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학살당한 그들, 그래도 '애국가'를 불렀다

[광주천 따라 걷기⑩] 시민군 사격훈련장이었던 광주공원

등록 2013.02.17 17:33수정 2013.02.17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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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으로 보이는 정자가 석서정. 가운데 있는 다리가 광주교다. 광주교를 건너면 금남로와는 불과 300미터. 광주공원에서 사격훈련을 마친 시민군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 다리를 넘었을까. ⓒ 이주빈


광주천을 가로지르는 광주교를 건너 광주공원으로 향한다. 갈마드는 상념에 걸음은 더욱 느려진다. 바람이 차서가 아니다. 다리를 오갔을 사람과 사람, 사연과 사연의 엇갈림이 시려서다.

광주공원은 1913년 일제에 의해 '지정'된 광주 최초의 도시공원이다. '도시공원'이라는 개념은 19세기 말엽 '근대(modern)'와 함께 등장했다. 광주공원이 조성될 무렵에 만들어진 아시아의 도시공원은 상하이 황푸공원(1886년), 인천 만국공원(1888년, 지금의 자유공원), 서울 탑골공원(1897년), 도쿄 히비야공원(1903년) 등이 있다.


중국과 조선 등 아시아에서 근대식 도시공원은 서구 열강의 진출과 때를 같이 한다. 황푸공원과 만국공원, 탑골공원의 역사가 이를 말해준다. 공공 공원(public park)이라는 형식을 띠었지만 철저히 서구 열강의 힘을 과시하는 서양 근대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주공원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통치하는 '식민지 근대'의 상징으로 활용되었다. 광주공원이 조성된 자리는 성거산 일대. 지금이야 사통팔달 길이 열려있어 광주를 드나드는 길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엔 목포나 영산포 등지에서 광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성거산을 거쳐야 했다. 성거산에 도착했다고 해도 광주 시내로 바로 들어오기란 쉽지 않았다. 광주천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일제는 성거산에서 광주 시내로 쉽게 들어갈 요량으로 목교를 가설한다. 그 나무다리가 지금 광주교의 시작이다. 그리고 '조선 정기 말살'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성거산 머리 부분엔 '성거사'라고 하는 오래된 절터가 있었다. 일제는 이 절터에 1908년 한말 의병전쟁 때 죽은 일제 군경과 일제에 부역한 조선인들의 명복을 빈다며 '전남 충혼탑'을 세웠다. 광주 초입에 들어오는 이들은 쉽게 이 탑을 올려볼 수 있는 위치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곤조(根性)'다.

1913년 성거산 일대를 광주공원으로 지정한 일제는 1914년엔 신사(神社)도 지었다. 광주신사는 목포 송도신사, 장성신사와 함께 전남지역 3대 신사로 불렸는데 그 현판을 조선주둔군 초대사령관이자 2대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가 썼다. 광주신사는 해방되던 날 광주서중 학생들에 의해 허물어졌다. 신사가 무너진 자리에 다시 충혼탑이 세워졌다. 한국전쟁 중에 사망한 군인과 경찰의 혼을 기리는 탑이다.

신사가 무너진 자리에 다시 충혼탑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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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신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충혼탑.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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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원은 1980년 오월항쟁 당시 시민군들이 사격훈련을 하던 곳이다. 일제시대에는 저 계단을 타고 올라가 신사 참배를 했다. ⓒ 이주빈


일제와 한국 정부에 의해 차례로 '충혼탑'이 세워진 광주공원. 충(忠)은 가운데 중(中)자와 마음 심(心)으로 이뤄진 글자다. 사전풀이로는 '임금이나 국가 따위에 충직함'을 이르는 말이다.

언제나 충직함을 강요하는 국가는 항상 정당한가. 늘 충직함만을 강요하는 국가가 배꽃처럼 지순한 국민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광주공원에 서면 자연스럽게 의문이 일어난다.

광주공원은 1980년 오월항쟁 당시 잔인한 국가폭력에 맞서 시민군들이 사격 훈련을 했던 곳이다. 광주교를 건너면 금남로와는 불과 300미터. 파출소에서 가져온 M-1 카빈 소총으로 시민군들은 광주공원에서 사격훈련을 했고, 300미터를 걸어 M-16으로 무장한 정예 공수부대와 싸우러 금남로로 향했다.

차라리 목총에 가까웠던 카빈 소총을 들고 광주교를 건너던 시민군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뒤로 한 채 건너던 광주교에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선(死線) 끝에 선 그들에게 국가는 여전히 충직하게 믿고 따라야 하는 마음의 중심이었을까. 오월항쟁 당시 시민군과 광주시민들이 가장 많이 불렀고, 가장 애타게 불렀던 노래는 대한민국 국가 <애국가>였다.

국가는 그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국가는 오히려 그들을 학살했다. 그들을 지켜준 것은 가난하고 못 배운 그들의 친구. 광주공원 광장엔 지금도 밤마다 포장마차가 들어선다. 광주공원 광장 주변으론 지금도 국밥집이 줄지어 있다. 가장 값싼 음식과 술들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과 동무하며 시대를 나고 있다.

광주공원 광장 주변으론 지금도 국밥집이 줄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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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원 광장엔 저녁마다 포장마차가 들어선다. ⓒ 이주빈


1980년대와 1990년대. 금남로 전남도청 앞 광장이 경찰에 의해 봉쇄되면 농민, 노동자, 학생이 중심인 시위대는 광주공원에서 집회를 열었다. 집회가 끝나면 사람들은 대여섯 명씩 어울려 국밥집이나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윽하게 취기가 오르면 국밥집에서 탁자를 치며, 포장마차에서 나무젓가락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목포의 눈물>이 그치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나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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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원 광장에서 왼쪽 산책로를 타고 넘어가면 광주향교가 있다. 길 건너 서현교회와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 이주빈


덧붙이는 글 광주천 따라 걷기 4-1 코스는 '광주교-광주광장-광주향교-충혼탑-석서정-광주대교' 입니다.
#광주천 따라걷기 #광주공원 #시민군 #포장마차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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