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문송'할 필요가 없다

[2015 청춘! 기자상] 대학 구조조정과 구직난에 대학생들 '자조'

등록 2015.12.16 10:30수정 2015.12.18 14:42
0
원고료로 응원
대학생들의 자조, 오늘도 '문송합니다'

'문송(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신조어를 보도한 SBS뉴스 화면 갈무리 ⓒ SBS


[기사 수정: 18일 오후 2시 43분]

11월 셋째 주 일요일, 대학가 중심지의 카페에 김소연(24, 가명)씨와 친구들이 모였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난 소연씨의 표정은 밝았다. 소연씨를 비롯한 친구들은 모두 졸업을 앞두었거나 졸업 후 취업 준비 중이기 때문에 자주 만나기 어려웠다.

언젠가부터 그들은 만날 때마다 취업 이야기를 한다. 이날도 한 친구가 취업에 관련된 신조어를 이야기했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 '인구론'(인문계 학생 90%가 논다), '공바라기'(공대생이 되고 싶은 인문계생) 등이 언급됐다. 문과 계열 학과를 졸업한 학생들이 일자리에서 전공을 살리지 못하거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자 등장한 신조어다.

그 말을 듣던 다른 친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난 취업하기 힘든 세 가지 조건을 다 갖춘 지여인(지방대 여자 인문대생)이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계속해서 원서를 내고 있지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라고 말했다. 소연씨는 당일 모임에 나오지 않은 친구를 떠올렸다. 휴학 없이 졸업한 친구는 결국 공무원 준비를 하겠다며 연락을 끊었다.

모임이 끝난 후 소연씨는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학교 후문에서 도서관까지 가는 길에는 학과 구조조정을 규탄하는 대자보들이 붙어 있었다. 몇 주 전부터 학교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문과대 소속 학과 인원을 조정하거나 학과를 통폐합한다는 구조조정안 때문이다.

관련 글이 계속해서 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오고 게시글마다 논쟁이 벌어졌다.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내용의 피켓을 걸고 교내에 서 있는 학생들도 있었다. 인하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재학 중인 소연씨는 원하던 과에 입학했다며 기뻐하던 자신의 신입생 시절을 떠올렸다. 자신의 학과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그녀는 읊조렸다. '문송합니다'라고.


무엇이 학생들을 문송하게 만드는가

"문과라서 죄송합니다."

'문송'은 비단 소연씨만 쓰는 단어는 아니다. '문과라서 죄송'함을 느끼는 자세는 공과계열 학생들이 '취업깡패'(취업이 잘 되는 과의 학생)로 불리는 상황과는 대조적이다. 올해는 특히 인문계 전공자의 취업 상황을 반영한 신조어가 많이 등장했다.

시기에 따라 유행하는 신조어는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문송합니다'의 주요 원인으로는 기업들의 인문계열 출신의 채용 기피현상을 들 수 있다. 기업의 인문계 채용 수요는 점점 줄어드는 반면 이공계 출신 선호도는 증가하고 있다. 취업시장에서 이공계 채용 수요가 커지면서 인문계열 출신 학생의 취업난도 심각해지고 있다. 실제로 삼성그룹의 지난해 하반기 대졸 신입사원의 85%가 이공계 출신이었으며, SK의 경우도 70%가 이공계 전공자였다. 현대자동차그룹은 공채에서 이공계 전공자만 모집하기도 했다.

노동시장의 구조 때문에 대다수의 인문계 학생들은 취업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한다. '대학내일 20대 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인문·사회계열 학생의 71.6%가 전공과 관련 없는 직무에 지원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다시 대입 시기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전공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54.2%가 "선택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가장 큰 이유는 "취업이 너무 어려워서"(1위, 38.9%)다.

자신의 전공이 취업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여겨 이공계열로 전과하거나 복수 전공하는 학생들도 늘고 있다.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이아무개씨(23)는 "취업에 유리할 것 같아 산업공학과를 복수 전공하고 있지만 평소 배웠던 분야가 아니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프라임 사업, 그리고 인하대 구조조정

교육부는 이공계와 인문계의 수요·공급 불균형 해소방안으로 '산업연계 교육 활성화 선도 대학'(PRIME, 프라임 사업)을 제시했다. 프라임 사업의 목적은 대학의 자발적 교육개혁 유도다. 대상은 4년제 대학 19개 내외(2016년 3월 최종 선정·발표)며 내년 국가 예산안 기준 2012억 원을 지원한다. 선발된 대학은 최대 300억 원을 지원받는다.

인하대학교도 프라임 사업에 앞서 구조조정을 할 계획이다. 최순자 총장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하대 대혁신"이라 밝혔다. 혁신의 방향으로는 교과과정 개편, 입학정원 조정, 융합학과 신설을 언급했다. 최 총장은 취업률과 경쟁력을 기준으로 취약한 학과는 구조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문과대학이 가장 먼저 구조조정될 가능성이 우세하다.

현재 인하대 문과대는 총 9개 학과로 구성돼 있다. 11월 6일 최 총장이 제시한 학과구조조정안에 따르면 영어영문학과, 프랑스언어문화학과, 일본언어문화학과, 철학과 4개 학과는 2016년부터 교양대로 이동한다. 또한 2017년부터는 해당 4개 학과의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1월 30일 인하대 문과대학 건물에서 진행된 '인문학 한마리' 캠페인 ⓒ 강혜영


하지만 학내 반발이 거세지자 일부 여론을 받아들였다. 최 총장은 지난 11월 17일 문과대 교수를 만나 "프랑스언어문화학과와 철학과를 2016년부터 교양대로 이동시킨 후 폐지하고, 영어영문학과와 일본언어문화학과는 정원을 대폭 줄이겠다"는 구조조정 수정안을 제시했다. 일부 학과의 정원 축소를 제외하고는 기존 방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화경영학과와 문화콘텐츠학과는 2016년 신설되는 융·복합대로 소속을 변경하기로 했다.

이에 문과대 교수진과 학생들은 여전히 부정적인 입장이다. 인하대 영어영문학과 재학생 김아무개씨(22)는 구조조정 반대를 위해 대자보를 붙이고 있다. 문과대학 학생 총 투표에도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총 투표는 일방적 구조조정에 거부하기 위해 시행된다. 정부주도 프라임 사업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를 도울 세미나도 열 예정이다. 김씨는 "취업사관학원이 아닌 대학에서 말도 안 되는 근거로 구조조정이 시행될 순 없다"며 "구조조정안이 철회될 때까지 지속해서 현재 하는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라 말했다.

한편 인하대 관계자는 "대학 구조조정안이 논의되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확정된 바는 없다"고 전했다.

그들은 문송할 필요가 없다

프라임 사업이 취업난 해소의 취지로 시행되고 있지만 근원적 해결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사회발전은 이공계 중심의 기술만으로 이룰 수 없다는 점, 인문계 수준의 취업률을 보이는 이과의 기초학문은 구조조정 대상이 아니라는 점 등이 그 이유다. 그렇다면 대학은 어느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까. 인하대 소속 A교수와 B교수를 만나 의견을 들었다.

1. 대학의 자율화

A교수는 "교과부의 대학정책국은 없어져야 한다. 대학교육은 대학이 자율적으로 할 일이다. 대학의 생존을 위해서도 정책당국은 근시적인 사업을 추진할 것이 아니다. 대학이 스스로 바뀔 수 있도록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의 변화에 대해서는 "변화는 필요하나 기업의 선호에 맞춰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 자체의 운영 체제를 따르면서 사회 변화에 맞춰 적응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학생들도 정부의 일방적 정책이 자기 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넘어가지 말고 학교에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B교수는 "눈앞의 미스매치 해소를 이유로 중장기적 국가 발전을 포기하는 정책이 바로 프라임 사업"이라며 "구조조정은 각 대학의 상황에 맞춰 자율적으로 진행할 일이다. 정부가 구조조정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이를 따르는 대학만 지원하는 것은 교육의 자율성에 대한 침해이자 국가재원을 남용하는 행위"라고 밝혔다.

2. 소통과 합의

B교수는 대학 운영체계의 핵심으로 소통과 논리에 근거한 합의를 제시했다. 그는 "학교는 오랜 기간 개발해온 운영체계를 지닌 사회제도다. 일방적인 추진이 불러올 수 있는 대학사회의 황폐화·무기력화는 대학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구조조정을 통해 얻고자 하는 시너지를 만드는 데 실패하게 한다"며 "아무리 불통과 힘이 난무해도 대학만은 소통과 합의의 전통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3. 융합의 의미

A교수는 공과계열뿐만 아니라 인문계열 지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융합전공에 대해서는 "불가능하다. 융합은 원래 기업이 할 일이다. 대학이 운영체제에 맞춰 학생들을 기르면 기업이 인재를 뽑아 회사의 방향에 맞게 발전시켜야 한다"며 "학문 체계가 명확한 대학의 학부 과정에서 융합형 인재를 만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기초를 다진 상태에서 융합형 인재를 만들어야 한다. 학부에서 커리큘럼에 따라 전공을 배운 후 대학원에서 다른 분야와 접목하는 것이 진짜 융합"이라고 밝혔다.

4. 문송할 필요가 없는 사회

A교수는 "기업은 범용 학문인 인문학을 간과하고 실용 학문만을 원하기 때문에 미스 매치가 발생하는 것"이라며 "사실은 문사철(문학·역사·철학)이 사회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요소다. 학생들은 취업이 안 된다는 이유로 주눅이 들지 말고 인문학적 소양을 탄탄히 쌓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B교수는 문과라서 취업이 안 된다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라고 밝혔다. 또한 "문과 출신 학생이 취업 준비를 게을리했다면 문제가 된다. 열심히 했는데도 취업이 안 되는 상황은 정책적 실패 때문이다. 국가가 문과 출신 학생들의 일자리를 확충해야 한다. 문과라고 죄송할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청춘들

오전 7시경 소연씨는 도서관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해가 뜨지 않았지만 버스 안은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녀는 오늘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입사지원서 작성부터 자격증 공부, 2주 후 보는 전공 시험까지 준비할 게 많았다. 졸업까지 한 학기가 남았지만 취업 준비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 학기가 끝나기 전에 토익 점수를 900점대로 높여야겠다고 다짐했다.

도서관에 가는 길에는 구조조정 반대를 외치는 대자보가 늘어나 있었다. 한 대자보에는 "우리도 인하대학교의 구성원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소연씨는 며칠 전 친구들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왜 내가 그동안 '문송합니다'라는 말에 공감했을까. 나도 구성원이잖아." 그녀는 더 노력해서 문과대의 위상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열람실에 들어가니 이미 자리가 반 이상 차 있었다. 소연씨는 되새겼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죄송할 필요는 없어.' 소연씨는 자리에 앉아 500쪽이 넘는 전공서적을 펼쳤다. 언젠가 '문과라서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2015 오마이뉴스 20대 청춘! 기자상' 응모글입니다.
#문송합니다 #프라임 사업 #인하대 구조조정

AD

AD

AD

인기기사

  1. 1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2. 2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