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의 몫, 이대로도 충분하다

[그림책이 건네는 세상살이 이야기 21] <작은 발견>

등록 2015.09.22 09:14수정 2015.09.2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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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알아야 할 뉴스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그의 저서 <뉴스의 시대>를 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뉴스는 왁자지껄하게 쇄도하면서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에 침투해왔다. 오늘날 고요한 순간을 누린다는 건 얼마나 커다란 성취인가. 깊이 곯아떨어지거나 친구와 산만하지 않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참으로 흔치 않은 기적이 아닌가. 우리가 뉴스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단 하루라도 빗소리와 자기만의 상념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실로 구도자적인 훈련이 필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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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발견>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 사계절 ⓒ 최혜정

이러한 판단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요란한 곳인지를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고요할 수도 없고, 산만하기만하고, 상념 속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조차 없는 세상에서 살다보면 우리들은 자칫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을 놓치곤 합니다. 한참을 바쁘게 살다 문득 자신을 돌아본 순간, 내게 있어야 할, 가치 있는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면 살아야할 이유, 살아가는 기쁨, 삶에 대한 열정까지 잃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을까요? 너무 피곤하게 살다보니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너무 일만하며 살다보니 인간의 근원인 자연의 향기를 잊어버립니다. 조직화된 사회에서 성공 지향적으로 살다보니 나 자신의 존재 가치는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작은 발견>(사계절)은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그 무언가에 대해 돌이켜 생각하며 바라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옛날 물건을 파는 가게에서 이 실패를 찾았어요. 누구도 낡은 실이 감긴 실패를 사 가지 않았어요. 한때는 제 몫을 충분히 했을 거라는 걸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의 하나인, <작은 발견>이 발견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래된 것의 가치'입니다.


안타깝게도 OECD 주요국의 노인 자살률 조사에서 우리나라가 1등을 했다고 합니다. 명예로운 1등이 아니라 부끄러운 1등입니다. 무엇이 노인들을 자살로 내몰았을까요?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린 노인들은 더 이상 삶을 연장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 능력이나 신체적 우월함으로만 판단하는 세상에서 나이 들어 직업을 구할 수 없고, 힘 없고, 아프기만 한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작은 발견>은 '실패' 이야기로 오래된 것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오래된 것이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건 이들이 '필요한 바로 그 순간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단한 일이 아니더라도 '이들이 마땅히 할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일을 열심히 할수록 점점 더 많이 풀려나갔다고 합니다. 실이 가득 감겨있던 실패도 시간이 지날수록 홀쭉해지기 마련이니까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거나 기분 좋은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천천히 실을 풀어야할 때도 있었고, 다급하게 풀어야할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일보다는 누군가를 도울 때 더 많이 풀려나갔다고도 합니다. 참 많은 일을 해 왔다고 합니다.

영화도 문학도 우리네 아버지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 <국제시장>은 격동기를 살아온 아버지께 위로를 보내며 <허삼관매혈기>는 힘들었던 아버지의 심경을 다독여줍니다. 하지만 현실은 피곤한 퇴근길 지하철에서 자리를 차지한 노인들이 많아졌다고 불평하고, 빨리 달리지 못하는 노인들을 두고 버스는 가버립니다. 많은 시간 소중한 일들을 만들어 온, 역사를 만들어 분들이 점점 더 소외당합니다.

너무 빨리 변화하고 지나가버리는 세상에 살다보니 이미 지나간 것들에 대한 가치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고 힘없고 보잘 것 없지만 늘 우리 곁에서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었던 평범한 것들, 종이, 연필, 가위와 같은 것들처럼 그저 묵묵히 우리 삶을 도와주었던 '어른'들의 삶을 작은 물건 '실패'를 통해 배웁니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열심히 글을 써 잉크가 다 닳아버린 볼펜심을 생각해보세요. 몽당연필은 어떤가요? 다 타버린 양초는요? 눈금이 없어진 각도기는요? 소매 끝이 헤져버린 와이셔츠는요? 누렇게 바래버린 책은요?  구멍 숭숭 낡아버린 걸레는요?

휙 던져 쓰레기통으로 보내기 전에 그 가치에 대한 '작은 발견'을 한다면 이런 물건들에게도 경의를 표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지하철에서 기꺼이 웃으며 자리를 양보하고, 기다리고, 친절히 답하고, 겸손히 인사하게 될 것입니다.

작은 발견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그림, 이지원 옮김,
사계절, 2015


#그림책 #작은 발견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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