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 임동혁(1999년생·제천산업고), 스피드 배구 특별훈련 앞서 메디컬테스트 장면
ⓒ 대한배구협회
"V펀드에 지원할 예산은 아무 것도 없다."
뜻밖이었다. 지난 9일 신원호 한국배구연맹(KOVO) 사무총장이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한 말이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V펀드 사업은 대한배구협회(이하 협회)가 지난해 12월 30일부터 국가대표팀 지원을 위해 'V-퓨처(future) 펀드'라는 이름으로 벌이고 있는 모금 운동이다. 펀드 모금액은 오로지 남녀 배구 국가대표팀 지원에만 쓰인다.
핵심 목표는 2020 도쿄올림픽을 겨냥해 남자 국가대표팀을 세계적인 흐름인 '스피드 배구'로 탈바꿈시키는 것이고, 여자배구는 2016 리우올림픽 세계 예선전 등에 출전할 대표팀을 적극 지원하는 것이다.
협회는 작년 5월 신만근 전무와 김찬호 경기력향상위원장 체제의 현 집행부가 들어선 이후 대대적인 혁신 작업에 돌입했다.
대표적으로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운용 방안과 관련해 스피드 배구로의 전환을 선언하고, 지난해 10월 고교·대학 14명의 장신 유망주들을 대거 국가대표로 발탁했다. 성인 국가대표에 고등학교 선수가 7명이 발탁된 건 사상 최초의 일이다. 대학 선수 7명이 발탁된 것도 처음이다. 임동혁 선수(라이트·201cm·제천산업고)는 선발 당시 만 16세로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라는 새로운 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협회는 이 선수들을 틈나는 대로 소집해 '스피드 배구 특별훈련'을 실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난 1월 한 달동안 진천 선수촌에 소집해 첫 특별훈련을 실시했다.
여자배구 대표팀은 오는 5월 14일부터 일본에서 리우올림픽 본선 진출권을 놓고 세계 예선전을 치른다. 협회는 여자배구도 올림픽이 끝나면 유망주들을 선발해 특별훈련을 실시할 계획이다.
이 프로젝트들은 장기간의 체계적인 계획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실시해야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 따라서 국가대표 선수들의 체력 관리와 훈련을 안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기금 마련은 필수다. 그래서 나온 게 'V-퓨처 펀드'다.
이런 방안들에 대해 배구팬들도 모처럼 좋은 반응을 보이며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동안 배구인과 배구팬들 사이에선 협회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대세였다. 국가대표팀 지원이 미약하다는 게 주 이유였다. 협회를 재정적으로 사면초가에 빠뜨린 배구회관 건물 매입 사건도 불신을 키웠다. 현 집행부는 최근 적정 금액의 매수자와 협상을 주고받으며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까지 1억원 모금, 갈 길 멀다
현 집행부의 노력과 진정성은 배구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이 가장 먼저 나섰다. V펀드 계좌가 개설되자마자 1000만원을 입금해 '1호 기부자'가 됐다.
최 감독은 2015~2016 V리그에서 '스피드 배구'라는 혁명적인 전술을 선보이며 프로배구 사상 최초로 18연승이라는 대기록과 함께 정규리그 우승을 일궈냈다. 올 시즌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모으고, V리그의 역사를 바꾼 것이다.
최 감독의 기부 이후 V펀드 모금에도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수원시배구협회 회장인 신현삼씨도 지난 1월 1000만원을 기부했다. 이어 대학과 고교 팀 감독들도 속속 V펀드 모금에 동참했다. 은퇴한 이경수 전 KB손해보험 선수까지 "그동안 배구로부터 받은 사랑을 후배들에게 돌려주고 싶다"며 1000만원을 쾌척했다. 일부 프로 구단도 모금 행렬에 적극 동참했다. 정태영 구단주의 결단으로 현대캐피탈이 5000만원을 기탁했다. IBK기업은행도 1000만원을 후원했다.
현재까지 V펀드에는 1억원 가량이 모아졌다. 모금 기간으로 따지면, 목표 초과 달성이다. 당초 협회는 5월까지 1억원을 달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갈 길이 멀다. 1년만 하고 말 일회성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피드 배구를 완성하는 데 겨우 1달 훈련으로는 어림도 없다. 젊고 유망한 선수들을 국가대표팀에 발탁해 매년 일정 기간 체력 관리와 특별훈련을 실시하려면, 경제적 지원 체계도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신예 스타 발굴·제8구단 창단 동기부여, KOVO가 최대 수혜
그런데 정작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될 KOVO가 가장 싸늘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협회가 고교·대학 선수들에게 스피드 배구 특별훈련을 실시하는 목적은 세계 무대에서 한국 배구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데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프로배구 발전까지 감안한 다목적 포석이 담겨 있다. 장신의 신예 유망주들을 국가대표에서 실력까지 갖춘 스타 선수로 만들 경우, 가장 덕 볼 곳은 KOVO다.
이번 대표팀에는 200cm가 넘는 선수들이 많다. 그런 선수들은 고교와 대학 때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특별 관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식단, 체력 훈련, 재활 등 모든 면에서 시설과 시스템이 잘 갖춰진 진천 선수촌에서 틈틈이 특별훈련을 실시하는 건 매우 중요한 사업이다.
열악한 학교 시스템에만 맡겨놓을 경우, 200cm가 넘는 선수들의 성장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는 유럽·남미 선수들의 높이·스피드·파워와 격차를 좁힐 수가 없다.
무엇보다 협회의 프로젝트들이 잘 시행된다면 KOVO의 최대 숙원 사업인 제8 프로구단 창단에도 큰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 국가대표에서 함께 훈련하고 손발을 맞춘 선수들이 대거 신인 드래프트에 나올 경우, 신생팀 창단을 조기에 실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명분 때문에 대한체육회도 특별한 국제대회를 앞두고 있지 않음에도 진천 선수촌 사용을 흔쾌히 허용해 줬다.
재주는 협회가 부리고, 돈은 KOVO가 챙기겠다?
KOVO의 차가운 반응이 그동안 협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라면, 혁신을 주도하는 현 집행부를 다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게 V펀드에 기부금을 보내주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다.
신원호 사무총장에게 '가장 큰 수혜자인 KOVO가 V펀드에 동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는 "KOVO는 국가대표를 공식적으로 제도적으로 지원을 하는 단체다. 그런데 V펀드는 배구인들이 개인적으로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코멘트하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KOVO야말로 배구인들의 단체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V펀드가 취지도 좋고 발상도 좋은데, 상비군 체제와 펀드 형태로 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시스템적이고 제도적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V펀드는 그런 시스템과 제도를 만들기 위한 출발점이다. KOVO가 협회와 의논해서 지원 시스템을 갖추고, 사용 내역도 감시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면 되는 일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는 속담이 있다. 협회가 혁신 프로젝트로 신예 유망주들을 국가대표 스타로 키워 놓으면, 결국 프로 구단과 KOVO가 흥행에 따른 이득을 누리게 된다.
KOVO는 지난해 12월 KBSN SPORTS와 5년간 200억원이라는 역대 최대 규모의 중계권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KOVO가 V리그를 잘 운영한 측면도 있지만, 가장 큰 공은 선수들에게 있다. 선수들이 피와 땀으로 좋은 경기를 펼쳤기 때문이고, 국가대표를 거쳐간 스타 선수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내년 시즌부터는 남자 프로배구도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공개 선발 드래프트)이 시행된다. 그동안 V리그 흥행을 주도했던 세계 정상급의 외국인 선수들을 볼 수 없다. 국내 스타 선수들의 활약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상황이다.
장신의 신예 스타가 많이 나와야만, 프로배구가 현재의 인기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KOVO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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