'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랑과 연애와 결혼을 포기한다. 심지어 외모나 인성도 노동에 적합한 것으로 바꾸고자 트레이닝을 받거나, 교정하고, 수술대에 오른다. 영화는 당신들의 존재를 묻는다. 그 존재의 묵시록에 전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퀄스>가 잔향이 깊을 듯하고, 그렇지 않다면 어쩌면 지루한 감정의 소모로 느낄 가능성도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퀄스 크리스틴 스튜어트 삼포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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