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대접 못 받았다던 아버지, 과거가 궁금해졌다

열아홉에 혈혈단신 월남한 아버지의 굴곡진 인생

등록 2013.03.16 20:17수정 2013.03.1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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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몇 살인가요?"
"열일곱이요."


열일곱이라, 열일곱. 기분이 묘하다. 열일곱은 열여섯과 느낌이 확 다르다. 2~3년 뒤면 성인이 된다. 우리집 첫째가 곧 성인이니, 엄마인 나는 덩달아 '중년 여성'이지 싶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아이는 내 키를 훌쩍 넘어 뒷모습만 봐도 든든하고 저 녀석이 내 배 아파 낳은 녀석이 맞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렇게 기특한 마음에 녀석을 쳐다보고 있으면 아이는 여지없이 내게 '반전 모습'을 보여준다. 한참이나 어린 동생들이랑 한 치의 양보 없이 툭탁거릴 때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첫째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친정 아버지 생각이 났다. 우리 첫째보다 몇 살 차 안 나는 스물 즈음에 북에서 혼자 월남했던 아버지. 아버지가 몇 살에 부모 곁을 떠나 혼자 살아왔는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아버지가 몇 살 때 월남을 했는지 나이 마흔이 되도록 단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 이상했다.

왜 그걸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나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에 관해 관심이 없었나 보다. 그랬던 이유는 아버지는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누군가의 '아버지'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던 내가 자식을 떠나 보낼 준비를 해야 하는 나이가 돼서야 '겨우' 아버지의 젊은 시절 일들이 궁금해진 것이다. 아, 나란 사람 생각의 폭이 얼마나 좁은 건가.

지난해 설날 친정 아버지는 자식들을 모아놓고 고향 황해도를 떠나온 이야기를 꺼내셨다. 아버지 이야기를 같이 듣던 남편이 갑자기 스마트폰을 꺼내서 녹음했다. 그때 일이 생각이 난 나는 '아버지가 몇 살에 남으로 내려왔는지' 알고 싶은 마음에 녹음 내용을 찾아 다시 들어봤다.

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로 해주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아버지는 '공민증'을 만들 나이가 됐는데도 남쪽으로 내려오고 싶은 마음에 안 만들고 버텼단다. 남쪽으로 내려가려면 안내인에게 줄 돈 2000원이 필요한데 구할 길이 없었다고. 그래서 해주로 물고기를 잡으러 간 아버지의 삼촌을 찾아갔단다. 마침 삼촌이 물고기를 잡아서 판 돈인 2000원을 주면서 "아버지에게 갖다 드리라"고 했다. 그 돈 덕분에 우리 아버지는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1949년,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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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주니 둘째가 그러더라 "그럼, 할아버지는 운이 좋았네. 전쟁에서 살아났고 다치지도 않았으니까." ⓒ sxc


그런데 녹음 파일을 끝까지 들어도 도대체 아버지가 언제, 몇 살에 내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전쟁 전이었다고 했으니 스무 살 이하일 것이다. 전화를 걸어 아버지에게 물었다.

"1949년이지 뭐. 전쟁 나기 한 해전."

1949년이면 아버지 나이 열아홉에 고향을 떠났다는 말이다. 그리고 남쪽에서 군대에 들어가셨단다. 왜 군대에 들어갔는지 또 물었다.

"그거야, 먹고 살 게 없으니까 들어갔지."

전화를 끊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친정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할아버지는 열아홉에 북에서 내려오셨대. 너희 형보다 겨우 두 살 많은 나이야. 그렇게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는 혼자 내려와서 전쟁을 겪은 거야. 그리고 9년이나 군대에 있다가 나오셨다네."

얼마 전, 영화 <고지전>을 본 둘째가 말한다.

"그럼, 할아버지는 운이 좋았네. 전쟁에서 살아났고 다치지도 않았으니까. <고지전>에서 보면 죽은 사람 많잖아."

그렇다. 아버지는 어깨에 총상이 하나 있지만 큰 부상은 없다. 운이 좋았던 게 맞다. 언젠가, 아버지가 부산으로 피란을 갔을 때 이야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부산 시장에서 사람들이 싸움 구경한 이야기를 하는데 뭐라고 했는지 알아? 그때 사람들이 했던 말이 아버지는 아직도 잊히질 않아."
"뭐라고 했는데요?"
"피란민하고 사람하고 싸우는데 피란민이 이기더라고."
"그게, 뭐가 이상한데요?"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은 사람 대접을 안 하는 거지."

아버지의 역사를 공유하는 일, 숙제가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첫째보다 겨우 두 살 많은 열아홉에 부모 곁을 떠나 남으로 내려왔다. 그 어린 나이에, 그것도 전쟁 통에 북한 피란민을 사람 취급도 안 하는 남한에서. 지금 키가 훤칠하게 자란 큰아이를 어디 내두려면 항상 불안불안하고 아직도 한참은 부모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저 어린 내 큰아이와 비슷한 나이에 우리 아버지는 부모를 떠나고 고향을 떠나서 여태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너무 짠했다.

큰아들을 떠나보낸 할머니는 또 어떠셨을까, 할머니는…. 그런데 생각해 보니, 큰아들을 떠나보낸 할머니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 정도다. 할머니 스물 초반에 되셨을 때 첫째로 아버지를 낳았으니 대략 마흔 초반 딱 내 나이다. 난 여태 아버지를 떠나보낸 할머니가 내게 '할머니'니까 환갑 즈음의 할머니 모습으로만 상상했다.

한 번도 아버지를 떠나보낸 할머니가 마흔 즈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할머니를 '큰아들 떠나 보내고도 세월의 풍파를 버티느라 이미 많은 것을 포기한' 그런 할머니 모습으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큰아들을 떠나보내고도 그리 크게 가슴앓이를 하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당시의 할머니 나이가 되고 내 아이가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되고 보니 그건 나만의 '완벽한 착각'이었음을 알았다.

엄마에게 첫째 아이는 각별하다. 엄마로서 겪어야 할 그 모든 것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하는 아이다. 그래서 첫 아이를 입학시키는 엄마의 마음과 둘째를 입학시키는 엄마의 마음은 다르다. 그러니 첫아들을 떠나 보낸 할머니의 상실감은 얼마나 컸을까. 할머니는 전쟁을 겪으면서 얼마나 큰아들 생각을 하셨을까.

큰아들 걱정에 노심초사했을 할머니를 생각하니 내가 할머니가 된 듯 마음이 아렸다. 할머니랑 아버지가 너무 가여웠다. 하지만 전쟁통에 부모·자식과 헤어진 사람이 한둘일까. 수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은 사람이 가족을 잃고 고통을 당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들여다보면 슬프고 아픈 사연이 얼마나 얼마나 많고도 많은가. 전쟁의 본질은 어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인가 내가 10대일 때, 아버지가 나를 불러 놓고는 전화번호부에 황해도 고향 주소와 할아버지·할머니·작은아버지·고모 이름과 출생 연도를 가득 적어 준 적이 있다.

"혹시 아버지가 죽고 통일이 되면 너희가 고향에 가서 식구들 찾아라. 잊지 말고 언니, 오빠한테도 알려줘."

그날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언니, 오빠도 없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왜 그리 급하게 했을까? 그 뒤로 전화번호부에 대해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자식들은 무덤덤했다.

이산은 아버지만의 아픔이었고 자식들 누구도 공유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이 궁금하다. 무엇보다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작은 아버지랑 고모들 이름이 적혀 있는 전화번호부를 찾아 보관하는 일일 것이다. 이 일부터 시작해야겠다.
#월남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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