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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록 페스티벌의 '빠순이'로 남을 텐가?

[주장] 우후죽순 늘어난 뮤직 페스티벌…차별화된 문화 생태계 조성 실패

13.03.09 11:42최종업데이트13.03.0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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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 페스티벌이라는 것은 하나의 사회를 만들고 그 사회 속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관객들로부터 창조된다. ⓒ 글라스톤베리


불과 8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은 뮤직 페스티벌의 불모지였다. 정확히 말해 저주받은 땅에 가까웠다. 1999년 열린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은 그 저주의 희생자였다. 국내 최초의 국제 록 페스티벌이라는 이 야심찬 도전은 첫날부터 그 해 중부지방을 강타한 게릴라성 호우를 만났다. 당시 페스티벌 현장에 있던 이들은 개의치 않았다. 모두 자신들의 열정이 비를 밀어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공연 둘째 날 새벽, 인천시는 인근 주민들과 페스티벌 참가자들에게 대피령을 내렸다. 스태프들과 관람객들은 인근 초등학교로 긴급 대피했다. 모두 교실의 나무 바닥에서 쪽잠을 자며 숙식을 해결했다. 텐트는 물에 잠겼고 음향 장비들은 기능을 상실했다.

결국 공연은 취소됐다. 대규모 환불 사태가 벌어졌다. 기획사는 환불금을 다 갚지 못한 채 문을 닫아야만 했다. 한국의 우드스톡을 만들고자 했던 모두의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 후로 몇 년 간 한국에서 뮤직 페스티벌은 없었다. 2004년 경기도 가평에서 재즈 페스티벌이 열렸으나 폭우로 소리 소문 없이 취소됐다는 이야기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이 지독한 저주는 2006년 인천시의 지원으로 열린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로 인해 비로소 끝난다. 첫째 날은 비가 내렸지만 둘째 날부터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정상적인 날씨 속에서 공연을 진행할 수 있었다. 누적 관객 수 5만 명을 기록했다. 눈물겨운 성과였다. 페스티벌에 참가한 모두가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차고 넘치는 '록페' 성과로 볼 수 있을까

그 이후로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한국은 이제 뮤직 페스티벌이 차고 넘치는 나라가 됐다. 펜타포트에서 분리돼 나온 안산 밸리 록 페스티벌을 비롯해, 그린 플러그드, 서울 라이브 뮤직 페스티벌, 자라섬 페스티벌 등 페스티벌은 이제 셀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 일부에서는 과당 경쟁을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격세지감이다.

이것을 성과로 볼 수 있을까. 양적인 측면에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기업이 뮤직 페스티벌에서 투자가치를 느낀다. 그것이 기업 간의 경쟁이 된다. 소비자 입장에선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덕분에 음향 장비는 더 현대화됐고, 시설은 쾌적해졌다. 라인업도 훌륭해졌다. 분명 긍정적인 일이다.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단언컨대 해외의 뮤직 페스티벌은 한국의 그것보다 몇 배는 재밌다. 라인업 때문이 아니다. 일본의 후지 록 페스티벌은 길이 존재하는 모든 곳이 무대다. 오타쿠들이 좋아하는 주인공을 따라 코스프레를 하고, 차력사들이 불 쇼를 벌이고, 소형 앰프를 들고 온 아마추어 기타리스트들이 서로 만나 그 자리에서 서로의 실력을 겨룬다.

푸드 존에서는 비교적 싼 값에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서민 음식과 술을 접할 수 있다. 언제든 다른 이들의 연주에 맞춰서 춤을 추고 술에 취하고 토론을 하고 운명적인 사랑을 만난다. 즐거움을 넘어선 그 이상이 이곳에는 존재한다.

글라스톤베리 역시 마찬가지다. 흔히 말하는 글라스톤베리의 정식 명칭은 글라스톤베리 컨템퍼러리 아트 페스티벌이다. 야외에서 진행할 수 있는 모든 예술이 이곳에서 펼쳐진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외치는 티셔츠를 입고 퍼포먼스를 할 수도 있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달라며 프리허그를 시도할 수도 있다.

크레이지 댄스로 일약 교주의 위치까지 도달하는 괴짜들도 있다. 다양한 형태의 전위예술과 수많은 조형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 그린피스의 나체 퍼포먼스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 하이디 복장을 한 소녀들과 줄넘기를 하면서 미친 듯이 언덕을 뛰어다닐 수도 있다.

지난해 지산밸리록페스티벌 현장 모습. 라디오헤드가 공연 중이다. ⓒ CJ E&M


대기업의 상술과 라인업 목매는 관객이 있는 곳

뮤직 페스티벌이라는 것은 예컨대 하나의 사회를 만들고 그 사회 속에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관객들로부터 창조된다. 문화의 영역에서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왠지 모르게 버겁고 진지한 용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페스티벌 문화는 분명 삶으로부터의 민주주의, 그 자체다. 뮤직 페스티벌은 합법적인 해방의 공간이다. 그 안에서는 어떤 표현도 가능하다.

서로의 사상과 예술은 서로 교류하며 문화의 자유 시장을 만든다. 이러한 자유 시장의 물물교환은 현장에서 판매하는 음식과 술과 춤과 음악을 만나 천국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주최 측의 노골적인 통제와 끼워 팔기 상혼은 없다. 그저 모두가 즐겁게 놀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손'이 돼줄 뿐이다. 그것이 질척이는 시골 농장과 리조트의 잔디밭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본질적 이유다.

한국의 뮤직 페스티벌은 오로지 라인업만이 주목된다. 독특한 문화 생태계를 만들어 보겠다는 고민과 노력은 없다. 음식물 반입은 안 된다. 대신 영화관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츄러스와 팝콘을 판다. 천막에 마련된 부스들은 한결같이 대기업의 제품 프로모션을 목적으로 세워진 것들뿐이다. 기업들에게 페스티벌은 그저 영업장에 불과하다. 그것에 저항하는 관객들의 적극적 행동은 관객들 사이에서도 튀는 행동으로 치부된다.

양비론은 위험하다. 하지만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뮤직 페스티벌 시장에서 차별화된 문화 생태계가 전혀 조성되지 않는 이유는 분명 관객과 기업들 모두에게 있다. 기업은 근시안적 사고와 편의주의에, 이를 소비하는 관객들은 수동적인 자세에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졌다. 뮤직 페스티벌은 지금보다 훨씬 더 재밌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지역의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다. 기업과 관객들은 그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리고 있다. 

'지산밸리 록페스티벌 2012' 무대에 선 들국화 전인권. ⓒ CJ E&M


적극적인 관객이 좋은 페스티벌을 만든다

라인업만 좋다고 뮤직 페스티벌이 일류가 되는 게 아니다.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가 생태계를 이룰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하다. 무대 기획을 넘어 문화 기획이 전제돼야 한다. 상업주의의 노골성을 버려야 페스티벌이 산다. 그것을 버릴 수 없다면 페스티벌 시장에서 손을 떼는 게 관객과 기업 모두에게 좋다.

공연 산업은 투자액에 비교해 이익이 바로 산출되지 않는다. 현장에서 자사 제품을 끼워 팔아 이익을 창출하는 데 급급한 근시안적 사고를 계속 유지할 생각이라면, 그에 부합한 문화 산업들은 얼마든지 있다. 굳이 왜 뮤직 페스티벌이어야 할까. 

관객들은 자신이 낸 입장료가 아깝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이어야 한다. 뮤직 페스티벌에서의 주인공은 스톤 로지스와 라디오헤드가 아니다. 모두가 창조자가 될 수 있는 관객들이다. 더 자유로워질 수 있고, 더 재밌어 질 수 있는 기회들을 저버린 채 단지 특정 뮤지션을 보기 위해 페스티벌을 찾는다면, 마니아들이 조롱해 마지않았던 아이돌 '빠순이'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마니아들이 진정 이 땅에 우드스톡이나 글라스톤베리 같은 페스티벌을 만들고 싶다면, 풍선 대신 머리를 흔드는 차이 말고 다른 것들을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 그것이 문화든 정치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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