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자살도시 (Suicide City) - 62

열일곱고개 역성(易姓) - 3

등록 2010.10.23 11:58수정 2010.10.23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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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훅한 열탕(熱湯)의 욕조에 물이 찰찰 넘치고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왔다. 캐럿이 등을 가장자리에 붙이자 수압이 강해지며 물살이 시원하게 그를 마사지했다. 사택 별채에 있는 사우나는 캐럿이 자주 들러 몸을 푹 담그고 노독(路毒)을 푸는 시설이었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뻐근했고 식사 후 사우나로 직행했다. 욕조에서 뿜어 나오는 물이 뭉친 근육을 살근살근 비볐지만 네버폴리스 총회 이후 축적된 분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네버폴리스 총회는 캐럿의 총력전을 엉망으로 만들고 유니트와 사일런스 그룹의 정체까지 폭로해서 시궁창에 빠뜨린 대참사였다. 개차반 로빙. 어디서 잘못된 거지. 로빙이 캐럿의 필살기를 단칼에 부러뜨리는 전격전(電擊戰)으로 캐럿과 수호경, 사일런스 그룹을 몽땅 수장(水葬)시키는 물귀신이 될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 로빙을 장렬히 순국(殉國)하는 애국지사로 변모시킬 변수가 있었나. 로빙의 그릇으로 담을 수 있는 품성이 아닌데.

 

   아무리 쥐어짜도 종잡을 수 없는 배반이라 캐럿의 성깔은 치솟기만 했다. 게다가 캐럿에게 뇌물을 받은 대의원들과 골드폴리스 수뇌부의 변절이 그를 가일층 약 올렸다. 대의원들은 캐럿이 자살도시에 유니트가 있다는 언질을 주지 않았다며 자살도시 관할권 이전 투표를 무효화시키고 뇌물은 반납하지 않았다. 골프폴리스의 중진들은 대의원 매수는 캐럿의 독자적인 행보라며 골드폴리스와 선을 그었고 캐럿을 문책해서 실각시키려 했다.

 

   골드폴리스 각료 위원회가 캐럿을 청문회에 회부했지만 그는 불참하며 버텼다. 고이 하야(下野)할 심보는 눈곱만큼도 없었고 비자금을 있는 대로 가용해서 역공할 계책을 세웠다. 차제에 정적(政敵)을 숙청하고 자신의 권좌를 공고히 다질 가지치기이다. 금전으로 물린 판은 금전으로 보복하라. 돈을 위용을 당할 자는 없다. 누대(累代)에 걸쳐 누실(漏失)된 적이 없었던 성은(聖恩)이자 영세(永世)의 법리이므로.

 

   땀을 빼며 갖가지 정념(情念)에 빠져들 때 후끈해지는 실온(室溫)에 숨이 가빠왔다. 캐럿은 욕조에서 비둔(肥鈍)한 체구를 꺼냈다. 온도계를 보니 평일보다 눈금이 10도나 높았다. 집사가 히터 스위치를 잘못 눌렀나. 캐럿은 땀을 닦으며 꾸부정히 문가로 갔는데 매캐한 내가 스며들어와 코를 쥐었다. 사우나의 출입문이 무언가를 얼렁얼렁하니 번지게 하는 요상한 화기(火器) 같아 캐럿은 흠칫하다 문에 손을 대고 열어젖혔다.

 

   화라락. 실내는 불에 휩싸였고 화마(火魔)들이 손톱을 세우고 아장아장 캐럿에게 쏠려왔다. 불이 난지 꽤 된 듯 통풍(通風)도 막혀 호흡도 곤란했고 검은 연기가 시야를 가려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캐럿은 급박한 사태에 놀라 코를 막고 팔을 휘저으며 방향을 잡으려했다.

 

   "집사! 집사! 어디 있는 거야? 빨리 나를 구해줘!"

 

   연신 악을 쓰며 외쳤지만 불길이 소리를 연소(燃燒)해서 휘감아버렸다. 캐럿은 난생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이대로 생이 끝나 죽는다는. 안돼! 아직 누려야 할 열락(悅樂)이 억수로 쌓였는데. 캐럿은 열기를 견디다 못해 사우나로 후진할 때 외부로 연결된 내실(內室)에서 파란 제복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방화복을 입은 집사였고 캐럿은 그가 오자 뛸 듯이 반가웠는데 더욱 각이 진 역삼각형의 얼굴이 소름을 끼쳤다.

 

   "어떻게 된 거야? 왜 화재경보기가 울리지 않았어? 불은 끄는 중인가?"

   "오전에 누군가 방화를 했고 산바람을 타고 번지면서 예까지 온 겁니다. 전력발전소 운행이 멈추면서 화재경보기를 비롯한 각종 전원(電源)기구들은 단전된 터라 진화(鎭火)작업을 할 수 없었죠."

 

   "뭐라고? 전력발전소가 왜...... 그러면 소방대원들이 온 건가? 왜 아무도 보이는 않는 거야?"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으니까요. 연락도 할 수 없고 연락을 하더라고 올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죠."

   캐럿은 숨이 벅차 버겁게 입을 열었지만 집사는 자기 소관이 아니라는 듯 냉정하니 말했다. 그는 집사의 꿀꿀한 답변에 적이 격해지며 경색했다.

 

   "네가 내 집사란 걸 잊었나. 왜 일꾼이 없어? 돈을 쥐어줘. 돈을 주면 다 해결되는데 웬 개소리야!"

   "소용없습니다. 다 떠났기 때문이죠. 그들은 전부 자살도시로 갔습니다. 그러니 돈이 무슨 필요 있을까요?"

 

   "이이...... 내 말대로 해! 두배, 세배 아니 백배를 줘도 좋아. 저놈들은 돈이라면 환장하니까 부르는 대로 주란 말이야. 돈으로 안되는 게 어딨어!"

   "늦었습니다. 그들이 최초로 해탈했으니까요. 돈이 수전노조차 부릴 수 없을 때야말로 자신들이 이 세계의 올바른 주권자라는 것을 말입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죠. 이제 자살도시에서 인류를 하나로 집적(集積)할 초유의 이적(異蹟)이 행해질 테니 그들에게 돈은 풍화(風化)될 고철일 뿐이죠."

 

   집사가 캐럿을 비웃으며 이죽이자 캐럿은 잔뜩 겁에 질렸다. 자신을 구할 이가 아무도 없고 돈이 종이쪼가리가 된 환난(患難)에 눈앞이 까마득했다.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일이라 대책이 서지 않았다. 벽감(壁龕)의 등잔이 불에 그슬려 꼬부라진 게 메두사의 머리카락 같아 캐럿은 더욱 황망(慌忙)했다. 돈이 통하지 않는다니. 그럼 우리도 돈을 쓸 수 없잖아. 그의 뇌파에 속삭임이 꽂혔다. 이게 유니트의 바이러스?

 

   "너...... 누구야? 너도 그놈 패거리지? 유니트가 보낸 거지......"

 

   집사는 코웃음을 치더니 빙그르 돌아 밖으로 나갔다. 첨퍼덩. 사우나의 외벽이 무너지며 욕조의 물을 때렸다. 물이 불에 닿아 피시식 거렸지만 화재의 성을 돋울 뿐이었다. 불의 무게에 눌린 석조(石造)들이 갈라지며 밑으로 떨어졌고 캐럿은 둔한 몸을 이끌며 도망가려 했지만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침내 사우나의 원주(圓柱)가 기울어지며 캐럿을 정통으로 찍어버렸다. 탄성도 지르지 못한 채, 캐럿은 즉사했다.

 

   같은 시각, 레믹스폴리스에서 수호경이 머무는 대성당도 화재로 전소되고 있었다.

 

2010.10.23 11:58 ⓒ 2010 OhmyNews
#자살 #현존(現存) #재림자 #폴리스 #집단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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