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링 없는 메갈리아는 불가능하지 않다

[주장] 메갈리아를 이끌어 온 것은 '미러링'이 아니라 그들 존재 자체

등록 2016.08.08 18:05수정 2016.08.08 18:05
0
원고료로 응원
최근 '메갈리아'에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를 표방하는 <오마이뉴스>는 이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주장성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이나 기타 의견을 보내주신다면 가감없이 싣도록 하겠습니다. [편집자말]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말할 자유를 위해서는 함께 싸우겠다."

흔히 '똘레랑스'는 '관용'으로 번역되지만, 똘레랑스의 정확한 의미는 '처벌받지 않을 자유'이다. 이것은 의미하는 바는 관용의 정신이 강조된다고 해서, 상대주의 관점으로 모든 의견을 수긍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지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잘못된 방법으로써 잘못된 생각을 억압하는 것을 반대하는, 최소한의 자유를 지향해야 한다. 그것이 볼테르 등이 말한 민주주의 사회라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 만연해진 복잡한 사안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올바름을 부르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를 따지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난 메갈리아를 향해 '미러링'은 이제 포기해야할 때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7월 18일, '김자연 성우'가 트위터에 위와 같은 문구가 적힌 티셔츠 사진을 올린 것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다. 반발이 거세자, 결국 김자연이 맡았던 게임 캐릭터 성우는 교체되는데 이르렀다. 부당 해고가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으나, 김자연 성우는 블로그를 통해, 성우 교체는 부당해고가 아니었고, 녹음한 보이스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녹음에 대한 대금은 온전히 지불 받았으며, 오히려 회사 측이 자신을 많이 배려하고 걱정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었다.

김자연 성우의 해당 트위터를 지적한 사람은 티셔츠의 문구 자체를 지적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해당 티셔츠를 구매함으로써 후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후원을 하는 단체가 어디인지, 또 어디에 쓰이는지 그 목적과 의도를 배제할 수 없을 뿐이다. 같은 '민주화'라는 문구의 티셔츠임에도 '일베'와 5.18 유공자의 문구는 그 성격이 다르듯이 말이다. 이와 같이 후원이기 때문에 티셔츠를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다면, 그 주체인 메갈리아와 사용처에 대한 시비를 가리는 것이 순서이다.

혹자는 이번 후원의 주최인 '메갈리아4'는 논란이 많은 메갈리아에서 분리된 건전한 단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후원금의 사용처가 악플과 반사회적 발언으로 인해 법적 분쟁에 휘말린 '메갈리아' 회원들을 위해서도 쓰일 수 있다는 점에 의혹을 표했다. 따라서, 티셔츠와 관련된 사안의 핵심은 '메갈리아' 자체와 그들의 행보에 대한 시비라고 할 수 있다.

일부에선 메갈리아가 만연해진 가부장적 관습과 여성 혐오를 타파하기 위해 등장했다는 배경과 명분이 뚜렷하며, '맥심' 표지를 수정하고, '소라넷'을 폐쇄하는 등의 순기능을 이룬 점 등을 통해 성급한 일반화는 금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정당화할 수 없다.


먼저 등장 배경에 대한 것이다. 나 또한 메갈리아가 등장함으로써, 가부장적 사회에 질식당한 여성들이 숨통이 트이게 됐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시비를 가리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메갈리아라는 존재와 목적에 대한 평가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대한 평가는 별개라는 것이다.

분명 메갈리아는 우리 사회의 편견을 타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여성 혐오 범죄와 여성 인권에 대한 개선 역시 이루고 있다. 하지만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해야 한다. 결코 공이 과를 합리화할 수 없다. 오히려 공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과를 배제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메갈리아의 '과'는 다름 아닌 '미러링'이라는 잘못된 수단이다. 미러링의 폐해가 불필요하게 편을 가르고, 소모적인 논쟁을 낳고 있다.

이 글에선 미러링이라는 수단이 정당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이 미러링을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진 여성 혐오에 대항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기초적인 논리적 오류 중 하나인 '피장파장의 오류'에 해당한다. 이는 다른 오류를 통해 자신의 오류를 정당화하는 것을 말한다. 무단횡단을 지적하면, '다 그러는데 왜 나만 갖고 그러냐', '너네는 안 그러냐'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변명이 이에 해당한다.

특별한 원인과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예외가 되지 않음을 명심했으면 한다. 언론에서 흉악범이 검거됐을 때 다음과 같은 보도가 나온다. 이들은 자신의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올바른 인격 형성이 어려웠고, 생계유지가 곤란하며, 평소 가족과 이웃에게 친절했다고 말이다. 이처럼 환경적 원인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참작'의 사유가 되지, 죄를 정당화하여 무죄가 되지는 않는다. 미러링도 마찬가지다.

도를 넘어선 풍자와 조롱

또한 미러링이 여성 혐오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라고 하지만, 그 정도를 넘어섰다. 풍자란 것은, 특정 언행을 대상으로 하여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말한다. 즉, 타인의 부적절한 언행이 있어야 풍자라는 사후적 행위가 존재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메갈리아는 도를 넘어섰다. 여성 혐오에 대한 풍자를 넘어서, 새로운 혐오와 반사회적 언행을 당당하게 자행하고 있다. 지나가는 아동에 대해 묻지마 폭행을 했다는 글을 올리고, 남성에 대한 몰카 및 도촬을 한 후 인증을 올리거나 하는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풍자가 아니라, 단순한 '분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과연 이러한 반사회적 행위를 일부로 치부할 수 있냐는 것이다. 만약 일부의 과격한 행위에 불과했다면, 이러한 글이 올라올 때 비추천을 받거나, 삭제를 당하거나, 댓글 등의 여론에서 지탄하는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사례들의 추천과 비추천의 비율, 그리고 댓글을 살펴보면 그것이 일부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이 된다.

누구에게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일부가 문제시 되는 발언이나 글을 게시하는 것은 보편적이다. 특히 일부 부적절한 발언이 제기되는 것만으로 그 커뮤니티를 싸잡아 비난하지는 않는다. 정상적인 커뮤니티라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도덕 등 규범에 어긋나는 발언에 대해 규탄을 함으로써 자정작용이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에 비로소 '일부의 과격행위'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다.

저항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신들이 비도덕적 행위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러링을 하는 이유에 대해, 이들은 본디 주류 사회의 억압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폭력적 저항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시민혁명, 독립 운동, 말콤X의 흑인 인권 운동, 민주화 혁명과 같이 말이다.

물론 이들이 법적인 정당성만을 주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논리로도 단순 비교는 힘들다. 저항의 대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시민혁명이나 민주화 혁명의 대상은 부당한 권력으로 시민을 억압하는 지배층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메갈리아 미러링은 위의 풍자 부분에서 말했다시피, 부적절한 특정 대상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묻지마'식 미러링을 자행하고 있다. 정말 이 세상의 절반인 '남성'들에게 미러링을 일반화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연좌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메갈리아는 미러링이라는 이름 아래, 죄 없는 남성들까지 싸잡아 조롱하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를 '애비충'이라고 하거나, 동포들을 위해 쓰러져 간 6·25 참전 용사를 '고기파티', '육병기'라고 조롱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워마드 게시판 글 중).

이들이 남성 그리고 메갈리아를 비판하는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것은 전형적인 흑백논리의 오류다. 물론 이것은 그들의 자유이기에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메갈리아를 옹호하는 개인뿐만 아니라 '정의당', 진보 언론, 'JTBC'와 같은 정치권마저 그러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후 JTBC는 '시청자의회'에서 메갈리아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일베로 몰아간 것에 대하여, 사안의 본질을 위한 것이고,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보도를 위해서였다고 해명을 내놓았다.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인으로 치부하는 것은 자신들의 주장을 전개하는데 용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와 흑백논리의 오류를 펼치는 것은 설득을 하는 데는 무익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성과 논리, 인권, 헌법 등의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공통의 규범이 있기에 대화와 설득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메갈리아의 목적인 여성 혐오와 양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타인들을 설득하고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

비논리적인 이유로 메갈리아의 비판자들을 적으로 몰아가고 부정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무익한 일에 고집을 부리다간, 적이 아니라 '따뜻한 조언자'였던 이들을 '진짜 적'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다음 단계를 위해 미러링을 버려라

그들 말대로 미러링이라는 폭력적인 저항은 늘 억압받던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을지 모르며, 지금과 같은 발언권을 얻게 된 원동력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미러링을 버려야 한다. 메갈리아의 존재를 모두에게 각인시키고 억압 받는 여성을 격려하는 것은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이제는 각인시킨 이들을 설득하고 합의를 이끌어야 할 차례이다.

지금까지 메갈리아를 이끌어 온 것은 '미러링'이 아니라 그들 존재 자체임을 명심해야 한다. 미러링이 정말 그들에게 필요한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척 간단하다. '미러링'이 없는 '메갈리아'를 상상해보라. 미러링이라는 잘못된 원동력이 없으면 무력해질 정도로 메갈리아는 나약한 존재들인가? 그렇지 않다. 그대들은 충분히 당당하며, 용감한 존재들이다. 미러링 뒤에 숨을 필요는 없다.

우리 사회는 가끔 헤맬 때도 있지만, 늘 진보해왔다고 생각한다. 젠더와 관련된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민혁명이 발생하고 소수가 독점한 참정권은 여성에게 확대되었으며, 지금도 여성들의 권리는 꾸준히 진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96년 '여성채용목표제'라는 것이 도입됐다. 공무원 채용목표에서 여성의 비중을 강제로 할당한 것이다. 그 결과,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 간 공무원 신규 채용 중 여성의 비중은 52.2%로 과반을 유지하고 있으며, 급기야 초등학교 교사는 여성이 다수여서, 교대 정원의 25~40%를 남성에게 할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성채용목표제는 이후 양성평등채용목표제로 전환되어, 특정 성(性)이 30% 미만이 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로 발전하였다.

위 제도가 우리의 지향점이 아닐까 싶다. 복지나 적극적 우대조치처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우대조치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그쳐야 한다. 우리가 양성평등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여성'이기 전에, 또 '남성'이기 전에, 모두가 평등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도덕과 윤리는 버리는 그 시점이 인격과 인간성을 잃게 되는 순간이다.
덧붙이는 글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본 글은 메갈리아 존재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메갈리아의 잘못된 수단인 '미러링'을 특정하여 다룬 글입니다. 저는 메갈리아 자체와 그 역할은 긍정적이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기사는 그저 메갈리아의 미래에 대한 조언을 위한 글이었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이지만, 정 미러링을 옹호하고 싶다면 본 글의 반박을 다시 반박해 주십사 합니다. 만약 타당하다면 저도 수긍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논리적 교류가 있어야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합의가 도출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메갈리아 #양성평등 #혐오 #저항권 #여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그래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고 있다
  3. 3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