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와 윤이상, 한 '자궁'에서 태어났다

[통영에세이⑤] 통영의 자궁, 강구안

등록 2014.12.27 12:43수정 2014.12.27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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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처럼 생긴 통영 강구안. 어둠을 밝히는 빛들이 아름답다 ⓒ 통영시 홈페이지


경남 통영에서 어릴 적부터 살아오면서 내가 신기해 하던 것 중 하나가 기상뉴스에 나오는 서울의 온도였다. 겨울이 되면 영하 십 몇 도까지 내려가버리기도 하는 저 차가운 동네는 뭐지?


통영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나는 눈이 쌓이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서울에서 첫겨울을 맞으며 눈사람을 처음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점차 서울이란 곳은 공기의 온도뿐 아니라 삶의 온도도 통영보다 차갑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에게도 사람이라 부르는데, 서울엔 사람이라 부르기 힘든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럴수록 나는 통영의 자궁, 강구안이 그리워진다.

강의 하구같은 바다가 남쪽을 보고 한빨띠('많이'의 통영사투리) 입을 벌리고 있는 강구안은 사람들이 아는 통영의 대부분이 태어나는 곳이다. 느긋한 바람과 부드러운 산등성이도, 통영 사람들의 생활도, 통영이 잉태한 예술인들도 다 그 바다 안에 담겨 있다. 그렇기에 고단한 일상을 푸는 한 잔처럼 통영에 한껏 취하고자 오는 손님들이라면 강구안에 눈을 담그고 바다를 음미해 보아야 한다.

강구안의 동쪽 끝은 남망산 공원이고, 서쪽 끝은 동충이라 부르는 곳이다. 양 끝은 오므린 입술처럼 사이가 좁지만 그 안의 바다는 넓어서 마치 큰 호수같다. 조선시대 해군 총본부 기지(삼도수군통제영) 건물인 세병관이 여황산 허리에 큰 지붕을 이고 앉아 바다를 굽어보면서 양 팔로 강구안을 감싸 안은 형상이다.

조선시대에는 그 호수같은 물 위에 거북선을 비롯한 병선(군함)들이 떠있었다. 그리고 일제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객선들과 어선들이 드나들었다. 남망산조각공원, 동피랑, 중앙시장, 충무김밥골목 등 통영을 찾는 이들이 성지처럼 들르는 곳들을 옆구리에 두르고 있다.


유치환, 김춘수, 박경리, 윤이상과 강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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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구안 서쪽에서 동피랑 벽화마을을 멀리 바라본 모습. ⓒ 김영동


강구안 바다에는 경계가 없다. 그리고 한 쪽이 더 높지도 다른 쪽이 더 낮지도 않은 평평한 물결이 잔잔히 인다. 그래서 그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차별, 억압 따위의 단어들은 생각나지 않는다. 대신 평화로운 바다가 생의 영감들을 자극한다.

그래서 강구안의 부드러운 울림은 많은 예술가들을 이 곳에서 나고 자라게 했다.

시인 유치환은 그가 살던 문화유치원 사택에서 그리움으로 슬그머니 바다로 걸어나오면 곧 강구안과 마주하게 된다. 이상향을 바라 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던 <깃발>도 그 강구안 항구에 퍼덕였을 것이다. 시인 김춘수도 동피랑에서 남망산으로 가는 길목의 자신이 살던 집 문을 밀고 나오면 바로 앞에 펼쳐져 있는 강구안을 늘 볼 수밖에 없다. 온화한 물결의 '잊혀지지 않는 눈짓'을 곱씹어 보며 그는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담아 <꽃>을 썼을 것이다.

소설가 박경리는 자신이 태어난 서피랑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강구안의 모습을 <김약국의 딸들>에서 묘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몇 해 전 이 강구안에서 우리는 선생의 장례를 치르고 떠나보냈었다. 독일에서 활동한 작곡가 윤이상은 고향 바다가 자신의 뇌리에 음표를 심어주었노라고 얘기했었다. 그 바다를 잊지 못해 강구안을 껴안은 통영의 큰 사진을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 걸어두었다.

시조시인 김상옥은 남망산 아래와 동충을 오가는 나룻배를 몰던 친구가 있었다. 강구안 끝에서 큰 바다로 갈라지는 그 사이 물길을 헤집다가 멀리 시집간 누님을 그리워하며 <봉선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고통을 겪어오던 화가 이중섭도 한국전쟁을 피해 통영에 머물던 2년여 동안 강구안을 보며 바다를 음미했다. 풍경화를 별로 그리지 않았던 그였지만 통영 바다를 보면서는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어 통영의 여기저기를 그림으로 담아내었다. 그의 대표작 <소> 그림들도 통영 시절에 그린 것이다. 지금도 강구안에는 이중섭이 그린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이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을 보며 서 있다.

통영 사람들 안에 예술의 DNA가 흐르고 있다

그러나 강구안의 미풍이 예인들에게만 영감을 준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경리 선생의 말처럼 통영 사람들 안에 예술의 DNA(디엔에이, 유전자)가 흐르고 있다.

이중섭이 통영의 뱃사람이었다면 그랬을 법한 모습 하나를 나는 아직 기억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이었다. 강구안은 어릴적 나의 항남동 집에서 작은 언덕 하나를 넘으면 되는 곳에 있다. 갈매기가 새우깡 대신 동전처럼 굴러다니는 멸치를 집어먹는 바다는 자연스런 놀이터였다. 갱물(바닷물의 사투리)이 땅에 불쑥 다가와 있는 곳이라 친구들과 골목에서 축구를 하고 놀다보면 공이 바닷물에 빠지곤 했다.

그 날도 축구처럼('바보'를 통영 사투리로 '축구'라고 한다) 공을 놓치는 바람에 어선들이 정박해 있던 바다에 골인되었다. 해류에 밀려가는 공과의 생이별이 원통해 우리는 허망한 눈으로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어떤 배 위에서 한 선원 아저씨가 뜰채를 내리더니 생선을 낚듯 공을 떠올려 우리에게 던져주셨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돌아서는데 그 배를 얼핏 보니 뭔가 빛을 달리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우리를 향해 빙긋 웃은 다음에 배의 앞쪽에 우뚝한 조타실 벽면에 그림 그리던 작업을 다시 이어갔다. 지금 떠올려보면 그 그림은 이중섭이 즐겨 그렸던 것과 비슷하게 물고기와 아이들이 춤추듯 뒤엉켜 있는 바탕에 파랗고 빨갛고 노랗게 채색된 것이었다.

풍어의 꿈을 가진 아빠의 소망이 담겼을 수도 있고 바다를 벗삼아 살아온 자신의 추억이 담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 배는 남달랐다. 그냥 똑같이 페인트 칠 해진 배들 사이에서 오롯하게 떠 있는 자태가 이 곳 미항에 가장 어울렸다. 그래서 그 후로도 강구안을 거닐 때는 그 배에 유독 눈길이 갔고 완성되어가는 그림을 보며 그 아저씨의 꿈도 그러했으면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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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구안 문화마당 한편에 놓인 이중섭의 그림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좌측)과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우측) ⓒ 김영동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태풍 셀마가 통영을 비롯해 남해바다를 휩쓸고 지나간 날이었을 것이다. 바깥의 큰 바다에서 몰아쳐 온 거센 바람이 떠난 후 혼돈의 시간을 보낸 흔적이 길거리에 가득했다. 밤새 몸서리를 친 듯 제멋대로 나뒹구는 쓰레기장이 된 길을 지나 강구안에 나가 보았다. 태풍의 잔상이 여전히 파도를 남긴 바다 위에서 배들이 스크럼을 짜고 끽끽 소리를 내며 물살을 견뎌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어선은 뭍 위로 도망치듯 올라와 기절해 있기도 했고 바다에서 미처 탈출 못한 어떤 배들은 그르렁그르렁 마지막 호흡을 내쉬며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그 빛나는 그림의 배도 수면 위로 거품을 내며 침몰해 있었다. 그림과 함께 그 아저씨의 꿈도 수장되는 것 같아 마음이 더 아팠다. 먼 세계에서 몰아닥친 광란이 강구안에 움터 있던 잔잔하고 아름답던 삶들을 으스러뜨렸다.

전쟁터같던 흔적들이 정리될 무렵 강구안 한편에 있던 통영극장에서는 당시 아이들에게 <명량>에 맞먹는 환희를 줬던 영화 <우뢰매3>를 상영했다. 우주 악당의 침공에 맞서 지구를 지킨다는 내용의 영화를 보러 아이들이 뽈래기(볼락)처럼 우르르 무리지어 달려들었다. 나와 친구들은 영화값 내기를 위해 달리기 시합을 하기로 했다. 태풍 뒤에 따라 온 풍어로 다시 웃음을 찾은 강구안 안쪽 중앙시장에서 우리는 출발했다. 그리고 강구안 자궁의 가장자리를 뛰어돌아 서쪽 편에 바다를 스크린처럼 앞에 두고 위치한 통영극장까지 달렸다.

그런데 뛰는 심장을 느끼며 한참을 가는데 전에 못 보던 그림들이 계선주(정박한 배와 연결된 밧줄을 걸어두는 부두의 기둥)들에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늘을 닮고 바다를 닮은 그 그림들을 보고 나는 대번에 그 아저씨의 작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저씨의 꿈이 아직 침몰하지 않고 기둥이 되어 먼 바다로 다시 나갈 채비를 하는 배들을 지켜주는 듯했다.

희망의 진지를 만드는 강구안

그 후 먼 시간이 흘렀다. 고된 한숨마저 얼려버리는 서울의 찬 공기를 피해 태아처럼 웅크리고 싶어 나는 통영으로 이따금 내려와 길을 더듬는다. 이제는 세월에 벗겨져 쇠기둥의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꾸벅꾸벅 졸던 통영극장은 문을 닫은 지 오래고 그 자리엔 은행이 들어섰다. 바다 옆 골목에 공 차는 아이들은 학원엘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여전히 강구안에는 꿈을 단단히 부여잡아주는 또 다른 기둥들이 여기저기 박혀 새로운 태동을 만들고 있었다.

올해 봄 강구안 일대 등에서는 매년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다양한 뮤지션들이 거리 공연을 펼친 '통영프린지'가 열렸다. 바다를 낀 광장인 문화마당에 울림이 가득했다. 아니, 강구안 바다 자체가 하나의 광장이 되었다. 계산기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바다를 메우고 이 광장에 OO월드를 지으려 달려들었겠지만 강구안은 자연과 예술의 공명을 키우고 있다.

예술의 골목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인 강구안 뒷 골목 입구에는 이중섭의 그림에서 튀어올라온 물고기가 전시되어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연모하는 이를 찾아 통영까지 왔지만 끝내 맺지 못하고 대신 펜으로 통영을 남긴 시인 백석의 시들이 벽에 걸려있다. 강구안 물결이 영글게 한 윤이상의 가곡 <달무리>도 그 골목 벽에서 조형물이 되어 연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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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구안의 평화로운 바다. 오른쪽의 문화마당에 정박한 거북선은 화포소리 대신 구경 온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뿜는다. ⓒ 김영동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강구안 자체가 여전히 소금바람을 보내며 통영을 썩지 않게 만들어 주고 있다. 섬들이 멀리 병풍처럼 감싼 아담한 바다가 그림이 되어 걸려 있다. 통영 강구안의 경계 없고, 평평하고, 따뜻해서 아름다운 바다가 세상의 갈등을 유치하게 만들고 차가워져버린 우리의 마음을 녹인다.

삶의 꿈을 낚으러 출항하고 다시 꿈결같은 항구로 돌아오는 강구안에는 여전히 어부들의 뱃노래가 울린다. 중앙시장에서 펄떡대는 생선을 파는 사연 많은 아지매들의 사투리들이 시 한 수, 소설 한 편을 뽑는다. 모두가 예술가다. 자연 속에서 헤엄치며 만드는 아름답게 하얀 물보라로 생활이 들이미는 오물들에 맞서 싸우고 있다.

통영은 삶의 공기가 서울보다 따뜻하다. 때론 큰 바다에서 우주 악당처럼 휘몰아쳐오는 태풍에 상처날 수도 있다. 하지만 겨울을 이기고 피는 통영의 붉은 동백나무꽃처럼 다시 온기를 뿜는 기둥이 남녘 바다에 박혀있다. 통영 바다가 태어나는 강구안이 희망의 진지가 되어 아름답게 세월을 이겨나갔으면 좋겠다.

강산에의 노래 <답>은 답답한 삶에서 풀리지 않는 물음들의 답을 찾고 싶은 심정을 가사에 담고 있는데, 강구안을 비롯해 통영의 여기저기를 배경으로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선 없고 높낮이 없고 억세지 않은 통영 강구안 바다가 차가운 겨울같은 우리 삶과 사회의 답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그 답을 찾아 무리지어 헤엄치고 달리다 보면 생활을 보듬고 지구를 지키는 감동과 환희도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강구안 #통영 #문화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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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혁'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노래 만들고 글을 쓰고 지구를 살리는 중 입니다. 통영에서 나고 서울에서 허둥지둥하다가 얼마 전부터 제주도에서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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