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베르니, 오베르 마을을 돌아보며

10일 동안의 프랑스 여행기 3

등록 2010.11.01 18:07수정 2010.11.0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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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예술의 나라라고 한다. 이번 프랑스 여행에서 나는 두 분 화가의 생가가 아닌 말년에 살았던 마을을 가 보았다. 두 분은 모두 18세기에 프랑스에 살았던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이다. 나는 사실 미술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 프랑스 여행을 따라 나섰다가 우연이 이 화가들이 말년에 살았던 마을을 둘러보면서 18세기에 살았던 이 두 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다.

나는 이 두 사람의 그림에 대해서는 미술 전문가가 아니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 사람들의 살았던 삶이 더 나의 관심을 끌었다. 두 사람 모두 좀 흥미로운 삶을 살다 간 화가들이었다. 모네는 말년에 불륜에 빠져서 남편이 있는 남의 부인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처가 죽자 남의 부인과 자식까지  데리고 이 지베르니 마을에 와서 정원을 꾸미고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죽었다. 또한 고흐는 어떤가. 그도 참 불후한 삶을 살다가 간 사람이다. 그는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그림을 그리다가 결국 오베르 마을에서 37살의 나이에 권총 자살했다.


10월 3일 우리는 모네가 말년에 생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렸다는 지베르니 마을을 찾았다. 프랑스 국립기념관으로 지정된 모네의 기념관을 가기 위해서 마을의 길로 들어섰다. 곧바로 뻗은 마을길의 양 옆에 넓은 정원을 가진 집들이 있었다. 화려하게 꽃과 나무로 뒤덮인 정원들, 모두들 동화 속의 요정이 살 것만 같이 아름다운 정원들이다. 은퇴한 정치가, 연예인들이 지베르니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이 곳 집값이 굉장히 비싸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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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베르니 마을 마을의 모든 집들이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다 ⓒ 조갑환


기념관에 도착해서 모네의 기념관 및 정원에 들어가려고 하니 늦은 5시 20분이다. 관리인에게 들어가기를 요청했으나 못 들어가게 막았다. 지금 들어가서 구경하면 마감 시간인 5시까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베르니 마을에 온 것은 모네의 정원을 보기 위하여 왔는데 막상 모네의 정원을 보지 못한다면 멀리까지 온 보람이 없지 않겠는가. 가이드 고 선생께서 우리 제수씨를 가리키며 관리인에게 한마디를 했다. 멀리 한국에서 온 저널리스트인데 이곳을 보려고 멀리 한국에서 17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그러자 그도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그럼 들어가서 20분만 보고 나오라는 것이다. 기자 '빽'은 프랑스에서도 통한다며 모두 웃었다.

우리는 20분 안에 보기 위해서 쏜살같이 달려 들어갔다. 꽃과 나무가 우거진 정원, 그 사이로 쭉 뻗은 오솔길, 길옆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일본 식의 영향을 받았다는 나무다리, 나무다리 아래 냇물 속에서 물고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정원의 가운데는 연못이 있고 연못 주위에는 길게 가지를 늘어뜨린 수양버들이 연못을 감싸며 연못에는 연꽃 수련들이 둥둥 떠있다. 이 정원의 아름다움을 글로 다 묘사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안타깝다. 모네의 이 정원이 바로 중국의 고사에 나오는 신선들이 놀았다는 무릉도원의 풍경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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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기념관 및 정원 풍경 꽃과 나무로 덮여 있는 신선이 노니는 무릉도원이라고나 할까. ⓒ 조갑환


10월 4일에는 오베르마을을 찾았다. 네델란드에서 출생해서 마지막 생을 프랑스의 오베르마을에서 마감한 고흐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서다. 고흐는 오베르마을의 공동묘지에 동생과 같이 묻여 있었다. 생전에 무척 우애가 좋았다는 형제, 고흐가 죽은 뒤 6개월 뒤에 형 고흐를 따라 갔다는 동생 테오, 그들은 죽어서도 같이하고 있었다. 그들의 무덤은 2평의 평평한 땅에 담쟁이 덩굴나무로 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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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묘 옆에 생전에 우애가 좋았다는 동생 테오가 묻혀 있다. ⓒ 조갑환


그는 당시의 사회에서 적응을 못하고 방황하는 사회의 비적응자였다. 성격적으로도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나 보다. 한때 남프랑스의 아를(Arles)에서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과 같이 지내기도 했는데 그 때 폴 고갱과 다투고 자신의 귀를 잘랐다는 일화는 그가 얼마나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는지 말해준다. 결국 그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게 그림이냐고  비아냥 받으면서 정신병자로 취급받다가 결국 권총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고흐가 마지막에 살았던 오베르 마을에 들어섰다. 낡은 성당이 보였다. 성당 옆의 귀퉁이에 고흐의 그림 '교회'가 있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림 속의 성당과 밖에 우뚝 서있는 성당의 모양이 똑같다. 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고흐의 그림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그림 속의 교회처럼 150년 동안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자라는 나무만 잘라주어 그림 속의 나무와 키를 같이하고 있었다.

마을이 온통 고흐다. 고흐가 정신병에 걸려서 자신의 주치였으며 미술 수집가였던 의사 가세의 진료를 받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는데 고흐는 이 마을에서 70일을 살면서 전원풍경을 배경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마을 곳곳에 고흐의 그림이 들어있는 표지판이 서있고 그림의 배경을 당시처럼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이 마을은 고흐로 먹고사는 마을이었다. 마을 곳곳이 고흐의 기념품을 팔기도 하고 관광객을 위한 식당, 고흐가 자주 들렸던 카페 등 마을의 모든 것이 고흐와 함께 돌아가고 있었다. 

이번 프랑스 여행에서 역시 프랑스는 관광 선진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사랑, 그것들을 관광자원화 하여 관광소득을 올리는 그들의 관광산업전략을 우리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베르니에서도 모네가 들렸던 카페를 1800년대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 모네가 카페에서 와인을 마시면서 스케치했던 그림들을 카페의 벽에 붙여 놓았다. 관광객들은 가버린 모네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서 그 카페에 들러 모네처럼 와인을 마시며 스케치를 한다. 관광객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1800년대로 돌아가 모네를 만나는 기분일 것이다.  지베르니 마을을 가면 관광객들은 모네가 들렸던 마을의 카페에 들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프랑스 사람들은 그 들이 낳은 유명화가들의 자취를 잘 보존해서 그들의 소득과 연계하고 있는 것이다.

오베르 마을도 마찬가지다. 모든 마을의 상점이 고흐와 연관된 것들이다. 오베르 마을도 고흐의 발자취를 잘 보존해 놓았다. 고흐의 세계적인 명성을 잘 이용하여 그들은 먹고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문화예술인들의 삶과 연계한 문화관광산업이 발전하려면 빠른 시간 안에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후대를 위해서 먼저 우리 문화인들이 세계적으로 알려져야 할 것 같다. 모네나 고흐를 찾는 관광객이 많은 것은 모네나 고흐가 그만큼 세계적으로 이름값이 있기 때문이다. 
#지베르니 #오베르 #모네 #고호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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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행에 관한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여행싸이트에 글을 올리고 싶어 기자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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