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시 근대인물동상, 논란 소지 또 있다

동상건립 대상자 역사적 사실 명확히 해야 논란 안 생길 것

등록 2012.01.17 17:25수정 2012.01.1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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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가 군산을 대표하는 근대인물을 선정해 동상을 건립하려는 사업이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시는 친일행적을 가진 이만수·채만식을 제외 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또 다른 근대인물인 임병찬 장군도 논란의 대상이 됐다. 임병찬 장군이 조선 말 동학농민혁명의 주역 중 한명인 김개남 장군을 관가에 밀고한 행적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군산시가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하지 못한 채 동상을 건립할 경우 두고두고 역사적 논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어, 시와 관련위원회의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의의 큰 동학농민혁명 주역 김개남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말 당시 부패한 관료의 행태에 농민들이 항거한 혁명으로, 신분제 타파 등 인간평등사상과 민중을 억압하는 모순된 사회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사회개혁 사상을 담고 있다.

 

특히 외세에 저항한 민족운동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기와 병력 부족, 내부 의견대립 등의 문제로 정부·일본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하며 목적한 바를 다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 동학농민혁명을 바탕으로 농민층의 반일애국주의가 이후 일제에 항거한 의병활동에 큰 도움이 됐으며, 농민들의 내정개혁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에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민족사에서 높이 평가받아 2004년 동학농민혁명특별법이 제정됐고, 역사적 가치를 후손에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군산시가 추진하는 근대인물 중 한사람인 임병찬 장군이 이 동학농민혁명 주역 중 한명인 김개남 장군을 밀고했고, 사형 당하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 때문에 임병찬 장군이 동상건립 대상자로서 적절한지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참여자치시군산시민연대는 임병찬 장군의 이같은 행적을 들어 동상건립 대상자로 부적절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김개남 장군의 후손 또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임병찬 장군이 의병장으로서 항일운동을 한 업적은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 김개남 장군을 밀고 했다는 사실이 동상 대상자로 적절치 않다는 주장이다.


정읍문화원 "임병찬 장군 밀고자 아니다"

 

정설로 알려진 이 같은 내용에 다른 의견도 있다. 정읍문화원 김희선 사무국장은 "논란이 되는 '밀고'는 당시 두 사람의 암묵적 동의에 의한 것"이라며 "밀고했다는 사실만을 놓고 동학농민혁명의 배신자로 낙인찍어서는 안 된다"는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김 사무국장은 "당시 동학을 이끌던 송화중 총관령도 '나는 곧 죽을 목숨'이라 말했듯, 동학의 주축들은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임병찬 장군과 김개남 장군은 친구사이며, 김개남 장군을 해할 목적으로 관에 밀고를 한 것이 아니라 고육지계(苦肉之計: 적을 속이려고 자신의 희생을 무릎 쓰며 꾸미는 책략)를 쓴 것으로 보인다. 즉 체포당하기 전에 김개남 장군은 더 많은 동학농민군을 살리기 위해 임병찬 장군과 상의 후 자신이 동학의 대표로 사형 당한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고 말하며 "이를 뒷받침해줄 구체적 자료를 수집하는 중이다"고 설명했다.


시, 논란 없애려면 명확한 역사정립 필요하다

 

역사적 사실관계로 따지자면 '임병찬이 역사적 의의가 큰 동학농민혁명의 주축인 김개남을 밀고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고, 이 사실을 근거로 '서로 간 나라를 구하려는 방법이 달라 일어난 비극'이라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그 내면에 '김개남 장군이 동학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이 대표로 희생하려 했고, 합의하에 임병찬 장군이 이를 도와준 것이다'는 주장도 있어 임병찬 장군과 김개남 장군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정립이 안 된 상황이다.

 

군산시는 사업초기에 이만수와 채만식의 친일행적에 대해 철저한 역사적 평가 없이 동상건립을 추진하려다 비난여론에 휩싸였고, 시의 명예가 실추된 바 있다. 시는 이들의 동상건립은 철회한다고 밝혔지만, 임병찬 장군의 역사정립과 평가가 명확하지 않은 채 건립을 강행할 경우 훗날 또 한 번의 비난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시는 동상건립이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해당 인물들에 대해 철저한 역사정립과 평가가 끝난 후에 추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해(1894년) 겨울, 동학농민혁명의 주역 인물이었던 김개남이 (임병찬이 살고 있던 종송리) 이웃 너듸(四升) 마을 서영기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임병찬은 김종섭을 시켜 김개남으로 하여금 더욱 안전한 종송리로 옮기도록 설득하여 같은 마을 송두용 집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김송현, 임병욱, 송도용을 시켜 전라관찰사 이도재에 고발했다. 이도재는 황헌주로 하여금 강화병(江華兵) 80명을 거느리고 종송리에 와서 12월 1일 새벽 김개남을 잡아갔다.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서울로 압송하는데 위험을 느껴 12월 3일(양 12월 29일) 신시(申時·하오사시(下午四時)) 서교장(西敎場)에서 임의로 처형하여 최후를 마치니 나이 42세였다. 

 

1895년 정월, 김개남을 체포한 공으로 임실 군수를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또 관찰사가 쌀 20석을 보내왔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정부는 임병찬 대신 황헌주를 임실군수로 제수했다.

 

[정읍의병사 164~165쪽, 정읍시청자료 참조]

덧붙이는 글 | 군산 시사저널 서해타임즈 김민진 기자입니다.

2012.01.17 17:25 ⓒ 2012 OhmyNews
덧붙이는 글 군산 시사저널 서해타임즈 김민진 기자입니다.
#임병찬 #김개남 #동상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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