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동경한 두 소녀, 실천에 옮기려했는데...

[서평] 죽음 다뤘지만, 유쾌한 소설 <소녀>

등록 2010.08.26 11:30수정 2010.08.26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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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도 엄마나 아빠나 나의 몸에 생채기가 마를 날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지옥이었다. 지옥에서 해방되기 위해 나는 몇 번이고 할머니 살해계획을 짰다. 말은 그래도, 칼로 찔러 죽일 용기는 없다. 할머니의 슬리퍼 밑바닥에 촛농을 발라 놓는다거나 할머니가 마시는 컵 안쪽에 표백제를 발라놓고, 이브자리에 지네를 넣어놓는 정도의, 초등학생 수준의 유치한 작전들을 시도해봤으나 족족 실패했다. - <소녀>중에서

어느날 담임선생님이 신인문학상을 탔다는 뉴스가 전해진다. <요루의 외줄타기>란 그 소설이 사람들 사이에 알려진다. 아쓰코는 그 작품이 단짝 친구인 유키가 썼다는 걸 직감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담임선생님이 유키의 미완의 작품을 훔쳐버린 것이다.


아쓰코는 불쾌하기만 하다. 유키가 자기에게 한 마디 귀띔조차 하지 않고 자기를 주인공으로, 그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기 때문에.

'유키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그저 호기심 대상? 그냥 이렇게 나도 모르게 이용당하고 마는?' 이와 같은 분분한 생각들과 함께 아쓰코는 괴롭기만 하다. 소설 때문에 얼마 전까지도 가장 친했던 두 소녀는 여름방학을 앞두고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고 만다.

유키 역시 괴롭다. 소설을 도둑맞아 마음 쓰리다. 아쓰코의 외면도 괴롭고 치매를 앓는 할머니 때문에 온 가족이 몇 년째 당하고 있는 고통 때문에 또한 괴롭고 힘들다. 전직 교사인 할머니는 시시때때로 가족들을 매질하고 험담을 퍼붓곤 했다. 못된 제자로 몰아세우며.

'죽음'이란 건 이 세상에서 당사자만 완전 퇴장하는 거야. 한 사람 빠진다고 이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재수 없는 놈이 하나 퇴장해 봤자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고. 당연히 내가 퇴장해도 나만 쏙 빠질 뿐, 세상은 끝나지 않아.

'죽는다'는 건 뭘까? 남들한테 아무리 미움을 받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쯤 나도 안다. 하지만 '죽음'이란 말은 내게 남을 상처줄 때 사용되는 이미지만 강하지,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실감이 안 나 사실 어떤 식으로 나은 건지 모르겠다. 그걸 알면 나는 좀 달라질까. 죽음이 뭔지 깨닫는다? - 책 속에서


자신만의 커다란 고통과 친한 친구의 배신에 죽고 싶도록 힘들고 괴롭다고 생각한 두 소녀는 '죽음'에 끌리고 만다. 죽음을 직접 경험하고 싶다는 열망에. 그리하여 두 소녀는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각자 죽음을 향해 한발 바짝 다가가게 된다. 아쓰코는 노인요양센터로, 유키는 소아병동으로. 결국 서로 다른 공간에서 죽음과 만나는데….

▲ <소녀>는 서서히 독자들을 흥분시킨다. 마냥 순수하지만은 않은 소녀들의 심적 변화가 묵직하게 가슴에 남는다.(아사히 신문)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휴머니티적인 요소도 갖추고 있으면서, 동시에 무서운 현실의 모습도 보여준다.(마이니치 신문) ▲여기저기 박혀 있던 여러 개의 의문들이 후반부로 가면서 선명하게 결말을 맺는다(니시니혼 신문)

<소녀>(은행나무 펴냄)에 대한 일본 언론들의 추천이다. 처한 환경과 타고난 성격, 가치관이 다른 두 소녀의 죽음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 죽음 실행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쓴 소설이다. 주인공 아쓰키와 유키가 화자가 되어 자신의 고민과 어려움 등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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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겉그림 ⓒ 은행나무

소설의 주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막연하게 두려워하면서 한번쯤 심각하게 고민해봤을, 막연하게 궁금해 하거나 동경하기도 하는 '죽음'이다. 작가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이 열리는 사춘기 두 소녀의 감정 변화를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새삼 생각해 보게 한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죽음을 맛보고 싶어 각자 다른 길을 선택한 두 소녀는 의외의 사건들을 만나게 된다. 용돈 때문에 원조교제를 감행하는 소녀들을 접하는가 하면, 원조교제 누명을 쓰고 가정이 파탄 난, 그리하여 웅크리고 살아가는 한 남자를 만나기도 한다.

또한 성폭행의 위험에도 처하는가 하면, 어린 꼬마들의 대담한 복수에 이용당하기도 한다. 사이버 범죄의 공포에 두려워하는가 하면,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으로 선택한 죽음이건만 '누군가'의 죽음을 막고자 안절부절, 시간을 다투기도 한다.

사실 '죽음'이 주제인지라 자칫 우울하게 읽힐 수 있건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 소설은 유쾌하고 따뜻하게 읽힌다. 이는 삶의 마지막인 '죽음'을 통해 두 소녀가 '살아야 하는 진짜 이유'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듯한 반전 때문에 유쾌하고. 

초등학교보다 중학교, 중학교보다 고등학교에서 교우관계가 넓어지는 건 당연하지만, 내 경우 폭이 넓어진다기보다 엷어져 가는 느낌이다. 과즙음료의 양은 같은데 물만 더 첨가해 묽게 희석되는 느낌? 이런 식으로 점점 더 엷어지다간 밍밍한 물 같은 인생을 보내게 되지 않을까? - 책 속에서

<소녀>는 두 소녀의 '죽음에 대한 경험'을 주제로, 별 것 아닌 것으로 까르르 자지러지다가도 뒤돌아서는 순간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할 만큼 순수하고 감수성 예민한 소녀들만의 세계와, 사춘기 아이들의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가치관을 진솔하게 전해주는지라 책을 읽는 내내 한동안 잊고 살아온 나의 사춘기가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소설 속 소녀들처럼 한때 죽음을 무모하게 동경하기도 했었다.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니 피실피실 웃음이 나올 만큼 참 어이없는 이유로 말이다. 나뿐일까? 사춘기 한때, 혹은 살아가면서 감당할 수 없는 무게 때문에 누구나 한번쯤 죽음을 선택하지 않나? 그 힘든 선택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참으로 어리석고 무모한 그런.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성적을 비관하거나 왕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청소년들도 늘고 있다. 두 소녀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 죽음을 막연하게 동경하는 청소년들에게 소설의 결말처럼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와 깊이를 더하는 계기가 되리라. 아울러 어른들에게는 청소년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소녀>|미나토 가나에(지은이) |오유리(옮긴이) |은행나무|2010-06-04 |값:11,500원


덧붙이는 글 <소녀>|미나토 가나에(지은이) |오유리(옮긴이) |은행나무|2010-06-04 |값:11,500원

소녀

미나토 가나에 지음, 오유리 옮김,
은행나무, 2010


#죽음(자살) #미나토 가나에 #청소년(1318) #일본소설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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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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