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자살도시 (Suicide City) - 65

열여덟고개 입관(入棺) - 3

등록 2010.10.28 11:21수정 2010.10.2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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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라는 아기를 내려놓고 로빙에게 달려가서 쓰러진 그의 머리를 잡고 통곡했다. 로빙의 복부는 뻥 뚫린 채 피를 쏟아냈고 달리 손을 쓰기 힘든 상태였다. 왜 선인과 악인의 말로가 균일(均一)할까. 그녀에게 정을 준 마지막 인척, 차라리 아버지로 여기고 싶었던 삼촌의 비참함에 오열을 토했다. 로빙은 옷 안에 손을 넣더니 책자를 꺼내들었다. <요격의 권리>.

  "어서 나가라. 이 책을 갖고...... 저 승강기의 하중은 팔십 킬로그램이야. 그보다 무거우면 작동하지 않으니까 나나 유니트를 태우려 하지 마. 아아...... 난 구차하게 이십년을 더 살았지만 넌 의미를 찾는데 이십년이 들었어. 이걸로 네가 여길 나갈 떳떳한 이유가 되겠지. 가. 시간이 없어. 빨리!"


  목젖이 울컥하더니 로빙은 숨을 거뒀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형장(刑場)에서 원죄의 투구를 쓰고 낙인을 지우는데 몰입했던 형리(刑吏)의 만종(晩鐘)이었다. 허망한, 선과 악을 자로 또렷이 잴 수 없듯 삶의 낙폭도 상대적인, 그렇게 만신(萬神) 앞에서 동질해지는 부음(訃音)을 받은 것이다. 미아라는 울음을 그쳤다. 아니, 그쳐야만 했다. 사자(死者)를 정화시키는 건 눈물이 아니다. 로빙과 유니트를 혼혈시키는 예복(禮服)을 입어야 하기에.

  쾅. 콰앙. 쿠르릉 쿠르릉.

  폭발로 지면이 갈라지고 동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신도들의 아우성은 격해지고 위에서 떨어지는 바위에 깔려 돌무더기가 되었다. 낙성식(落成式)을 성황리에 마칠 시점. 미아라는 책을 끼고 어느새 옆에 와있는 라이즈를 치켜봤다. 라이즈는 순식간에 터진 일련의 변고(變故)에 어이없었지만 내심 활로를 여는데 매진했다. 로빙의 유언을 들었기에 승강기가 탈출하는 수단임을 알았지만 타당한 후속책이 떠오르질 않았다.

  80킬로그램이 한계면 한 명만이 탈 수 있다. 미아라 아니면 라이즈. 아기는 태울 수 있겠다. 라이즈와 아기, 그러면 금상첨화. 그녀를 밀어내야 하나. 비열하게시리. 미아라가 나가본들 지명수배 되어 체포될 것이다. 대타가 있어야 한다.

  궤변의 무적함대가 양심의 망루를 점거하려 했다. 궤변과 양심은 야누스처럼 맞닿은 쌍돛인가 양심의 줄임말이 궤변이려나. 라이즈는 갈등했다. 승강기의 탑승자가 미아라임에 명백했지만 살고 싶다는 애끓는 비원(悲願)은 라이즈를 합리화로 기울게 했다.


  "받아요. 아기와 함께 나가세요."

  라이즈에게 책을 넘기고 미아라는 아기를 데려왔다. 깜빡 만우절로 오인했다. 부처가 참회하라는 반어법으로 뒤바꾼 건가. 라이즈는 만등회(萬燈會)의 휘황한 등불에 신기해하는 동자승처럼 멀뚱거렸다.

  "당신이 타야 해요. 페미니즘이나 에티켓을 들먹이지는 마세요. 중요한 건 증오 그리고 증오를 결행하는 저돌성. 난 그걸 잃어버렸으니 탈출한들 푸슬푸슬 물러지겠죠. 쿠키처럼요. 당신은 소망이 있으니 할 수 있어요."
  "나 대신 당신이 죽겠다고? 내 소망은 중요하지 않아. 난 자격 없어. 죽어도 돼."

    거짓이었다.

  "그렇다면 그 외에 뭐가 중요한가요?"

  미아라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게 당신의 외향적인 터부(taboo)거나 내향적인 복화술인들 날 설득하지 않아도 되요. 당신은 구름에서 떨어진 옅은 뭉치가 아니에요. 그러니 당신 목숨이 하찮다면 그건 인류 전체의 생명을 경시하는 거겠죠. 당신을 제외한 우리 모두는 과거에 결박되어 탈피할 수 없지만 당신은 달라요. 발끝부터 속물이든 개과천선했던 당신은 끝을 보려하기 때문이죠. 나한테 진솔하지 않아도 되요. 당신 스스로에게도. 살려는 의지, 그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여요. 그리고 가세요. 당신을 탓할 사람도 없으니 자탄하지도 말구요. 다만 이 아기만은 잘 돌봐주세요. 어쩌면 이 아기는 다음 세대의 재목이 될지도 모르겠죠. 어쩌면요. 이런 소원이 부질없다는 거 알지만...... 당신이 생존해도 그건 축복도 행복도 아니에요. 아마 당신은 지금 죽지 못한 걸 평생 한탄하며 괴로워할지도 몰라요. 당신은 여기 있는 이들의 딱지를 둘러맨 삶을 살게 될 테니까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요. 정말 당신이 갈 길이 험난하고 쉽지 않으니까 이렇게 애원하는 겁니다. 가세요. 그리고 이어가주세요."

  설득하려다 납득당한, 엉뚱한 곳에 배송된 화환을 받아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러야하는. 라이즈는 못내 심란했다.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양심이 시릿했다. 그냥 떠나면 되는데. 다시 폭발이 일어났고 돌가루가 우수수 넘실거리며 예배소는 먼지로 낭자(狼藉)했다. 더는 끌지 말라 재촉하는 권유였다.

  미안해. 비겁하지만 나가면 당당한 남아(男兒)가 될 거야.

  라이즈는 아기와 책을 갖고 승강기로 달려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게 편했기에. 승강기가 닫히자 위로 발진했고 고속으로 올라갔다. 폭발의 여파로 동굴 천장이 쫘아악 갈라지며 상승하는 승강기를 에워싼 암반(巖盤)들도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꼭대기가 개장하자 월광이 대령(待令)하고 있었던 것처럼 승강기를 영롱한 빛으로 매립시켰다. 이 광경은 성불(成佛)을 이룬 불자(佛子)의, 성묘교회(聖墓敎會)에서 부활한 고인(故人)의 승천을 연상케 해서 광장의 군중들은 감탄하며 혼절했다.

  승강기 안은 방음이라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라이즈는 그들의 입모양으로 구별할 수 있었다. 그것은 검소한 뚜쟁이, 사창가의 기우제(祈雨祭),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의 상술이 총합한 세기말의 간질병이었다. 라이즈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저들의 발정은 시효(時效)가 지난 외래어(外來語)일 뿐이다.

  난 달라. 난 영생(永生)을 얻은 거야!

  환성(歡聲)도 환청(幻聽)도 닿지 않는 사계(沙界)로 승강기는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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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현존(現存) #재림자 #폴리스 #집단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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