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를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스멀거리고...

역사소설 함흥차사 - 3

등록 2012.01.20 11:33수정 2012.01.2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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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을 감싼 삼각산(三角山) 아래의 초옥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푹푹 찌는 여름에 바람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초옥에 갇혀 글공부를 하던 고역에서 해방된 아이들이 개울로 달려가 미역을 감았다.

더위를 식힌 아이들이 인근의 참외밭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갔다가 주인에게 들키는 바람에 옷도 걸치지 못하고 달아났다. 주인이 달려와 옷을 걷어가자 아이들이 어쩔 줄 모르고 울상을 지었다.

나이가 들었으되 기골이 장대한 승려가 아이들을 타일렀다. 주인을 부른 승려가 바랑을 열어 곡식을 내주고 아이들에게 참외를 먹게 하였다. 승려가 초옥으로 다가가자 이미 정도전(鄭道傳)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구면인 듯 반가운 기색으로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승려 무학(無學)이 쉰셋이며 정도전은 서른여덟으로 나이차가 적지 않고 불자와 유자(儒者)로서 상반된 입장이었지만, 의기가 투합한 두 사람은 모든 것을 파탈하고 격의 없이 교류하고 있었다.

"모처럼 대사께서 왕림하셨는데 대접할 것이 없어 걱정이오이다."
"유배에서 풀린 지 오래 지나지 않으신 데다, 무료로 서당을 열고 있는 삼봉(三峰)께서 무슨 돈이 있으리까? 걱정 마시고 불이나 피워주십시오."

정도전이 아궁이의 솥에 물을 붓고 불을 지피자 무학이 바랑에서 꺼낸 곡식을 씻어 안쳤다. 작은 풍로에 올린 뚝배기에 된장을 풀고 오던 길에 뜯은 푸성귀를 넣고 끓이자 제법 먹을 만한 밥상이 차려졌다. 식사를 마친 정도전이 우물에서 머루주를 꺼내는 것을 본 무학이 반색을 했다.

"소인은 본래 식견이 좁고 벼슬에 나온 다음에도 유배지를 떠돌다보니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알지 못합니다. 크게 대오각성하신데다 천하를 두루 주유하시는 대사님께 가르침을 청하…"
"허허허! 삼봉께서는 그동안 농담만 늘었구려. 천하를 바로 잡을 인재는 바로 삼봉을 두고 이른 것이거늘, 어찌 근본도 모르는 땡중에게 가르침을 청한다는 것입니까?"

무학이 웃으며 머루주를 비웠다. 그의 앞에 있는 정도전은 대단하다는 정도로는 평가하기 어려웠다. 주자학(朱子學)을 도입하여 유학의 비조(鼻祖)로 추앙되는 안향(安珦)의 적통을 이은 이색(李穡)의 문하 가운데 정몽주 이외에는 적수가 없다고 칭송이 자자했던 정도전은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유배지를 전전하고 있었다. 그것을 안타까워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리 내색하지 않았다. 

"선왕께서 승하하지 않으셨다면 어찌 삼봉이 이렇게 지내겠습니까?"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이니, 대사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오."
"삼봉 같은 인재가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자체가 망조라는 겝니다. 하기야 오래 전부터 이름 밖에 남지 않은 고려가 제대로 돌아가기를 기대하는 자체가 미친 짓이겠지요."

원(元)나라에게 패배한 이후 고려의 왕이 될 후계자는 대대로 원나라에 입조하여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오래 기간 거주하면서 충성도를 인정받고 황실의 공주를 배필로 맞은 다음에야 겨우 돌아와 왕이 될 수 있었는데,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미로서 충(忠)의 항렬을 사용해야만 했다. 졸지에 원나라의 부마국(鮒馬國)으로 전락한 고려는 25대의 충렬왕부터 시작하여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으로 거의 70년이나 이어지다 31대에 공민왕(恭愍王)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기를 펴기 시작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열두 살에 원에 입조하여 충성을 맹세하던 충숙왕의 둘째아들 - 충숙왕의 장남이 충혜왕인데 원에 의해 강제로 폐위당했다–은 고려의 왕실이 어지러워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충혜왕의 아들 충목왕의 시대는 이전과 비교해서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충목왕이 죽은 다음 이복동생으로 보위를 이은 충정왕의 시대는 그렇지 못했다. 충정왕이 나이가 어려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데다, 왜구와 홍건적이 극성을 부리고 외척들까지 전횡을 일삼는 바람에 국정이 극도로 문란해지자 대신들의 주청에 의해 종주국인 원나라에서 폐위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원에 머물던 충숙왕의 차남이 후계자로 결정되어 배필이 된 황실의 공주를 대동하고 귀국하여 보위에 앉으니 그가 바로 31대 공민왕이다.

"정말 아까운 분이셨지요."
정도전이 나직하게 한탄했다. 공민왕은 충자 항렬을 사용하던 이전의 왕들과 전혀 달랐다. 남달리 영민하고 자주적이었던 공민왕은 즉위한 이후 80년에 달하던 원나라의 예속에서 벗어날 기회를 노렸다. 당시의 원나라가 50여 년 동안 황제가 무려 열한 명이나 바뀌고, 심지어 황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기간조차 여러 차례에 이르는 등 극도의 혼란에 빠진 것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원나라가 지배력을 잃자 압제 당하던 한족(漢族)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마침내 주원장(朱元璋)이 명(明)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회를 노리던 공민왕이 행동에 나서 원나라와의 종주관계를 끊고 빼앗겼던 북방의 영토까지 수복하는 등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다른 왕이었다면 엄두조차 낼 수 없었을 것이었다.

본질적인 개혁과 체질개선을 시도하던 공민왕은 미처 대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재위 23년 만에 승하하고 말았다. 이전의 왕들답지 않게 지극히 금슬이 좋았던 원나라 출신의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먼저 별세한 것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기력을 잃고 쓰러졌다고 말하는 자들이 많았다.

"왕비께서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어도 전하께서 원하시던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학이 다시 한잔을 비웠다.
"고려는 굶주려 죽은 시체나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런 상태에서 신돈(辛旽)을 내세우고 원나라에 빌붙어 나라를 망치는 매국노 몇몇을 척결해보았댔자 멸망을 약간 늦추는 것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었겠지요."

무학은 고려의 멸망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했다. 아무리 나라가 어지럽더라도 그렇게 말했다가는 경울 치기 십상이며, 심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발언이었음에도 정도전은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도전은 무학에게 깊이 동조했다. 원나라의 충견 행세를 하는 부원배(附元輩)들과 부처님을 앞세워 합법적으로 강탈하는 사찰들이 고려의 목에 빨대를 꽂고 피를 빨아대는 바람에 껍질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개혁정책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반란까지 일으켜 하마터면 공민왕을 죽일 뻔했던 부원배들과 그들과 대립했던 권신(權臣)들은 한통속이었다. 실제로 공민왕에게 협조하고 토벌의 명분을 얻어 부원배들을 제거하여 그들의 것을 집어삼킨 권신들도 자신들의 이득에 저해된다는 판단이 들면 서슴없이 반역을 저질렀으며, 거의 전 국토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사찰 세력들도 은밀히 권신들과 손을 잡고 공민왕을 타도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민왕이 천수를 누렸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터였다.

"대사께서는 대안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대안은 무슨 대안입니까? 기둥이 썩고 대들보가 좀을 먹은 데다, 주추까지 허방이 된 집을 고치느니 아예 허물고 새로 지어야지요. 그리고 죽은 것의 몸피가 새로운 생명을 키울 수 있는 자양분이 되는 것이 삼라만상의 순리인 만큼 질서가 제대로 이루어질 있도록 돕는 것이 배운 자들의 의무일 것입니다."
"허면, 새로운 집의 기둥과 대들보가 될 재목은 구하셨습니까?"
"낡은 집을 허물 도끼와 터를 고를 보습을 구하는 것이 순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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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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