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새벽, 청와대 인근에 장갑차가 출동한 까닭

[역사 에세이 56] 올해 45주년, 김신조 일당의 '1·21사태' 기억하나요

등록 2013.01.24 15:18수정 2013.01.24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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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새벽 서울 세검정 일대에서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장병들이 북한군의 예상 가능한 각종 도발상황을 상정한 '리멤버 1·21훈련'을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21일 새벽, 서울 삼청동 청와대 주변에 장갑차가 출동하고 공포탄이 발사되는 등 전시상황이 연출됐습니다. 이날 효자동, 청운동 등 청와대 인근 주민들과 행인들은 청와대 주변에 무슨 비상상황이라도 발생했는지 다들 놀라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날 군 병력 출동은 군 당국에 의해 연출된 행사 성격의 '가상훈련'이었습니다. 

이날 상황은 오전 2시30분 쯤 청와대 인근 구기터널 앞에서 검문에 응하지 않은 북한군 탑승 추정 카니발 차량이 자하문터널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비상상황이 전파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에 독립문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수방사 제1경비단 소속 장갑차 4대와 병력이 청와대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해 긴급히 출동했습니다.

이날 새벽부터 세검정 삼거리와 경복궁 앞, 사직터널 등에서 실시된 훈련에는 장갑차 14대와 106㎜ 무반동총 차량 4대, 그리고 병력 520명이 동원됐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날 훈련명은 '리멤버(기억하라) 1·21'. 이 훈련은 수방사가 매년 부대 내부행사로 해왔으나 올해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공개행사로 치렀습니다.

한편, 이날 오전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창의문) 고개에서는 한 무리의 경찰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행사가 열렸습니다. 이날 추모행사에 참석한 사람은 이준섭 서울 종로경찰서장 등 종로경찰서 경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추모제를 지낸 창의문 동편 내리막길에는 경찰관 복장을 한 인물의 동상과 추모비가 서 있습니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최규식 전 종로경찰서장. 최 전 서장은 45년 전 이곳에서 발생한 김신조 등 무장공비 31명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른바 '1·21사태'(혹은 '무장공비 김신조 사건')을 저지하다 현장에서 순직했습니다. 그의 동상 인근에는 이날 함께 순직한 정종수 순경의 순직비도 서 있습니다. 최 서장과 정 순경은 순직 뒤 각각 경무관, 경사로 1계급 특진됐습니다.

'청와대 폭파-대통령 암살 임무'로 충격 준 1·21사태

김신조 등 무장공비 31명의 서울 침투를 보도한 중앙일보 기사(1968.1.22) ⓒ 중앙일보 지면 캡쳐


1968년 1월 21일 발생한 '1·21사태'는 북한군이 권력의 최고 핵심부인 청와대 폭파와 대통령 암살을 임무로 했다는 점에서 당시 큰 충격을 던졌습니다. 분단 후 북한군이 휴전선 철책을 넘어 침투하는 경우가 잦았지만 그 목적은 대개 군사정보 염탐 및 군사시설 파괴였습니다. 그런데 북한군이 청와대 폭파를 목표로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김신조 등 무장간첩들은 북한의 '124군부대' 소속으로 알려졌습니다. 군 당국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부대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으로 게릴라전에 대비한 특수훈련 부대로 알려졌습니다. 김신조 등 31명(33명이었다는 주장도 있음)은 한국군의 복장을 한 채 수류탄,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군사분계선(DMZ)을 넘어 이후 야간을 이용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18일 오전 5시경,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뒷산에 도착한 이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인근마을에서 나무하러 온 우성제씨 4형제와 마주쳤는데, 우씨 등은 한눈에 그들이 무장공비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공비들은 이들에게 지서의 위치와 문산, 동두천, 의정부로 가는 방향을 묻고는 그냥 돌려보내줬습니다. 우씨 형제는 신변의 위험 때문에 이튿날 오후 9시경에야 파주군 법원리 창현파출소에 '공비 출현' 신고를 했습니다.

우씨 형제들과 헤어진 공비들은 서울을 향해 급속 산악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악구보를 하며 맹훈련을 한 '전사'들로 약 30kg의 중무장을 한 채 시간당 10km를 주파하는 괴력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를 거쳐 청와대 뒷산인 북한산 비봉에 다다랐는데 그 때가 대략 20일 오전 6시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군은 이들이 이 정도로 빨리 서울에 접근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우씨 형제들과 헤어진 곳을 기준으로 할 때 이들이 서울 진관외동 진관사까지 산악행군을 하려면 우리 해병대로도 적어도 이틀은 족히 걸릴 걸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공비들은 중무장에 야간산행으로도 이틀만에 북한산까지 잠입한 것이었습니다.

이날 오후 2시경, 수도방위 부대인 6군단 예하의 3개 사단과 김재규 중장의 6관구 병력이 동원돼 전방에서부터 서울 외곽에 이르는 수십 겹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는데 무장공비들은 이미 이 지역을 통과한 뒤였습니다. 그 시각 김성은 국방부장관은 수색대로부터 경기도 송추유원지 부근에서 무장공비들의 것으로 보이는 실탄과 탄창, 음식물 찌꺼기 등이 발견됐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유일한 생포자인 김신조(왼쪽 두번째)가 사살된 무장공비들의 시신을 확인하고 있다 ⓒ 정부기록사진집


수색대의 보고를 접한 김 장관은 '설마 거기까지…' 하면서도 혹시나 싶어서 대통령 집무실에서 채원식 치안국장(현 경찰청장)을 전화로 불러냈습니다. 그리고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서울지역에 갑종 비상을 걸고 세검정에서 정릉과 창동에 이르는 축선에 경찰을 배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로써 서울지역에 경찰의 비상경계 근무가 시작됐는데, 그 시각 무장공비들은 북한산 승가사 아래 기슭에서 휴식 중이었습니다. 4일간 강행군을 한 탓이었습니다. 

사건이 터진 그해 1월 21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이날 오후 8시경, 북한산 비봉 아래에 은신해 있던 공비들은 드디어 목표물을 향해 본격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김신조와 일당 30명은 개인장비를 챙겨 눈덮인 북한산을 내려와 청와대로 향했습니다. 한국군 차림을 한 이들은 마치 행군하는 군인들처럼 2열 종대로 세검정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침투·습격·탈출조 등 3개조로 나눠 역할분담을 하고는 청와대에 다다르면 3~4분만에 임무를 완수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우선 침투조가 청와대 경비병을 제거하는 동안 습격조가 청와대를 공격해 임무를 완수하고 탈출하면 대기하고 있던 탈출조가 청와대 차량을 탈취해 이들을 싣고 문산 쪽으로 도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10시경 이들은 마침내 세검정까지 진입했는데, 이들과 처음 마주친 사람은 당시 이각현 서대문경찰서장이었습니다. 이 서장은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났다는 무전보고를 받고는 쓰리쿼터를 타고 이들을 뒤쫓아가 신원확인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공비들은 "우리는 CIC 방첩대다, 훈련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니 참견말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자하문 넘어 효자동에 육군 방첩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이것까지 파악하고 온 것이었습니다. 

오후 10시가 막 지난 시각, 이들은 거짓말로 도중에 만난 경찰들을 따돌리고 마침내 자하문 고개에 당도했습니다. 청와대를 불과 500미터정도 앞두고 이동중인 이들 앞에 지프차 한 대가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는 경찰 간부인 듯한 사람이 나와서 "나는 종로경찰서장이오, 소속과 신분을 밝히시오"라며 길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또 자신들은 CIC 사령부가 있는 효자동으로 가는 길이라며 길을 비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공비들이 최규식 종로경찰서장과 시비가 붙은 사이에 시내버스 한 대가 올라오다 최 서장의 지프차 뒤에 멈춰 서게 됐는데 공비들은 이 차량이 국군의 지원병력인 줄로 오인했습니다. 그러자 공비들은 최 서장을 향해 권총을 발사해 즉사시키고는 버스를 향해서도 사격과 동시에 수류탄을 투척했습니다. 그리고는 엉겁결에 다들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 시각이 대략 오후 10시 반경이었습니다.

공개적 '1·21 훈련'은 박근혜 정부 출범 때문?

사건 발생 이듬해인 1969년 최규식 전 종로경찰서장이 순직한 현장에 세워진 동상 ⓒ 정부기록사진집


공비 출현 소식이 전해지자 청와대 외곽 경비 병력인 수경사 30대대가 제일 먼저 투입돼 공비들과 교전을 벌였습니다. 야간작전을 위해 30대대에서 발사한 조명탄이 세검정과 북악산 일대를 대낮 같이 밝혔습니다. 군·경은 합동작전을 펴 22일 새벽 김신조를 생포하였으며,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였습니다. 이후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으며,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하고 소탕작전을 종료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유일한 생포자인 인민군 소위 김신조는 인왕산 기슭에 숨어 있다가 붙잡혔습니다. 생포 당시 그는 비상식량으로 엿 두 개, 말린 오징어 한 마리를 비롯해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그리고 물이나 땅속 은폐 시 호흡용 파이프 등을 갖고 있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생포 당시 김신조는 "청와대를 까러 왔다", "박정희 모가지를 따러 왔다!"고 말해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그해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했습니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대내적으로는 '국가안보'를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대북 보복작전을 감행했습니다. 그해 10월 중동부전선 비무장지대를 통해 특수공작대원들을 파북해 북한측에 큰 피해를 입혔는데 그 얼마 뒤 북한 역시 울진·삼척 지역에 대규모 무장공비를 남파시키는 등 남북 간에 보복전이 이어졌습니다. 이밖에도 북한의 '124군부대'에 맞서 '684부대', 소위 '실미도 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하기도 했으나 이후 남북관계 개선으로 실제 활동은 무산됐습니다. 

'1·21사태'의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는 귀순 후 서울침례회신학교에서 침례교 신학을 전공하고 졸업한 후에는 서울성락교회 목사가 되어 2009년까지 재임하였습니다. 2011년에는 한나라당의 '북한인권 및 탈북자·납북자 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하였으며, 1994년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라는 자전적 기록을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사건 발생 45주년을 앞둔 지난 17일에는 '리멤버 1·21' 행사의 일환으로 수방사에서 안보강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생포된 후 귀순하여 목회자로 변신한 김신조씨 ⓒ YTN 화면촬영


앞에서 소개한 수방사의 '리멤버 1·21' 훈련과 종로서 경찰관들의 추모행사는 매년 치러져온 것이지만 그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수방사는 유례없이 올해 훈련은 예년과 달리 공개리에 진행해 언론에 보도됐으며, 종로서의 추모제 역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대체 왜일까요? 이는 다름 아닌 박근혜 정부 출범을 앞둔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종로서 직원들은 올 추모제를 두고 일부 보수단체와 언론이 최 전 서장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다루려고 하자 '1·21사태 직후부터 변함없이 해온 것'이라며 정치적 해석을 경계하였습니다. 반면 '1·21 훈련'을 지휘한 신원식 수방사 사령관은 박근혜 당선인의 동생 박지만씨와 육사 37기 동기생으로 알려지면서 이번 행사를 공개리에 치른 것은 박 당선인의 '코드 맞추기'라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출범을 앞두고 남북관계 개선에 기대를 갖는 견해도 더러 있습니다. 박 당선인이 북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중국과 관계가 나쁘지 않는데다 2002년 5월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단독대화를 나눈 적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명박 정권과 비교해 개선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문제는 남북대결 국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일부 극우세력들인데요, 박 당선인의 향후 행보가 주목됩니다.
#김신조 #1.21사태 #김신조 무장공비사건 #‘리멤버 1·21’ #최규식 경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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