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가 만든 '꿈의 공간' 베일을 벗다

해남 금쇄동 유적, 발굴 통해 모습 드러내... 보존 및 복원 기대

등록 2015.08.06 15:21수정 2015.08.0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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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의 비조라 일컫는 고산 윤선도가 원림을 경영하며 <산중신곡>을 썼던 해남의 금쇄동 유적(사적 432호, 윤선도 유적)이 발굴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4일 금쇄동에서는 금쇄동 발굴에 참여하였던 마한문화연구원(원장 조근우)의 주최로 그동안 발굴된 금쇄동 유적에 대한 설명회가 있었다. 금쇄동 발굴은 지난 3월부터 사적지의 보존과 복원을 위해 실시된 것이다. 이번 발굴을 통해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금쇄동 유적의 성격을 규명하고 유적의 보존, 복원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산 윤선도의 흔적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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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쇄동 교의재 발굴지 고산의 원림유적인 금쇄동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교의재 집터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있다. ⓒ 정윤섭


금쇄동은 고산 윤선도가 54세 되던 해 금쇄석궤(金鎖錫櫃)를 얻는 꿈을 꾸고 나서 발견하였다는 곳으로 고산이 죽고 난 이후 최근까지 그 터에 대한 정확한 위치 비정 없이 산성 안에 묻혀 있었다. 지난 1995년 지역의 연구단체인 해남향토사연구회를 비롯해 해남문화원에서 이곳에 대한 끈질긴 조사연구 끝에 고산의 원림지로 밝혀진 바 있다. 이를 통해 1999년 명지대건축문화연구소의 지표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지난 2001년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금쇄동은 고산이 '오우가'로 잘 알려진 <산중신곡>을 지었던 곳이다. 이곳이 발굴을 통해 당시 고산이 조영했던 흔적이 그대로 나타남에 따라, 원림을 경영하며 자연에 묻혀 살았던 고산의 금쇄동 생활이 새롭게 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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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재터 발굴설명 강학의 장소로 쓰였다는 교의재 터 앞에서 문화재 위원들이 발굴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 정윤섭


이곳 금쇄동은 산중에 조영된 우리나라의 원림 유적으로는 거의 유일한 곳으로 이곳이 복원되면 완도 보길도 부용동 일대의 고산 유적과 함께 우리나라 전통 원림의 대표적인 곳으로 부각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마한문화연구원에 의해 발굴이 진행된 이곳은 그동안 고산이 직접 조영한 것으로 알려진 교의재, 회심당, 연지, 휘수정을 비롯해 산성의 남문 등을 중심으로 발굴이 진행됐다. 이번 발굴에서는 다량의 기와 조각을 비롯하여 자기편이 출토되어 그 거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발굴지 중 교의재 터에서는 다량의 기와 조각과 함께 고양이 모형의 토기가 출토되어 그 용도에 대한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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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지에서 출토된 기와편과 자기편 화려한 연화 무늬의 기와편을 비롯해 고려시대까지 올라가는 기와편도 출토되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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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형상의 토기 고양이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듯한 토기가 교의재 터 발굴에서 출토되었다. ⓒ 정윤섭


고산이 제자나 자제들에게 강학하는 장소로 쓰인 교의재는 발굴결과 온돌의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난방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촘촘한 석축열과 하부로 향하는 온돌의 연기 배출구가 매우 독특한 경우로 밝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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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재 구들의 모습 온방을 위해 놓인 구들의 모습이 거의 원형대로 남아있다. ⓒ 정윤섭


이곳 교의재 옆의 둥그런 석축열은 그 용도에 대해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성곽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고 보기도 하지만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오직 추측할 수밖에 없다.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형태의 구조물로서, 다양한 방면에 박학다식했던 고산이 자신의 새로운 실험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상상할 뿐이다. 그 상상 중에 하나는 원형의 가운데에 거대한 기둥을 세우면 해시계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또한, 고산의 거처지였던 회심당 역시 기와지붕이 들어섰을 것으로 보이는 초석을 비롯하여 온돌 구조의 석축열이 그대로 확인되었다. 회심당은 월출바위 아래에 있는 집으로 고산이 주로 거처한 공간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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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당터 발굴 고산이 주 거처지로 삼았다는 회심당터의 발굴 모습 ⓒ 정윤섭


회심당 아래의 상지, 하지와 함께 있는 불훤료 지역 역시 당시 정자형 구조의 집이 들어서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석축열의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고 있다. 이와 함께 금쇄동의 비경 중에 가장 뛰어난 곳으로 알려진 휘수정 발굴에서도 정자를 짓고 비경 속에서 자연을 감상하며 지냈던 고산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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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훤료와 연지 상지와 하지 사이에 불훤료가 자리하고 있으며 정자형의 건물이 있어 고산에게 휴식의 공간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 정윤섭


휘수정은 그동안 성벽과 같은 석축열로 인해 금쇄동 산성의 외성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나 추측했지만, 발굴결과 절벽의 바위 면에 석축을 쌓아 올려 정자를 지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마한문화연구원 측에 의하면 정자는 한 칸 반의 크기에 북쪽 면은 바깥으로 향하는 누마루의 구조를 가진 멋진 정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건축적으로도 독특한 구조였으며, 정자의 누마루 아래쪽은 불을 땠을 것으로 보이는 아궁이 구조도 하고 있어 주거 공간으로도 이용되지 않았나 보고 있다.

금쇄석궤를 얻어 발견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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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수정 발굴지 금쇄동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는 휘수정에 정자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 정윤섭


고산의 문학 공간으로 해석하여 본다면 보길도에서 지었던 <어부사시사>는 어촌을 배경으로 한 대표작이며, 이에 반해 산중인 임천(林泉)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것이 해남 현산 금쇄동에서 지었던 <산중신곡>이라고 할 수 있다.

금쇄동은 고산이 금쇄석궤(金鎖錫櫃)를 얻는 꿈을 꾸고 나서 발견한 곳으로, 금쇄석궤는 금쇄동의 산성 속에 숨어 있었던 자신이 찾던 이상향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금쇄석궤'는 금쇄동 정상부위의 넓은 분지에 머리띠 형식으로 조성한 산성을 말하고 있다. 이 산의 정상부에 오르면 약 3만여 평의 분지가 나타나며 이 분지를 감싸고 1.5km가량의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이 산성에 대해서는 여타 지리지나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고 1656년 유형원이 지은 <동국여지지>에 이에 대한 기록이 나올 뿐이다. 유형원(1622~1673)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금쇄동이 그가 만든 지리지에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고산의 원림지인 금쇄동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쇄동은 해남현의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산세는 면곡(面曲)하고 험령(險嶺)을 넘으면 그 위에 고성지(古城址)가 있다. 인조 때 현사람 윤선도가 산의 높은 곳을 금쇄라고 이름 지었다."

고산은 이곳 금쇄동에 회심당, 휘수당, 교의재 등을 짓고 연못을 파서 연꽃과 고기를 길렀다는 기록이<고산연보>에 나온다.

금쇄동 22개 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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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의 석축열 원형의 석축열이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 정윤섭


고산은 그의 수필집인<금쇄동기>에서 22개 비경을 비롯한 금쇄동에 관한 산수경관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금쇄동기>가 문학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금쇄동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그의 뛰어난 관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금쇄동을 오르다 보면 고산이 직접 명명한 불차, 하휴대, 기구대, 중휴대 등 20여 개에 이르는 지명들이 차례대로 나타난다. 고산 자신이 직접 주변 자연의 형상과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이름 지은 것으로, 명명된 지명들을 보면 그의 산수 자연에 대한 예지력에 감탄하게 된다.

지명을 따라 산길을 오르면 계속하여 하휴대, 중휴대, 상휴대와 같은 22개의 지명이 하나씩 나타난다. 이렇게 고산이 부여한 지명을 따라 올라가면서 앞을 보면 주변 자연과 산세 높고 웅장한 두륜산의 원경이 시시각각 새로운 모습으로 눈앞에 다가오며 비경을 선사한다.

산의 중턱쯤에 오르면 폭포가 떨어지는 절벽 앞에 이른다. 이곳 폭포가 있는 곳이 휘수정으로 휘수정 일대는 금쇄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경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10m가 넘는 바위에서 비폭이 떨어지고 난가대의 기묘한 바위, 멀리 대흥사가 있는 두륜산의 산경이 한눈에 들어와 고산은 이곳을 선경이라 하였으며 인간계와 선계의 경계로 표현하고 있다.

이곳은 겨울에도 바람이 불지 않을 만큼 아늑한 지형이어서 고산은 이곳을 '휴식공간'이자 '문학적 영감처'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휘수정 위를 오르면 허물어진 금쇄동 산성의 성벽이 나타난다. 금쇄동 산성의 축조 연대와 조성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고려말 왜구들이 날뛰는 서남해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해남 치소를 새로운 곳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또 고려의 삼별초 항쟁과의 연관성도 조심스럽게 대두되고 있다.

이 성은 쌓았다가 써보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던 것을 고산이 발견하고 은둔처로서 자신만의 이상적 공간으로 가꾼 것이다. 산성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수백 명의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과 물 등 주변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산은 이곳 성안의 터나 유구를 그대로 이용하여 자신의 은둔처로 삼아 원림을 조성한 것이다.

고산이 산성 안에 조성한 연못과 정자, 집터 등은 이러한 입지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며, 산성 안에는 이러한 지형적 조건을 이용하여 조성한 건물지와 연지 등의 구조물들이 남아 있다.

금쇄동의 여러 건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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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 발굴지 금쇄동 산성의 남문발굴 모습. ⓒ 정윤섭


금쇄동 산성 안 3만여 평의 분지 안에는 고산이 주 거처지로 삼은 회심당(會心堂)을 비롯하여 고산을 따르던 후학들이 숙식하였던 곳으로 여겨지는 교의재(敎義齋), 주변에 연못을 파고 휴식의 공간으로 이용된 불훤료(不諼寮)를 비롯해 이곳의 자연경관과 공간을 이용하여 조영한 여러 흔적이 남아있다.

불훤료 지역은 연지가 상하로 구분되어 있어 가운데의 공간에 정자와 같이 휴식할 수 있는 건축물이 있었지 않나 추측하고 있다.

이곳 불훤료에 조성된 연지를 보면 보길도의 세연정처럼 지형 지세를 잘 이용할 줄 하는 고산의 조영 감각을 읽을 수 있다. 보길도의 세연정을 가보면 상류의 물길이 곧바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타원형의 지형을 따라 서서히 물이 굽이져서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간에는 석축을 쌓아 물이 곧바로 흘러내리는 것을 다시 한 번 차단하여 물의 흐름을 완만하게 조절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쪽에는 물을 막아 연못을 이루게 하는 보를 만들고 있는데 이는 돌을 이용해 둑을 만든 석보의 구조를 하고 있다.

불훤료 위에는 회심당(會心堂)이 있다. <고산연보>에는 "공이 항상 회심당에서 거처했으며 날이 어두워지면 불훤료에 나아가 편히 쉬거나 정신을 집중했고 시를 짓거나 거닐 때는 휘수정에서 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회심당이 주 거처지로 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산의 금쇄동 생활은 회심당을 주 거처지로 삼고 교의재에서 강학하거나 불훤료와 휘수정 주변을 주유(周遊)하며 일과를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회심당 바로 뒤에는 월출암(月出岩)이 있다.<금쇄동기>에 보면 월출암은 수백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로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달이 밝은 밤이면 고산은 이곳 월출암에 앉아 달을 보며 자신의 시심을 키우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월출암 위에는 이곳에 머무르는 자녀나 제자들이 강학의 공간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교의재가 있다. 교의재를 지나 산성의 정상부에서 주변을 바라보면 두륜산을 비롯하여 멀리 달마산 등 첩첩한 산들이 한눈에 들어와 새삼 절경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산은 금쇄동을 조성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쇄동기>의 말미에서 금쇄동을 조성할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내가 휘수(揮水)와 회심(會心)을 경영한 것은 배고프고 목마른 자가 음식을 생각함과 같음인데, 그 시절에 마침 크게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굶주림에 허덕이므로 공사(工事)할 식량을 마련할 계책이 없어서 재산을 팔아 인부 수인을 사서 이 일을 착공하였으니 천석(泉石)은 역시 마음속에 일일 뿐만 아니라 재정(財政)이 있어야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물음에 대한 해답 같은 자기 고백으로 <금쇄동기>를 끝낸다.

"대체로 나의 산수(山水)를 사랑하는 버릇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반드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요, 나 또한 스스로 비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여의게 하고, 음악이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고 하였으니, 재산은 비유컨대 고기(肉)이고, 천석(泉石)은 비유컨대 음악과 같다. 나의 취하고 버림이 진실로 이러한 뜻에 있으니 후세의 군자들이 반드시 이를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금쇄동 #발굴 #교의재 #원림 #휘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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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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