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녀가 된 세자빈- 왕이 된 박수무당, 어떻게?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세 번째 이야기

등록 2012.01.25 11:42수정 2012.01.26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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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 MBC


한국 고대사는 이해하기 힘든 분야다. 우선, 자료가 적기 때문이다. 공인된 역사서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정도에 불과하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종교적 선입견이란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나마 공인되고 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마저 그런 선입견의 영향을 받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유교적 관점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도 불교적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일연 스님마저 고대사를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서 환인을 제석(帝釋)이라 부르고 그 아들을 환웅(桓雄)이라 부르며 환인이 환웅에게 준 인장을 천부인(天符印)이라 부른 것을 두고, 신채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제석'이니 '웅'이니 '천부'니 하는 따위가 거의 다 불경에서 나온 명사이며, 또 삼국사 초반의 사회에서도 여성을 매우 존중하였다는데 여기서는 남자는 신의 화신이고 여자는 짐승의 화신이라 하여 여성을 너무 비하하였으니, 나는 이것이 순수한 조선 고유의 신화가 아니라 불교가 수입된 이후에 불교도의 손에 의해 윤색된 것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형 샤머니즘인 신선교가 지배한 시대를 불교적 시각으로 조명하고 여성이 존중된 시대를 남존여비의 시각으로 조명하다 보니, 그 시대의 참모습을 올바로 전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신채호의 지적이다. 일연 스님이 자기 종교와 자기 시대의 관점으로 고대사를 기술하다 보니 이런 오류가 생겼다는 것이다.

통계청의 국가통계포털 사이트에 따르면, 2005년 현재 불교 인구는 1072만463명으로 내국인 인구의 22.8%, 개신교 인구는 861만6438명으로 18.3%, 천주교는 514만6147명으로 10.9%다. 한편, 무종교는 2186만5160명으로 46.5%다. 무종교가 절반을 차지한 상태에서 불교·개신교·천주교 신도가 총 31.5%를 점하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지배적 종교는 이 세 가지라 할 수 있다.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무녀로 등장하는 허연우(한가인 분). ⓒ imbc


만약 미래의 역사가가 불교·개신교·천주교를 배제한 상태에서 자기 종교와 자기 시대의 관점으로 21세기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그린다면, 그렇게 해서 도출된 결과가 과연 정확할 수 있을까? 대답은 들으나마나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과거의 지배적인 종교들을 통해 그 시대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신선교가 지배한 시대(고조선 시대), 신선교·불교·유교가 지배한 시대(남북국 이전), 불교·유교·신선교가 지배한 시대(남북국~고려), 유교·불교·신선교가 지배한 시대(조선 전기), 유교·불교가 지배한 시대(조선 후기), 불교·개신교·천주교가 지배한 시대(대한민국)를 이해하려면, 각각의 종교를 통해 그 시대에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 전기에 불교·신선교가 지배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조선시대' 하면 유교부터 떠올리는 선입견의 산물이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왕실과 서민층에서는 불교·신선교가 권위를 갖고 있었다. 또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신선교를 신봉하는 무녀들이 성수청이란 국가기관을 형성했다. 조광조에 의해 혁파된 소격서 역시 신선교 계열의 국가기관이었다.

김유신, 산상수행에 나서 하늘에 기도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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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격서 터.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소재. ⓒ 문화재 공간정보 서비스


지배적인 종교들을 통해 각각의 시대를 들여다 볼 경우, 역사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다. 또 그렇게 할 경우, 우리는 역사 속 인물들의 '이상한 행동들'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화랑 김유신의 '이상한 행동들'이 자연스레 이해될 것이다.

화랑이 된 지 2년 뒤인 611년, 열일곱 살의 김유신은 수행을 목적으로 중악산에 올랐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 그리스도가 본격적 전도에 앞서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했다는 성경 마태복음 4장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듯, 화랑이 된 김유신도 본격 활동에 앞서 산상(山上)의 수행에 나섰던 것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김유신은 "저에게 능력을 주십시오"라며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그랬더니 신비한 노인이 나타나 술법을 전수해주고 사라졌다. 김유신이 2리 정도 따라갔으나, 노인은 사라지고 오색구름만 찬란했다. 참고로, '1리' 하면 4킬로미터를 떠올리지만, 고대에는 '5킬로미터'를 의미했다.

이듬해인 612년, 김유신은 또다시 산상의 수행에 나섰다. 이번에는 보검을 들고 열박산에 올라 향을 피우며 하늘에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내려온 광채가 보검을 감싸고 돌았다. 칼이 저절로 움직일 듯했다고 '김유신 열전'은 전하고 있다.

신선 같은 노인이 술법을 전해주고 신비한 기운이 보검을 감쌌다는 대목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김유신의 종교적 배경을 이해하면, 우리의 판단은 달라질 것이다. 적어도 김유신의 두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편에서는 화랑들이 얼굴을 곱게 화장하고 산천을 유람하면서 수행을 쌓았다고 말했다. 이런 수행 방식은 유교·불교의 것이 아니다. 남자 얼굴에 알록달록한 분칠을 하는 것은 유교·불교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또 불교 수행자도 산속에서 수행하기는 하지만, 산천을 전문적으로 유람하지는 않는다. 화랑의 수행 방식은 전형적인 신선교의 그것이었다.

<조선상고사>에서도 강조된 바와 같이, 화랑을 선랑(仙郞)이라고도 부르고 화랑 지도자를 국선(國仙)이라고도 부른 것은 이들이 신선교의 수행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김유신을 비롯한 화랑들은 신선교의 신봉자들이었던 것이다.

민속학자·언어학자인 서정범은 <한국 무속인 열전>에서, 남자 무당이 경상도 방언으로 화랭이·화래이·화래기로 불린다는 점, 조선시대 사전인 <훈몽자회>에서 '화랑은 박수무당'이라고 한 점 등을 근거로 "(이는) 어학적인 면에서 화랑이 박수라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남자 만신(무당) 등이 옛날에는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을 뿐더러 지도자적 입장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영험한 화랑 김유신, 그가 심리전술에 능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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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묘. 경북 경주시 충효동 소재. ⓒ 문화재 공간정보 서비스


화랑들이 특히 산을 중시한 것은, 상제(上帝)가 산을 통해 인간 세상에 강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유신처럼 이 산 저 산을 유람하며 하늘에 기도를 올렸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주말만 되면 대대적으로 산에 오르는 것은, 산을 신성시하고 산상 수행을 중시하는 샤머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시각이 많다.

김유신이 신선교 수행자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가 신비한 노인과 신비한 빛을 봤다는 기록이 자연스레 이해될 것이다. 40년간 무당 3천 명과 인터뷰한 서정범에 따르면, 산상 수행의 결과로 신적 존재를 접하고 그것을 계기로 영적 능력을 체득했노라고 말하는 무속인들이 많다.

서정범은, 무속인들이 산상 수행의 과정에서 신을 만나는 것은 그들의 무의식에 잠재된 신적 존재의 이미지가 환상을 통해 나타난 결과라고 해석했다. 무의식 속의 초월적 존재를 발견함으로써 인간 내면에 있는 영적 능력이 계발된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김유신 역시 환상을 통해 무의식 속의 신적 존재를 발견했고 그것을 계기로 영적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김유신 열전'의 일화가 전혀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적어도 김유신의 두 눈에는 신비한 노인과 신비한 빛이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유신은 그런 계기에 힘입어 '영험한 화랑'이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영험한 샤먼' 혹은 '영험한 박수무당'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그런 인물이었다고 생각하면, 그가 심리전술에 특히 능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객관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기묘한 심리전술을 통해 뒤집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유신 같은 화랑들이 오늘날의 무당과 완전히 똑같았을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당시의 샤먼은 국가의 핵심 지식인으로서 국가 경영에 참여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무속인들과 달리 국가적으로 상당한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영적 측면에서는 과거의 무속인이나 현재의 무속인이나 다를 것이 없지만, 지위·학력·경제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전자가 후자를 압도적으로 능가했다. 적어도 조선 전기까지는 <해를 품은 달>에서도 묘사된 바와 같이 무속인의 위상이 오늘날과 확연히 달랐다. 유교 원리주의를 내세우며 무속의 혁파를 단행한 조광조 정권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고대 주나라 때의 통치체제를 정리한 책이자 19세기까지도 동아시아 위정자들의 참고서가 된 <주례>만 보더라도, 과거의 무속인들이 국가 경영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참여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유교·불교가 채울 수 없는 영역을 샤머니즘이 채워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유교·불교뿐만 아니라 신선교 역시 한민족을 지배한 시기가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역사서를 읽으면, 우리는 역사의 참모습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김유신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의 행동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이미지를 보다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해를 품은 달 #김유신 #샤머니즘 #무속 #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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