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 퇴치한 한국인, 몽골 왕 어의가 되다

[나의 몽골-바이칼 여행기 ②] 몽골 시내 투어

등록 2014.09.02 18:15수정 2014.09.0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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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란바토르의 중심, 수흐바타르 광장. 사진 속 말탄 장군 동상이 독립영웅 수흐바타르 장군이다. ⓒ 정수현


여기는 울란바토르의 중심지 수흐바타르 광장이다. 수흐바타르는 몽골 독립 혁명을 이끈 장군의 이름으로 말 탄 동상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몽골인들이 존경하는 최고의 영웅이 칭기스칸이라면, 수흐바타르 장군은 그 다음으로 존경받는 근현대사의 영웅이다.


광장 주변에는 칭기스칸의 거대 동상과 함께 기념관이 있다. 작년 초에 몽골 정부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의미로 이 광장의 이름을 '칭기스칸 광장'으로 바꾸었다. 이에 몽골의 젊은이들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반대 여론전을 펼쳐 결국 6개월 만에 다시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이름이 되돌려졌다.

광장의 이름에 담긴 에피소드를 들으니,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혁명'이라는 단어는 젊은이들을 가슴 뛰게 만드는 무엇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몽골은 100% 수입차... 운전대가 좌측, 우측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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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란바토르 도심 차량 모습 ⓒ 정수현


몽골의 인구는 약 290만 명, 울란바토르의 인구는 130만 명이 넘는다. 원래 울란바토르는 50만 인구를 가정한 계획도시로 만들어졌기에, 울란바토르의 교통체증도 서울이나 베이징 같은 다른 대도시와 다르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몽골은 자동차의 100%를 외국에서 수입하여 쓰고 있기 때문에 운전대가 좌측인 차, 우측인 차가 뒤섞여 있다는 점이다. 왠일인지 생각이 다르다고 좌우가 조화롭게 어울려 살지 못하는 남북과 우리 사회의 모습이 떠오른다. 운전대가 좌우로 있어도 별 탈 없이 운전만 잘 하고 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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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기념탑 올라가는 길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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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명과 암이 고스란히 보이는 울란바토르 시내 전경 ⓒ 정수현


몽골도 2차대전 참전국이며 승전국이다. 전승기념탑에 올랐다. 울란바토르 시내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한창 개발 중인 도시들이 그렇듯, 자본주의 명암이 고스란히 다 들어있다.

울란바토르도 공해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이유는 연료 때문이다. 몽골 초원에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유목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고, 그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은 도시 외곽뿐이다.

유목민의 전통 가옥인 게르를 쳐놓고 전기도 물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난방을 할 수 있는 방법은 폐타이어, 쓰레기 따위를 태우는 것이다. (참고로 몽골은 고원지대에 자리잡고 있고 우리보다 훨씬 북쪽에 있다 보니 10월부터 5월 정도까지는 굉장히 춥다. 여름도 햇볕만 피하면 우리나라 가을 날씨처럼 시원하고 쾌적하다.) 그 공해물질이 도시의 환경을 오염 시키는데, 강 주변으로는 바람이 불기 때문에 매연의 불쾌함을 피할 수 있어 고급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강가에 있는 아파트의 가격은 우리 돈으로도 6억~7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몽골은 세계 10위에 해당할 만큼의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지만, 1990년대 자유화 이후 이 자원에 대한 개발권을 미국, 캐나다 등의 선진국들에게 헐값에 넘겨 특별한 산업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구 온난화의 여파로 발생하는 사막화는 '환경난민'을 발생 시킨다. 환경난민이란 자발적 의지가 아닌 환경의 변화로 인해 기존 삶의 터전과 방식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몽골은 환경난민의 증가로 도시 외곽의 슬럼화, 실업률 증가, 범죄율 증가 등의 사회적 문제를 겪고 있다.

고층빌딩과 아파트 그리고 그 주변으로 점점 늘어만 가는 슬럼가는 몹시 씁쓸한 풍경이었다.

독립운동 위해 몽골에 온 이태준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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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기념공원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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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는 작은 기념관이 있다. ⓒ 정수현


이태준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몽골에서 만난 이태준은 우리에게 익숙한 문학가 상허(尙虛) 이태준이 아니라 의사이면서 독립운동가였던 대암(大岩) 이태준(1883~1921) 선생이다. 선생은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을 거쳐 울란바토르까지 망명하게 되었다. 당시 몽골은 성병이 만연했는데 그의 의술로 성병이 퇴치되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나 신의(神醫)로까지 존경을 받았고, 마지막 몽골 왕의 어의(御醫)까지 되었다.

선생은 코민테른에서 제공한 독립운동 자금을 받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는데, 1921년 몽골을 공격해 온 반혁명 러시아 백군에 의해 살해됐다. 당시 같이 활동하던 몽골 운동가들은 선생에게 함께 도피할 것을 청했으나, 받아서 전달해야 할 독립운동 자금 처리를 위해 계속 머물기를 선택했다가 안타깝게 서른 여덟의 짦은 생을 마감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도 받고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 작은 기념관도 문을 열었다지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독립운동가. 아마 이 여행에 오지 않았다면 나도 몰랐을 것이다. 멀리 타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생을 바쳤지만, 몽골의 바람만큼이나 고독하게 홀로 있었을 세월….  신념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선생의 추모 비석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③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8월 8일부터 16일까지 북경, 몽골, 바이칼을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징기스칸 #이태준 #전승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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