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시대... 다시 '윤동주'를 읽는다

[서평] 청년 윤동주의 삶과 문학 이야기 <시인 동주>

등록 2015.04.06 15:12수정 2015.04.06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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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4월이다. 설마 했는데 기어코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세월호 1주기를 코앞에 두고 유가족은 삭발을 단행했다. 삭발은 목숨을 내놓겠다는 의미란다. 참사가 발생한 2014년 4월 16일부터 하루하루가 갈수록 절망은 더 깊어졌다. '희망'이라는 두 글자는 정녕 절망의 밑바닥에 닿고서야 비로소 떠오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은 더 깊이, 더 정직하게, 더 깨끗하게 절망해야 할 때인가. 삭발하는 유가족의 머리 위에 고통의 무게를 짊어진 '십자가'가 걸려 있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70년 전, 무명의 젊은 시인도 그랬나 보다.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야만의 시대, 시인은 절망의 폐허 위에서 담담하게 '십자가'의 길을 노래했다. 그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눈물이 마를 줄 모르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마주 대하게 되는 그 길이 자신 앞에 높인다 해도, 저물어가는 노을 따라 조용히 걸어갈 수 있을 것"(본문 173쪽 중에서)이라고 생각했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 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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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동주> 표지 <시인 동주>(안소영 지음 / 창비 펴냄 / 2015.03 / 1만3800원) ⓒ 창비

작가 안소영은 소설 <시인 동주>에서 청년 윤동주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한국 사람이라면 <서시>의 한 구절 정도는 쉽게 외울 정도로 친숙한 시인이지만, '저항시인'으로 일제 감옥에서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 말고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작가는 치밀한 고증을 통해 윤동주의 삶을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식민지 청년으로서 시인의 내적갈등과 고뇌가 시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를 읽다 보면, 결국 '글이란 글쓴이의 삶으로 평가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윤동주가 청년 문학도로 살아가던 시기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제의 패망이 점점 다가오던 시기였다. 전쟁이 극에 달할수록 식민지 조선에 대한 폭압과 수탈, 전시 강제 동원은 더 악랄해져갔다. 이광수·최남선 같은 이름 있는 문인들이 전쟁을 찬양하고, 총독부의 시책을 선전하며,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일제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윤동주와 벗들은 '문학의 사명이란 무엇인가',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해 고뇌했다.

시인은 "잘못된 전쟁을 지지하고 동포들의 고달픈 삶을 외면하는 것이 문학의 길이라면 가지 않겠다"며 "감투와 명성을 탐하고 궤변으로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자들이 문인이라면 되지 않으리라"고(본문 127쪽 중에서) 다짐한다. 그는 <쉽게 쓰여진 시>라는 작품에서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맑고 고운 시를 노래한다. 문학마저 야만과 반역의 나팔수가 되어 버린 때, 일본어가 아닌 우리말로 시를 쓴다는 것은 "목숨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윤동주는 그저 담담하게 쓰고 또 썼다.

"동주의 사색과 감성, 마르지 않고 우러나오는 시상을 표현하는 데 우리말만한 도구가 없었다. 마음속에 담아 놓은 생각과 입에서 맴돌기만 하는 표현이 하나의 시어를 만나 떠오를 때는, 가슴이 찌르르해지고 눈물이 핑 돌 만큼 좋았다. 전쟁과 죽음과 파괴로만 달려가는 이 삭막하고도 불안한 시대에, 무언가 움터 오는 게 있다는 사실이 벅차기도 했다. 돌담이나 아스팔트 바닥을 비집고 솟아나온, 연둣빛 고운 생명 같은 시였다."
- 본문 245쪽 중에서

1943년 7월, 일본 유학 도중 '내선계 요시찰인'으로 감시를 받아오던 윤동주는 절친한 벗이자 친척이기도 한 송몽규와 함께 일본 경찰에 연행된다. 이른바 '재(在)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이다. 모진 매질과 고문은 견딜 만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우리말로 쓰인 윤동주의 시작 노트와 일기장을 강제로 일본어로 번역하게 했다. 고문 경찰이 지켜보는 앞에서 우리말로 쓰인 시를 일본어로 바꾸는 작업은 창자를 다 끄집어내는 것처럼 견디기 힘들었다. 시인은 시를 빼앗겼다.

1944년 2월, 윤동주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이곳에서 윤동주는 전쟁포로나 죄수들을 상대로 한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참혹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1945년 3월,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지 만 27년 2개월. 시인의 생명은 차가운 일본의 감옥에서 그렇게 꺼졌다.

윤동주 이후 70년, 무엇이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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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독립운동가 시인 윤동주 ⓒ 시몽포토에이전시=연합뉴스


마침내 해방이 왔다. 일제 식민지에서는 벗어났지만 세상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그럴수록 안타까운 생을 마감한 시인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 갔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벗들은 시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했다. 생애 첫 번째 시집이 유고 시집이 된 셈이다. 윤동주는 생전에 등단하지 못한 '문학도'에 불과했지만, 사후에 알려진 그의 시는 많은 이들의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남았다.

암흑의 시대, 묵묵히 우리말로 우리의 시를 써 온 청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자부심과 위안이 되었다. 시인 정지용은 유고 시집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일제 헌병들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뱉을 것뿐이나, 무명의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 시인 정지용, <윤동주 유고 시집 서문>, 314쪽 중에서

시인이 떠난 지 70년, 우리 시대는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일제로부터의 독립이 곧 완전한 해방은 아니었다.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히 악은 거대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힘은 약하다. 거짓이 진실을 호도하고 야만이 인간의 탈을 쓴 채 우리를 기만할 때, 다시 윤동주를 읽는다. 끝없이 빠져드는 절망의 웅덩이 속에서도 순정한 시 한편 길어 올리던 그의 담담하지만 강한 정신세계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행복이란 무엇이가, 더불어 행복한 삶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 자신의 삶에서 다 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혹은 다음 세대에게 넘겨준다. 이 세상에 사유하는 인간이 스러지지 않고 남아있는 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시대를 이어가며,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거쳐 가며,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의 나라도 빼앗고,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고 모욕하는, 심지어 다른 사람의 자유와 생명마저 빼앗아버리는 야만의 시대라 해도."
-  본문 253쪽 중에서
덧붙이는 글 <시인 동주>(안소영 지음 / 창비 펴냄 / 2015.03 / 1만3800원)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시인 동주

안소영 지음,
창비, 2015


#윤동주 #서시 #저항시인 #십자가 #송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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