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고시촌 쇠망사

막 내린 전시 '신림동 청춘-고시촌의 일상'

등록 2015.11.11 09:46수정 2015.11.1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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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 <'신림동 청춘'-고시촌의 일상> ⓒ 이두리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 '신림동 청춘-고시촌의 일상' 전시 마지막 날인 11월 8일 일요일에는 비가 내렸다. 겨울로 들어서는 날, 입동에 내리는 비는 가을을 싣고 떠나보내는 막차였다. 또한 겨울을 실어오는 첫차이기도 했다. 비가 그치면 부쩍 쌀쌀해진 날씨 탓에 모두 옷깃을 여밀 것이다. 올해 말, 다음해 초에 치를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찬바람이 더욱 날카롭게 느껴질 터. 시험날이 다가올수록 불안감과 자신감이 엎치락뒤치락 자리를 바꿔가며 의지를 흔들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겨울은 지나가고 봄은 오기 마련이다.

'신림동 청춘'은 두 달 전, 9월 11일에 시작한 전시다. 다 끝나갈 때가 되어서야 전시소식을 서울시 발간 월간지 <서울사랑> 과월호에서 보았다. 신림동 고시촌을 전시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 강하게 끌렸다. 가느다란 줄로 이은 수준이지만 신림동과 나는 연(緣)이 있었다. 꼭 관람하고 싶었다.


십여 년 전, 새내기 법대생이 되어 첫 전공필수 과목 '민법총칙' 교과서를 사려고 신림동을 방문했다. 말로만 들었던 고시촌은 하나의 독립국가 또는 자치지역 같았다. 즐비하게 늘어선 학원, 독서실, 고시서점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 대부분은 추리닝 차림에 책가방 멘 고시생이었다. 낯설고 신기했다. 그 뒤로도 종종 신림동에 갔다. 그곳에서 학원을 다니거나 거주하지는 않았다. 책과 고시학원 강사의 강의녹음 테이프를 사러 들렀다. 대학교 고학년 때는 고시생 선배가 사는 고시원에서 묵은 적도 있다. 그와 함께 고시식당에서 아침을 먹기도 했다. 취업하고 직장인이 되어서는 방값이 저렴하고 강남으로 출근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 고시촌에서 한 달 정도 자취를 하기도 했다.

'신림동 청춘'은 "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낯선 이들의 삶이 모여 만들어진 특수한 공간 '신림동 고시촌'의 지역사를 살펴봄으로써, 한국 근대화 과정 속 도시서울의 변모양상을 재조명하고자"(서울역사박물관 전시 안내글 참고) 기획한 전시다.

서울 관악산 기슭에 자리 잡은 신림동은 1960년대 후반에는 도심 철거민의 이주정착지였다. 1975년 서울대 캠퍼스가 옮겨온 뒤 하숙촌이 되었고 학원과 고시준비생이 몰려오면서 고시촌으로 자리 잡았다. 2008년 로스쿨이 도입되고 나서는 고시생과 관련 상업시설이 점차 줄어들었다. 지금은 새내기 직장인, 알바생 등 1인가구 구성원이 자리 잡는 대표적 동네다. 특별전을 연 서울역사박물관 강홍빈 관장은 "'신림동 청춘'은 이 특별한 동네의 형성·변천사를 배경으로 고시촌에서의 일상을 조명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젊은 세대의 삶과 한 동네의 성격이 어떻게 시대상황과 만나 적응하고 변화해 가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고 전시목적을 밝혔다. (전시자료-'<신림동 청춘>특별전을 열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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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고시촌 버스정류장 재현 전시물 ⓒ 이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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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고시촌 버스정류장 재현 전시물 ⓒ 이두리


전시공간인 서울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B존은 네 부분으로 나뉘었다.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신림동 입장'은 고시촌의 형성 기원, 고시열풍으로 확대되고 윗동네와 아랫동네로 분화한 고시촌을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신림동 고시촌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1부 '안녕 고시촌'은 고시생의 발길이 닿는 장소와 그들의 생활을 세밀하게 파고든 부분이었다. 고시식당, 독서실, 서점과 복사집, 고시공원과 헬스장, 녹두거리 등 고시촌 구석구석을 훑고, 공부에 올인하는 고시생의 24시를 담았다. 고시원의 책상과 고시식당 쿠폰을 재현한 전시물을 보자 예전에 선배가 사는 고시원에서 하룻밤 묵었던 때가 떠올랐다. 고시원 방은 남자 두 명이 간신히 누워 잘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선배와 나는 좁은 공간에서 조심스레 속닥거렸다. 선배가 푸념했다.


"옆방 사람이 얼마나 까칠한지 몰라. 양말 개고 있는데 나보고 시끄럽다며 항의한 적도 있어. 완전 소머즈(70년대 후반 미국드라마, 초능력자인 여자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귀야."

선배의 말은 웃기면서도 슬펐다. 시험을 앞둔 자의 예민함이 때론 초능력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실없는 생각을 했다. 그 초능력자가 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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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 방 모형 전시물 ⓒ 이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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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 책상 재현 전시물 ⓒ 이두리


다음 날, 선배를 따라간 고시식당은 별천지였다. 선배가 월식으로 쿠폰을 끊어서 이용하는 곳이었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뷔페식으로 여러 음식이 차려졌다. 밥과 반찬은 물론 라면과 시리얼도 준비되었다. 달걀프라이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코너도 있었다. 손님 대부분은 고시생이었고 혼자였다. 둘 이상이 모여 같이 밥을 먹는 일행은 드물었다. 고시식당에서 먹은 아침밥 맛이 어렴풋하게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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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식당 간판, 쿠폰 재현 전시물 ⓒ 이두리


1부의 전시는 디테일을 깨알같이 잘 살렸다. 여성 관람객 두 명이 전시물을 보고 연신 '맞아, 맞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듯했다. 그들은 '고시촌 괴담' 전시글이 붙은 벽면 앞에 한참 머물렀다.

- 일 년에 한 명씩은 꼭 죽는다고. 최근에도 하나 있지 않았어요? 여자 친구랑 동거하던 고시생이 있었는데, 그 여자 친구가 어느 날 아침에 보니까 고시생이 목매고 자살을 한 거야. 그래서 신고를 했더라고. 종종 그렇게 자살해요. 고시생이. 가끔씩 앰뷸런스랑 경찰차 와 있으면 그거야. (최○○, 고시원 운영. 전시글 일부)

두 관람객 가운데 한 여성이 "얼마 전에도 이런 일 있었어" 하고 말하자 상대방이 "진짜? 어디서?" 하고 되물었다. 그들은 소곤거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2부에서는 '고시촌 너머 신림동'이라는 제목 아래, 철거민이 모인 60·70년대 사진, 서울대 관악캠퍼스 기공식 영상, 녹두거리의 저항문화 자료(민중가요 테이프, 사회과학서적, 서울대 학생이 고 김진균 교수에게 보낸 편지 등)를 볼 수 있었다.

에필로그인 '지금 신림동'에서는 텅 빈, 지금의 고시촌을 다루었다. 고시생이 떠난 자리를 주머니사정 넉넉지 못한 청년들이 채우고 있다. 1인가구 주거자들은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을 전전하며 신림동 고시촌을 헤맨다. 같은 고시원이더라도 방에 창문이 있는지, 침대가 있는지에 따라 월세가 다르다. 1인가구 주거자들은 한 푼이라도 더 아낄 수 있는 주거를 찾아 옮겨 다닌다. 이 사람들은 발자크가 쓴 소설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 고리오와 비슷한 처지다. 1800년대 초 프랑스 파리의 하숙집에 살던 고리오도 하숙생활 2년차, 3년차에 삯이 싸고 크기는 더 좁은 위층으로 방을 옮겼다. 2층에서 3층으로, 3층에서 4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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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 고시원 시대별 변화 모습'_서울역사박물관 안내 브로셔 촬영 ⓒ 이두리


관악구와 주민들은 지금의 고시촌을 고시생뿐 아니라 지역주민, 고시생 아닌 거주자들도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시촌 영화제를 개최하거나 고시원을 창작자 입주 하우스로 조성하여 새로운 활력을 공급하기도 한다.

신림동 고시촌, 참 희한한 동네다. 고시 덕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풀어 올랐고, 로스쿨 때문에 거짓말처럼 사그라진 지역. 청춘을 저당 잡히더라도 꿈, 출세, 명예를 돌려받겠다는 젊은이들의 한판 승부처. 신림동 고시촌은 대한민국의 한 단면이었다. '신림동 청춘'은 신림동 고시촌의 쇠망사를 간략히 모아서 보여준 전시였다.

박물관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그칠 줄 알았던 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 차를 타고 도로를 어느 정도 달렸을 때에야 비가 멎었다. 여전히 흐리긴 했지만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수능을 포함해 곧 시험을 치를 수험생들이 떠올랐다. 신림동 고시촌에 머물러 있는 고시생, 이제 막 머물기 시작한 주머니 가벼운 청년들이 생각났다. 어쨌든 비는 그치고 맑은 날은 오기 마련이다. 쇠했든 망했든, 남은 사람들은 삶을 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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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림동 청춘 전시영상 ⓒ 이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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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신림동 고시촌'에 있다 전시 영상 ⓒ 이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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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영상을 보는 관람객 ⓒ 이두리


덧붙이는 글 개인블로그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신림동 #고시촌 #고시원 #서울역사박물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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