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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파인 옷만 입으면 팜파탈인가

[안 뻔한 티켓북] 사랑에 휘둘리는 순정녀 이야기... 마다하고 싶은 뮤지컬 <마타하리>

16.06.13 16:30최종업데이트16.07.03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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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철학적으로 혹은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 옥주현, 마타하리로 관능미 과시 섹시한 건 섹시함일 뿐이다. 섹시하다고 다 팜파탈인 건 아니다. 섹시함에도 종류가 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노출인지가 중요한데, 마타하리의 섹시함이 '걸스 온 탑' 부류의 주체적 섹시함이었는지는 의문이다. ⓒ 이정민


팜파탈(femme fatale). 우리가 흔히 '팜므 파탈'이라고 읽고 쓰는 이 용어는 치명적인 여성을 뜻한다. 타고난 매력으로 주변 남성들의 운명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여성들. 그건 그저 상대를 매혹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팜파탈의 존재는 남성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수동적 여성상을 지운다. 진정한 의미의 팜파탈이란 남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결정하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자를 뜻한다.

팜파탈의 대명사가 바로 실존 인물 '마타하리'이다. 오죽하면 그녀의 일대기에 대한 책 제목이 <팜파탈(Femme Fatale : Love, Lies, and the Unknown Life of Mata Hari)>일까. 물랭루주의 지배자였던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와 독일의 이중스파이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가레타 거트루드 젤르'가 본명이었던 그녀는 결국 반역 혐의로 프랑스군에 의해 처형당한다.

EMK뮤지컬이 심혈을 기울인 역작 <마타하리>는, 이 마타하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창작극이다. 지난 3월 29일 서울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화려하게 개막한 <마타하리>가 12일 성료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뮤지컬 <마타하리>에 '팜파탈' 마타하리는 없었다.

훌륭한 하드웨어, 뛰어난 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 옥주현, 눈물없이 못보는 이별 뮤지컬 <마타하리>의 무대는 굉장히 훌륭하다. 이 비행기만 빼고 말이다. 굳이 꼭 저 묵직하고 어설픈 비행기 모형을 등 뒤로 날려보내야 했을까. ⓒ 이정민


뮤지컬 <마타하리>가 세운 성과는 빛난다. 제작비 250억 원(KBS 보도에 의해 제작사와 언론의 합작 뻥튀기였음이 드러났지만)에, 평균 객석 점유율 90%(이중 유료 점유율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와 창작뮤지컬 최단기간 10만 관객 돌파는 분명 아무나 세울 수 없는 족적이다. 이같은 흥행에 힘입어 (투자 대비 이윤을 더 남기기 위해서라도) 오는 2017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재연도 확정됐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던 국내 대극장 창작뮤지컬 역사에서 <프랑켄슈타인> 이후 이정도 외형적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은 분명 없었다. 무대부터 조명, 의상, 안무, 앙상블까지 하드웨어만큼은 어지간한 라이선스 뮤지컬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국내 관객을 '취향 저격'하는 프랭크 와일드혼의 넘버들은 훌륭하고, 그 넘버를 소화하며 연기하는 옥주현 이하 국내 정상급 배우들의 기량도 일품이다.

EMK뮤지컬은 지금까지 여러 훌륭한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며 관객몰이에 성공한 바 있다. <마타하리>는 EMK뮤지컬에서 무대에 올렸던 여러 라이선스 극을 벤치마킹한 끝에 탄생한 작품이다.

제작사는 아마도 <엘리자벳>의 엘리자벳처럼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이 <황태자 루돌프>의 루돌프마냥 혼란스러운 정치적 배경 하에서도, <레베카> 속 이히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 난관을 돌파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예정된 파국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팬텀>이 호소하던 짙은 감성으로 무장한 채 <모차르트!>처럼 비장미를 풍기면서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화려한 하드웨어 속 소프트웨어는 볼품없었다. <마타하리>의 마타하리는 <마리 앙투아네트> 속 마그리드처럼 공감이 전혀 되지 않는 주인공이었다. <레베카> 2막의 강인한 이히가 아니라 1막의 이히처럼 시종일관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다. 주인공이 매력이 없는데 서사 자체가 <팬텀>처럼 빈약하니 이야기가 지루하다.

그렇다고 주변 인물들이 이를 도와주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엠씨 캐릭터는 아무리 생각해도 <엘리자벳> 루케니의 열화 버전 혹은 <노트르담 드 파리>의 그랭구와르 마이너 버전에 불과하다. 그저 극 주변을 빙빙 돌 뿐이다. 저 배우가 <레미제라블> 초연 때 발군의 재기를 보여준 그 배우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

그러니까 팜파탈은 어디있느냐고 대체

▲ '마타하리' 정택운-옥주현, 남매같은 커플 마타하리와 아르망의 사랑은 분명 감동적일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에서도 마타하리의 주체성은 보이지 않는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아르망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 아르망을 위해 헌신하는 마타하리의 캐릭터는 전혀 새롭지 않다. ⓒ 이정민


▲ 마타하리가 간직한 소녀 감성 작 중에서 마타하리의 '소녀다움'은 수차례 강조된다. 하늘의 별을 보는 아르망과 함께 꿈을 꾼다든가, 아르망의 선물에 뛸 듯이 기뻐한다든가. 결국 이 물랭루주를 지배하던 여주인 마타하리도 그저 마음속에 순수함을 간직한 '소녀'일 뿐이라는 얘기로 귀결된다. ⓒ 이정민


뮤지컬 <마타하리>에서 그 동기가 제대로 설명되는 캐릭터는 하나도 없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마타하리 그녀 자신에게 있다. 옥주현이나 김소향이라는 배우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구시대적이다. '예전의 그 소녀'를 노래하는 작품 속 마타하리는 팜파탈이 아니라 그저 소녀 시절의 순애보를 간직한 전형적이고 수동적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

한 여성의 불행과 트라우마를 말하기 위해 강간이 등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강간은 무엇에 의한 폭력이었으며, 이후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는지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그게 없다.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은 부분을 상상력을 더해 재창조할 수 있다. 다만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전형적이고 식상한 여성 캐릭터가 마주하는 전쟁의 역사 역시, 전형적이고 식상하기 그지없다.

그녀가 단절하고자 하는 과거는 남성에 의해 버림받은 것이었고, 그녀가 추구하는 미래 역시 사랑하는 남성과 함께 하는 내일이다. 남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이 여자는, 아무리 잘 봐줘도 '겉으로는 세 보이지만 사실은 여린 구석이 있는' 연민과 동정의 대상일 뿐이다.

팜파탈은 그녀에게 매혹된 주변 남성을 파멸하게 하는 게 전매특허인데, 그런 남성 캐릭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마타하리>의 기본 틀은 마타하리와 아르망, 라두 대령의 (뻔한) 삼각관계이다. 그녀가 사랑한 아르망이 아마도 유일하게 불행해진 남성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라두 대령이다. 마타하리가 이중스파이가 되는 과정도 라두 대령의 협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와중에 그녀가 실제로 전쟁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도 대사 몇 마디로 대충 처리되는 바람에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

심지어 라두 대령에 의해 목숨을 잃는 과정까지 그녀가 자신의 운명에 맞서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장면은 하나도 없다. 아르망을 만나서 사랑 타령을 하다가, 그 맹목적인 사랑 때문에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고 그 사랑 과정이 심금을 울릴 정도로 절절한가. 아니다. 2막에서 갑자기 아르망이 퇴장하는 덕분에 이야기를 하다 만 듯하다. 마타하리의 군사재판 장면 중, 객석에서 아르망의 환상이 무대로 난입할 때 감탄이나 박수가 아니라 실소가 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 김소향, 절정의 관능미 팜파탈은 권력의 칼자루를 남성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쥔다. 노출을 통한 팜파탈의 매력 발산은 그 맥락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그 맥락은 사라지고, <마타하리>에는 노출만 있었다. ⓒ 이정민


그녀의 팜파탈적인 면모가 유일하게 보이는 건 '아마도' 시종일관 가슴이 드러나는 의상일 것이다. 물론 남녀를 막론하고 배우가 육체의 아름다움을 무대에서 표현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다. 문제는 그 노출이 어떤 맥락에서 대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설득이 없다는 것이다. 극 초반에 등장하여 이국적인 춤을 추는 마타하리는 당시 마타하리가 물랭루주 무대에서 어떤 매력을 뽐내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니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물랭루주 바깥에서 활동하는 그녀의 거의 모든 옷은 가슴 가운데가 파여 있다. 왜인지는 알 수 없다. 가슴 노출했다고 팜파탈이라는 건, 스모키 화장을 했다고 팜파탈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오죽하면 배우가 프레스콜 현장에서 한손으로는 마이크를, 한손으로는 벌어진 가슴을 여미고 있을까.

▲ 죽음을 맞게 되는 마타하리 수미상관 구조로 마무리되는 엔딩. 인생의 마지막 무대에 오른 듯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 결말 장면은 분명 감각적이다. 하지만 이전까지의 이야기가 워낙 정리가 안 되다보니 마지막의 감동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 이 죽음조차 그녀의 선택이 아니라 라두 대령의 음모에 의한 것이었다. ⓒ 이정민


물론 특정한 뮤지컬 작품이 반드시 페미니즘적인 작품이어야 할 필요도, 정치적 올바름(PC)을 엄정하게 추구해야 할 의무도 없다. 창작자의 의도에 따라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특별한 설정을 두거나 캐릭터의 성격을 수동적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다른 인물도 아니고, 마타하리 아닌가. 그녀는 수많은 남성의 판타지를 자극했으면서도 그 판타지에 자신이 갇히지 않았고, 그들이 자신을 멋대로 소비하게 내버려두지도 않았다. 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끝에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그런 그녀를 고작 이런 식으로 재해석했다는 게 가슴이 아프다.

EMK뮤지컬은 이 작품을 통해 해외 시장으로 진출할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처럼 수동적인 여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을, 한국 창작뮤지컬 역량의 총집결인 것처럼 선전해서 해외에 내보내도 괜찮은 걸까. <모차르트!> 이수 캐스팅 논란 때 이미 불거진 것처럼, 이 제작사가 그다지 여성에 대한 고민이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부디 재연 때는 하드웨어의 훌륭함을 보존한 채 내실 있는 소프트웨어를 채워주기를 바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내각을 구성한 캐나다 총리의 말처럼, 지금은 2016년이니까 말이다.


뮤지컬 마타하리 팜므파탈 스파이 EMK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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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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